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소통을 위하여
관리자(2005-03-08 17:38:08)
2월의 학교는 한가하다. 졸업식 치를 요량으로 며칠의 수업일수를 배정했다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사나흘밖에 되지 않은 이 짧은 등교일에 글 쓰는 시간을 가졌다. 예전에 근무했던 자그마한 시골학교, 고작 30여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 졸업생들에게 재학생들이 편지를, 말하자면 대표 학생 한 명만 읽는 송사가 아닌, 재학생 모두가 글을 작성하여 그걸 모든 졸업생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었다. 학생수가 적고, 마을 단위로 먼 길을 함께 등교했기 때문에 선배 후배랄 것 없이 전교생이 그럭저럭 모두 알고 지내고 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해냈다. 송사와 답사가 예의 정해진 틀에 의해 익명의 선배와 후배가 주고받는 상징적인 의식을 버리고, 진심어린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질 것을 기대하면서.
올해 2학년을 담당하고 있어 내가 맡고 있는 4개 학급 학생들에게라도 아는 선배들에게 졸업을 축하하며 앞날을 축원하는 개별적인 편지를 쓰도록 했다. 그랬더니 난감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알고 지내는 선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손을 들어보게 하니 한 반에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고 지내는 선배가 있다는 학생은 대여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350명이나 되는 선배, 바로 위층에서 2년 넘게 한 건물 한 울타리에서 해가 뜬 낮 시간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학교에는 교육과정이 있다. 220일 이상의 수업일수를 채워야 하고 국가에서 고시한 교과목을 학생들은 이수해야 한다. 그밖에도 특별활동, 재량활동 등이 있다. 국가·지역사회·단위학교 수준의 교육과정 외에 잠재적 교육과정이 있다. 또래집단내의 다양한 신체활동과 의사소통, 교사의 학급운영과 인간적 품위와 매력, 학교 내의 보이지 않는 전통과 분위기 등에 의해 학생들의 인지적 정의적 발달 특성들은 느리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학교교육이 단순히 교과서 위주만으로 운영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교과 성적까지 포함해서 어떤 학생들이 뛰어난 성취를 보여주는지 잘 알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성취동기이다. 사설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제아무리 시켜도 목표가 없는 학생들은 공부하는 흉내만 낸다. 설령 상급학교에 진학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성취동기를 활성화시키고자 한다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학생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 방법은 실로 다양하다. 독서, 여행, 문화체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공계의 위기를 얘기하는데, 어렵긴 하겠지만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등의 책을 학생들에게 읽혀 과학의 경이로움에 빠져들게 하고 있는지, 인문학의 위기가 몇 년째 우리 지성계에서 논의되고 있는데 가령, 제대로 된 학교교육이라면 누구누구가 무슨 책을 썼다는 식의 단편지식만 암송하게 할 일이 아니라 『열하일기』와 같은 원전을 읽어 고전의 깊은 맛을 학생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는지?
학교교육은 평생교육의 일부일 뿐이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기갱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개인의 전망과 통찰력을 키우지 않으면 미래는 매우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불행한 가정이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장차 커서 40~50대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면 나머지 생애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수명이 연장되어 그들 세대가 성인이 되면 평균 수명이 100살에 육박할 텐데 말이다. 학생 스스로 세상에 반응하고 교호하면서 자신의 좌표를 그리고, 주어진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여 주인으로서의 삶을 누려야 한다.
지난 해 12월에 한국문예진흥원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전북청소년문학』을 창간했다. 전북지역 학생들이 쓴 시와 소설, 시나리오, 수필, 독후감 등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단위 학교와 지역 내에서, 혹은 교육청 차원에서 학생들의 글을 모아 펴낸 작품집이 있긴 하다. 다만 우리가 초점을 맞추고 크게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학생 문예 동아리였다. 단순히 여러 학생들의 작품들을 모아내는 일로 정부예산을 쓰고 싶지 않았다. 문자로 하는 모든 행위가 세상에 대한 작용이고 이것이 역동적이기 위해서는 문예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할 터였다. 그런 힘 있는 주체는 마땅히 동아리가 되어야 했다. 고창의 ‘동리문학회’는 올해로 4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5공화국 때 정치적 압력 때문에 중단된 남원의 ‘햇보리 문학회’도 30년을 훌쩍 넘겼다.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역사를 창조하고 있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시화전’, ‘문학의 밤’ 등을 치렀다. 돈이 부족하고 장소가 없을 때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갔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튼실한 뿌리를 내렸다. 이들 동아리들은 여러 학년과 학교가 함께 뒤섞여 있었고, 그들은 일반학생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정체성이 삶에 스며 있었다. 이를테면, 선배가 이뤄놓은 것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책임감, 조직을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갈등과 문제의 슬기로운 해결, 그리고 마법에 걸린 듯, 문학을 운명처럼-대단한 자부심과 열정은 종속변수다- 받아들이는 성향. 그들은 창백한 청소년이 아니었다.
그들과 만나면서 나는 확연하게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깨쳤다. 놀랍게도 지역내 소규모 문학운동을 자기들만 하고 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들을 고립된 상황으로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고단했던 외로움만 씻어 주어도 그들의 힘은 몇 배로 커질 듯싶었다. 지난 해 12월 중순에 남원 햇보리 문학회가 주최한 문학의 밤 행사에 ‘동리’뿐만 아니라 장수 산서고의 ‘그루터기 문학회’, 전주 중앙여고의 ‘푸른 날개’ 등이 함께 참여한 게 인연이 되어 올 1월초 고창에서 연 동리문학회의 시화전엔 다른 지역의 학생들이 여행 삼아 찾아준 것이다. 이제 됐다 싶었다.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수많은 학생 문예 동아리를 찾아 만남을 주선하고 서로 경험을 공유하도록 엮어 준다면 비단 문학에서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두루 혁신과 풍요로움이 솟아 넘칠 일로 보였다. 한결같이 그들은 싱싱했다. 세상을 냉철하게 해석하고자 했고, 세상에 적극적으로 맞서 대응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쑥박쟁이 고개 들면 개나리 들떠 웃고 아지랑이 커튼 뒤에 숨어서 수줍게 모습을 비추는 봄이 깨이면 문학의 폭을 넓히기 위해’ 영역을 훨씬 넓히게 될 것이다. 순창으로 익산으로 무주, 진안으로 김제, 정읍으로 다툼 없이 교차점을 만들어 상서로운 지역문화의 씨앗들을 뿌리게 될 것이다.
학년만 달라도, 지역만 넘어서도 모든 소통구조가 여지없이 막혀 버린, 이 척박한 교육·문화적 토양에서 모세혈관처럼 생명을 북돋우는 희망의 자맥질을 고무시킬 책무를 실감한다. 정말 속물적인 생각이지만 빌게이츠가 그랬다잖는가? 저 혼자 힘으로 성공할 자신이 없거든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주위 사람에게 잘 보여라. 그것이 학교든 지역사회에서든 참여의 폭을 넓히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개인의 성취를 뛰어넘는 사회적 자산이 아니겠는가? 남들과 더불어 바쁘게 살아갈 일이다. 『전북청소년문학』은 올해 책으로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전염력이 높은 신명나는 동아리들의 한판을 만들 작정이다. 봄날이 온다.
최병흔 | 1963년 전북익산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 1987년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재 전주남중학교에서 일하면서, 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 산하 청소년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