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4 |
<작은 도서관>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관리자(2005-04-08 16:50:23)
2002년, 붉은악마가 되어 함께 거리를 누빈 월드컵 이후, 우리들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젊은 네티즌들은 진보적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사상초유의 정치개혁을 선도하였고, 템즈 강가에 우리 기업의 빌보드가 세워져 밤을 밝히며, 몇 가지 상품들은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40개국 만 15세 학생(고교 1학년)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한 결과 우리나라 학생들이 문제해결 영역에서 세계 1위인 것으로 조사됐으며, 읽기 2위, 수학 3위, 과학 4위로 전 영역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참 용하다. 용케도 우리들은 여기까지 헐벗은 나라를 이끌고 왔다.
그러나 이런 성장의 뒤란에서는 실업자가 늘어나 가족이 해체되고, 퀭한 눈의 노숙자들은 밤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뒤척이고 있다. 성장은 더 이상 고용을 낳지 않고, 빈부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질병은 가난과 이웃이 되었다. 교육은 더 이상 계층변화의 수단이 되지 못하고 부모의 능력이 자식의 능력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입시제도는 사교육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공교육의 황폐화는 서민들에게서 희망을 빼앗아 갔다.
우리가 이제 성장보다는 분배를, 양보다는 질을 생각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내가 사는 집 주위에 커다란 영화관이 생겼다. 그동안 영화는 시내에 나가서 보아야 했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려워 꼭 보아야 할 영화가 아니라면 비디오나 디비디(DVD)를 빌려보고 말았다. 그러나 이젠 한 달에 서너 번은 저녁 먹은 후에 걸어서 영화를 보러 간다. 무슨무슨 카드를 이용하면 만원 남짓한 돈으로 4식구가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영화야 말로 가장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가족행사가 아닐까 싶다.
집 주위에 동에서 세운 스포츠센터가 들어섰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래도 맘만 먹던 운동을 뭔가 하나쯤, 수영이나 탁구나 헬스나 볼링이나, 뭔가 하나쯤 하게 되지 않을까? 운동을 하기위해 시간을 조절하고, 식사시간을 조절하고, 귀가시간을 조절하고, 이렇게 조금씩 건강한 생활규칙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집 주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생긴다면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주말, 늦은 아침을 먹고 어슬렁거리며 도서관에 들어가 뭐가 있나 여기저기 살피다 보면, 아! 이런 책도 있구나, 미처 보지 못했던 책들이며 예전에 보았던 영화들도 더러 눈에 띌 것이다. 심심풀이로 컴퓨터에 접속해 친구들에게 안부도 묻고, 한여름 더위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과 옥신각신하며 내기를 걸었던 지명이나 사건들에 관한 확인도 가능할 것이다. 사실 말이지, 아이들이 안심하고 갈만한 장소도 없는 상황에서 도서관이라도 생긴다면 천만다행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커서 마을도서관에서 보냈던 추억을 가질 수 있다면 삭막한 삶에 시원한 물 한 모금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읽히고 싶은 책과 아이들이 읽고 싶은 책은 다르다. 아이들과 책방에 가본 사람이라면 알리라. 좋은 책을 사게 만드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도서관은 우선 좋은 책들만 모아놓았다. 여기저기 아무것이나 본다 한들 크게 우려되는 일은 없다. 아이가 수준에 안 맞게 어려운 책을 본다 한들 뭐 그리 대순가. 읽고 또 읽다보면 언젠가는 성숙해지리니. 읽다 다 못 읽으면 빌려 가면 되고, 읽다 너무 좋으면 사서 가지면 될 것이다. 책방에서 아이들이 만화책을 들고 쭈그려 앉아 읽어대는 걸 보면 마음씨 좋은 책방은 이미 도서관의 역할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도서관은 책방이 아니다.
도서관에서 컴퓨터로 자료검색을 하고 인터넷에 접속하고 영화도 보지만, 그렇다고 도서관이 피씨방과 같은 것도 아니다. 피씨방은 마음대로 접속하기 때문에 게임이나 음란물에 노출될 수 있지만 도서관 컴퓨터는 그렇게 이용하지 못한다. 음란물은 차단되어 있고, 컴퓨터 사용시간은 제한적이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정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그 자료들은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제공되고, 시간을 절약해준다. 미국에 있는 자료이던 인도에 있는 자료이던, 전주에 있는 자료이건 진주에 있는 자료이건, 사서만 있다면 몇 시간, 며칠 만에 그것은 우리 앞에 제공될 것이다.
컴퓨터 파일 형식으로 연결되어있는 책도 있지만 아직도 종이책은 가장 저렴한 정보이고, 가지고 다니며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도서관의 힘은 건물의 크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도서관을 움직이는 세 요소는 자료, 시설, 사서이다. 도서관의 진정한 힘은 자료의 크기에서 나온다. 그런데 이 자료의 형태가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 책에는 다 실을 수 없던 영상이나 음향들이 더해져 이해를 돕고 있으며 시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책을 듣거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도서관들이 세상의 책을 다 모을 수는 없기 때문에 도서관마다 주 이용대상을 정하고 그 부분의 자료를 집중해서 모으면서 다른 도서관과 연계해서 세상의 모든 책을 제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좋은 자료를 모으고 다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까지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사서이다. 사서는 도서관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도록 방안을 모색하고 다른 도서관과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자기도서관에 없는 자료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러나 도서관은 꼭 자료만을 원해서 오는 곳은 아니다. 여유시간을 보내기 위한 장소로, 내일을 준비하는 장소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장소로도 이용된다. 아름답고 안락한 도서관, 편안하고 품위 있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은 사람들이 삶의 여유를 위해서 찾는 곳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크던 작던 사람들이 걸어서 갈 수 있게 많이많이 지어야 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들을 모아야 한다. 한때 기적의 도서관이 지어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이 이 인기에 고무되어 기적의 도서관을 유치하려 애를 썼지만 프로그램은 끝났다. 지방자치단체의 고민은 건축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운영비에 있었다. 20억을 들여 지은 도서관의 1년 운영비가 20억이라면 지방재정이 큰 결단을 하지 않는 한 수용이 어려운 일이었다. 전기, 수도, 경비 등 건물유지비에 들어가는 기초비용이 운영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사서는 1명인데다 자료구입비는 몇 천만 원에 지나지 않아 도서관이랄 수도 없는 적은 자료를 가지고 값싼 책상만 잔뜩 들여놓은 채로 개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도서관이 아니다. 이것은 공부방이다. 공부방은 도서관이 아니라 독서실이다. 사서가 1명에 경비가 5명이라면 이것은 도서관이 아니라 경비실이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주민 1명당 자료비를 규정하는 조례안을 만들자. 도서관에 경비가 필요하면 사서를 경비로 세워라. 도서관에 행정이 필요하면 사서가 행정을 보게 하고, 도서관에 관장이 필요하면 사서가 관장이 되게 하라. 오늘날 도서관의 이런 초라한 형편은 사서들이 행정도 서비스도 다 빼앗긴 채 뒷방마님처럼 자료만을 부둥켜안고 처박힌 것에서 비롯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를 보충할 수 있는 자료구입비. 좋은 자료를 사 모으고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사서. 안락하고 품위 있는 시설. 이 세 가지야말로 부를 분배하여 서민과 그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삶의 여유를 제공하는 진정한 도서관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숙희 | 전북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는 우석대 도서관 열람계장으로 일하면서, 지역사회 도서관 연구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