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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 |
한벽 4경, 철길에 잘린 기운
관리자(2005-03-08 17:42:18)
“따스한 햇볕에 바람 맑고, 밤 드니 비 개인 달이로다. 하늘가 소리개 떠서 돌고, 햇물에 뛰노는 고기로다.” 光風霽月 鳶飛魚躍 한벽당을 세운 월당 최담은 오목대 남쪽에 집을 짓고 이 여덟 글자를 새겨 도의(道義)를 향한 마음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월당 최담의 묘비명에 의하면 그가 71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구계(九溪) 위 옥류동에 한벽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한벽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1416년(태종 16)으로 지금부터 589년전의 일이다. 그뒤 한벽당은 월당의 자손들에 의해 대대로 보수를 해 오다가 1684년(숙종 9)에 당시 관찰사였던 이사명이 한벽당에 이어 9동의 작은 층각을 세웠다고 한다. 1733년(영조 9)에는 전주판관 윤성필이 사재를 털어 보수했으며, 1897년(광무 1)에 후손들이 출연하여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당이 처음 세운 한벽당은 어떤 모습인지, 관찰사 이사명이 중수한 층각은 어떤 모습인지 머리 속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한벽당은 정확하게 한벽당 1동의 건물과 ‘요월대(邀月臺)’이라 불리는 동편에 있는 조그마한 누각 뿐이다.(사진 1)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한벽당의 모습은 1911년의 것이다(사진 2). 1912년 일본 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전북일일신문사가 발행한 금란부라는 책에 실린 한벽당의 모습은 서쪽으로 이어진 제방을 제외하면 아마도 조선초 월당이 세웠을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1911년의 한벽당은 중바위 자락 끝 자연 암석위에 세워진 조금은 도도한 모습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요월대는 보이지 않고, 한벽당 1채의 건물 뿐이다. 그리고 사진 속 제방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 보면 2층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건물은 전주향교 앞에 이전 복원한 만화루(萬化樓)이다. 복원되기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무이한 만화루의 모습일 것이다. 얼마 뒤 한벽당의 동쪽에는 지금의 요월대가 나타나게 된다.(사진 3, 사진 4) 사진 3과 사진 4를 보면 한벽당 동쪽에 조그마한 건물이 세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요월대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에도 요월대라 불리웠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사진 3과 사진 4를 가지고 대략이나마 추정해 본다면, 먼저 두 장의 사진 중 한벽당 주의의 나무들을 보면 사진 3이 사진 4보다 앞서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진 3에는 보이지 않던 길이 사진 4에는 나타나고 있다. 한벽당의 동쪽에서 한벽당과 요월대 사이로 오르는 길이 사진 4에는 선명하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진 2에서도 그렇듯이 원래 한벽당에 오르는 길은 현재 오모가리집에서 올라가는 서쪽 길 뿐이었다. 한번쯤 한벽당엘 가본 사람이라면 한벽당의 동쪽으로 치명자산에 이르는 길이, 원래는 중바위 자락에서 바로 전주천으로 이어지는 풍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동쪽에서 한벽당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 길이 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전라선 철도가 놓이게 되면서 제방이 만들어지게 되고, 한벽굴이 뚫리었기 때문이다. 월당이 낙향해서 도의(道義)를 세우기 위해 힘쓰려 했던 한벽당의 정기가 잘리게 된 것은 바로 사진 4에 보이는 전라선의 설치였다. 사진 4를 보면 철로가 놓여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막 터널 공사를 끝낸 뒤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에 있던 전주역으로 지나 간납대(전 영생고자리)를 자르고 오목대-이목대-한벽굴을 지나 중바위 서쪽아래를 타고 색장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옛 철길이 지나가는 길목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부아가 치밀 수 밖에 없다. 일본은 전라선을 놓는다는 미명 아래 전주 초입부터 건지산에서 가련산(법원 뒷산)으로 흐르는 지맥을 잇기 위해 쌓은 덕진제(德津堤)의 기운을 잘라 놓더니 간납대에 이르러서 전주의 정신이 깃든 자만동, 옥류동, 한벽당의 정기를 일본도로 단칼에 잘라 놓은 듯 끊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옛 어른들의 말을 빌리자면 전주에는 호랑이 기운을 가진 승암산과 용의 기운을 가진 용두봉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서 호랑이의 기운은 전라선의 철길로 끊어버리고, 용두봉의 기운은 경목선(국도 1호선)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그 지맥을 깍아 내려 용머리 고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말을 한낱 감여가(풍수가)의 일언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웬지 갑갑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철길이 놓이고 기차가 운행될 때 자만동 부근에 이르면 자꾸 기차가 멈추었다고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런 현상에 일본인들은 부랴 부랴 발산에서 오목대에 이르는 다리를 놓았고, 그 이후로는 기차가 멈추는 일이 었었다고 하니 어찌 철도의 설치가 전주 죽이기와 무관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전주-남원간의 철도가 개통된 것이 1931년 10월이 일이므로 사진 4는 1920년대 말쯤에 촬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일제시대 요월대에 세워졌던 건물은 1912년에서 1920년대 사이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벽당 동쪽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서져 버렸다고 한다. 1963년에 전주농고 학생들이 한벽당 건너편에서 찍은 사진 5를 보면 요월대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5에 있는 한벽당 밑 암벽에는 하얀 빨래가 넓게 널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 언제 쯤인가 찍었을 이 사진을 보면 한벽당이 몇 곳 안되는 소풍지로서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한동안 사랑을 받았고(사진 6), 그리고 빨래터로서의 시민들에게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사진 1로 돌아가보자. 사진 1에는 새롭게 복원된 요월대가 있다. 이 요월대와 사진 3, 사진 4을 비교해 보면 건물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근대이후 사진자료가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요월대(邀月臺)란 달을 맞이하는 곳(건물)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방향은 당연히 달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남쪽을 향하고 있어서는 요월대라는 이름과 맞지를 않다. 현재의 요월대가 정확히 언제 복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월대라 이름한 이상 건물의 방향과 어긋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요월대의 설치가 조선시대부터인지 알 수 없어서 뭐라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한번쯤은 명칭과 건물방향의 부조화를 어떻게 풀어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볼 일이다. 끝으로 전주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새우려고 할 때 여전히 옛 철길은 눈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는 철벽과 같은 것이다. 전라선을 옮길 때 단 한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 역시 반백년을 내다보지 못한 안일한 생각으로 일본이 해 놓은 작태에 한 숟갈을 더 보내는 꼴이 되어 버렸다. 시민들과 오모가리집에서 한벽당에 오를 때면, 이 썩을 놈의 다리가 없어져 버려야 하는데 하는 생각은 나만의 쌩뚱 맞은 궁시렁이 아닐 것이다. 한벽당을 랜드마크화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전주정신의 복원인지도 모른다. 옛 사람들이 한벽당에 올라 한벽당의 풍광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읊었는데, 이를 음미해 볼 일이다. | 글.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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