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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4 |
<작은 도서관>그리운'본'의 도서관
관리자(2005-04-08 16:51:51)
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의 영웅이 되었던 1992년부터 10년 후 왠지 낯설기만 했던 ‘대한민국’이란 외침이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던 2002년까지 나는 독일의 본(Bonn)이란 작은 도시에 살았다. 본은 천년을 넘긴 오래된 도시이다. 곳곳에 로마 식민지배의 흔적이 남아있고, 베토벤의 향기가 아직도 떠도는 곳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연방수도였다. 한때 30만 가까웠던 인구는 수도 이전으로 20만 정도로 감소하였고, 유럽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에서 시민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대학생인 학문도시로 변모하였다. 나는 본을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한다. 본은 넓은 녹지를 가진 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도시이다. 내가 매일 나가야 하는 본 대학의 화학과 실험실은 집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였다. 하지만 내가 즐겨 찾던 곳은 자전거로 자그마치(!) 10분이나 달려가야 하는 대학본관의 학생도서관이었다. 여기에는 문학, 법학, 의학, 예술과 철학 등 모든 분야의 기본도서와 백과사전이 갖추어져 있어서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치형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 불과 스무 명 남짓한 교수와 학생들이 한가로이 들추고 있는 것들은 대개 신문과 잡지 그리고 신문에 서평이 실린 신간들이다. 나도 마찬가지! 1999년 1월 여느 때와 같이 해가 질 어스름에 이 학생도서관을 찾았다. 그날 내가 집은 잡지는 『지오GEO』. 잡지 끄트머리에는 특집으로 꾸며진 ‘새 천년 맞이 퀴즈’라는 게 붙어있었다. 1번 문제는 “지난 천 년에는 모두 며칠이나 있는가?” 라는 간단한 물음이다. “윤년 규칙만 알면 되는 간단한 문제아냐? 좀 시시한데….” 그런데 내 답은 정답보다 열흘이 더 많았다. 율리우스 달력과 그레고리우스 달력의 윤년규칙을 꿰뚫고 있는 퀴즈박사가 어이없게도 1번 문제를 틀린 것이다. 맙소사! 틀린 답은 꼭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새 천년 맞이 퀴즈’를 못 맞추어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책상 위에는 당장 합성해야만 하는 무수한 화학 구조식이 그려져 있는데 별 도리가 있을까? 게다가 난 천문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라 화학자가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날부터 ‘달력’이란 이름으로 나타난 제니에게 빠져 들었다. 호리병에서 빠져나온 제니는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본이란 도시에는 불행히도 너무나 많은 도서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 시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학도서관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우리나라로 치면 동(洞)마다 하나씩은 있다. 달력에 관한 책을 대출해 읽다가 미진한 부분이 있어서 도서관을 찾으면 사서들은 어김없이 내 요구에 딱 맞는 책을 찾아 주었다. 수메르와 로마의 달력에 관한 1800년대에 출판된 책들이 글자체만 현대적으로 바뀌어 재출판된 것을 비롯하여 달력에 관한 수십 종의 책을 조그만 도시의 시립도서관이 갖추고 있는 것이다. 본에 없는 책을 사서에게 부탁을 하면 다른 도시에서라도 구해서 가져다주었다. 결국 나는 책을 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첫 책인 『달력과 권력』(부키, 2001)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생태생화학을 연구하던 내가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달력’에 관한 책을 내고 또 이 책이 2001년 과학기술부장관으로부터 ‘우수 과학도서’로 선정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일의 우수한 도서관 시스템 때문이다.   내가 독일 도서관 시스템이 우수하다고 하는 까닭은 그들이 첨단 정보기술(IT)로 무장한 전자시스템을 가졌다거나 훌륭한 건물과 여러 가지 편리한 기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런 부분에는 아주 ‘젬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도서관과 갖추고 있는 책이 많다. 인구라고 해 봐야 남북한 합한 정도인 7천만 명에 불과한 독일에는 2001년 기준으로 대학도서관과 같은 학문을 위한 도서관이 1,052개 있다. 독일 학문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만큼 그 장서도 만만치 않아서 평균 20만권씩 갖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 그리고 각 대학에 많은 장서를 갖추고 있는 훌륭한 도서관들이 적지 않다. 이것을 가지고 독서환경의 차이를 논할 수는 없다. 진정한 차이는 동네 곳곳에 자리한 9,327개의 공공도서관이다. 물론 이런 동네 도서관들이 갖추고 있는 장서는 평균 1만 2천권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는 시립도서관처럼 제법 규모가 있는 것이 다수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몇 십 평에 불과한 작은 규모의 도서관들도 40%에 달한다. 독일 도서관에는 전문 사서가 많다. 학문 도서관과 시립 도서관에 근무하는 (행정직이 아니라) 전문 사서는 약 10만 명. 이들이 바로 보물이다. 이들은 책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 또한 갖고 있다. 내가 『달력과 권력』을 쓸 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이 바로 도서관 사서들이었다. 이들은 달력에 관한 고민을 나보다 더 많이 해 주었다. 그런데 독일 도서관의 힘은 대규모의 학문 도서관이나 제법 규모가 있는 시립도서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바로 골목에 있는 3,730개의 작은 도서관들로부터 나온다. 골목 도서관은 거의 교회가 운영한다. 전문 사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열지도 않는다. 대부분 일주일에 2~3번 그것도 아이들 학교가 끝날 시간인 오후 2~5시에 잠깐 열 뿐이다. 골목 도서관의 고객들은 시립도서관이 있는 동(洞)의 중심가까지 가기도 버거운 근처 주민들과 어린 학생들로, 갖춘 책들도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대출도 간단하다. 대출증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준비하거나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할 필요도 없다. 책에 꽂혀 있는 대출 카드에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어 놓으면 된다. 초등학생들이 2학년이 되면 선생님과 함께 동네 도서관으로 소풍을 간다. 그러면 도서관을 지키는 할머니들은 각 책장마다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설명해 준다. 아이들은 방문 할 때마다 몇 권씩의 책을 빌리는데 사탕이나 젤리 같은 작은 선물이 아이들에게 커다란 매력인 것은 분명하다. 내 딸도 학교 앞 교회 마당에 있는 도서관을 매주 한 번씩은 방문하였다. 독일의 도서관은 책을 쌓아 놓는 곳도 아니고 공부하는 곳도 아니다. 독일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곳이다. 시립도서관에서는 권수 제한 없이 한 달 동안 빌릴 수 있고 예약된 사람만 없으면 전화만으로 대출기간을 간단히 연장할 수 있다. 그리고 골목 도서관의 경우에는 책을 잃어버려도 변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골목 도서관은 매년 일정량의 책을 500~2,000원에 고객들에게 팔기도 한다. 공간이 좁아서 새로운 책을 들여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학문 도서관에는 2억 권 이상의 책이 있지만 매년 대출된 권수는 7백만 권에 불과하다. 하지만 총장서가 1억 권에 불과한 공공도서관에서 빌려간 책은 1년에 3억 권이 넘는다. 지난여름 전주의 한옥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 전주는 아름다운 도시다. 푸르고 얕고 조용하다. 하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전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오버’일 것이다. 하지만 전주 곳곳에 골목 도서관이 생긴다면 바뀔 지도 모르겠다. 나도 전주를 사랑하고 싶다. 이정모 |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본대학교 화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과학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달력과 권력』, 『바이블 사이언스』, 『복제인간이 오고 있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색깔들의 숨어있는 이야기』, 『놀라운 우리 몸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북페뎀」, 과학웹진 ‘과학향기’ 등에 과학관련 글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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