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
관리자(2005-03-08 17:30:47)
먹물의 원년
한국사회에서 공적인 매체에 글을 발표하는 사람은 대체로 생년을 밝힌다. 출신 지역과 출신 대학은 기본, 작가들은 출신 매체를 밝힌다. 진보적 지식인들이 여기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관행은 글쓴이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얼마간 도움을 준다. 음, 배고파 본 양반이구먼, 아, 광주에 빚이 있는 나이네, 그래, 이 친구 교련복에 원산폭격이 뭔지 모르는구먼, 등 선입견을 줄 수도 있지만 그가 어떤 환경과 배경에서 살았나를 이해하는 시금석이 되기도 할 터. 아직 남한 땅은 사회구조나 문화가 인간을 형성한다는 논리가 굳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존 레넌이 총에 맞아 죽은 해를 삶의 원년으로 삼는 작가도 있지만 적어도 79년의 10.26과 80년의 5.17은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먹물들에게는 원년이다. 남한사회라는 공동체 안에 살면서 이 지점의 정치적 트라우마는 많은 지식인들에게 흉터와 같은 자괴감으로 남는데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68년생까지는 이 논리가 성립된다고 믿는다. 그 이후 분들은? 그들의 현대사 공부에 따라 다를 터.
이어지는 트라우마
영화 <그 때 그 사람들>은 그 원년의 하루 동안을 다루는데, 광화문 현판을 쓰신 영감과 그의 머리에 총알을 박았던 이가 결정적 순간에 일본말을 쓰는 대목이 나온다. 조금 오버하자면 나의 작은 트라우마가 어른거렸다. 나. 시골서 엄마와 떨어져 작은 도시의 국민학교 1학년 때 (나는 이 극중 할아버지의 영식과 같은 해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쉽게, 뺑뺑이 1회다.) 전학을 와 친척집에서 얼마간 맡겨진 적이 있다. 몸을 씻겨주고 밥을 먹여 준 그분들이 고맙긴 하지만, 우리말을 쓰다가 갑자기 어른들이 일본어로 말하면서 낄낄거리고 묘한 웃음을 짓던 날들을 잊을 수 없다. 어리다고 그 이야기가 빤스 안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또 있다. 요즘 남자 고등학교 책상을 보면 한 두 자리에는 반드시 사이코마테(죽을 때까지)라고 일본어가 쓰여 있다. 감독은 우리 사회를 관류하는 폭력의 중심에 일본말로 해야 가오(?)가 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본 것이다.
수직과 수평
잔혹할 정도로 통렬한 풍자의 희극이 블랙 코미디다. <효자동 이발사>는 사실 코미디만 있지 블랙의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에는 블랙이 있다. 박통 역을 한 송재호는 시골 은퇴한 교장 선생 같은 부드러운 이미지로 그려졌지만, 천만에, 나는 극장을 나오면서 감독의 솜씨에 고무되었다. 아니, 한 시대의 원년이라 할 큰 사건을 이렇게 한 바탕 소동극으로 그리다니. 긴급 소집된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과 장군들이 각하의 거시기를 모자로 덮는다. 육군참모총장은 위병(홍록기나 봉태규라니?)의 저지에 막혀 본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의사들은 각하의 시신을 보고도 누군지 모르다니. 영감님의 죽음과 관계된 공개되지 않은 X-파일을 본 나의 즉자적 반응은 일단 통쾌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보여준 박광수식 목소리 낮추기 같은 점잖은 방식과는 달리 임상수의 에둘러 말할 줄 모르는 대책 없음도 맘에 들었다.
카메라는 트랙을 사용한 남산의 고문실은 장면은 짧게 훑고 지나간다. 스타카토로 끊어 치던 수평의 배경들이 수직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시점부터 감독의 칼놀림은 예리해진다. 부엌에서 뒷물하는 하급 경호원의 마누라로부터 훑어 온 카메라가 그냥 권력의 핵심부로 쑤시고 들어가면서부터는 철저히 부감샷으로 가는데 필름 말고는 어떤 활자 매체도 따를 수 없는 장점이다. 피범벅의 시체나 전구에 가려진 각하의 시체 혹은 김부장의 체포나 구타심문의 과정을 잡는 천장에 붙은 카메라를 생각해 보라. 좋은 수직이다. 짝짓기 책임관 주과장(한석규 분)이 통행금지된 세종로 앞 도로를 뱅뱅 도는 장면 또한 잊을 수 없는 버즈아이샷이다.
동시대의 비동시성
권력의 핵심에 있던 야수들을 띨빵하게 그린 이 영화를 나는 권위주의를 무너뜨리는 카타르시스로 보았다. 그러나 다르게 보는 눈이 있다. “이 영화의 최대 악덕은 민감한 내용을 강하게 다뤘다는 게 아니라, 역사를 버릇없고 무책임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어떤 기자의 리뷰다. 자신이 지닌 필터보다는 물통의 수질이 나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동물의 왕국에 사람이 안 나온다고 주장하는, 그 기자가 속한 집단과 생년을 일단 의심한다. 물론 그의 의견도 존중받아야 할 터이다. 그래, 올리버 스톤의 <J.F.K.>처럼 품위 있게 다뤄주길 바랬을까? 그 기자는 ‘어떤 것에 대한 부정’보다는 ‘어떤 것에 대한 긍정’을 원했을지 모른다. 미움과 분노를 버리고 지구적 사고를 하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박통이 가고 나서 우리네 삶이 꽃게 속살 파먹기처럼 더 맛있고 즐겁고 신났느냐고? 상어와 육식동물들이 고문하던 기술로 필름에 가위를 들이대는 판에 나는 그의 질투가 어이없다고 느낀다. 영화 끝자락, 우적우적 먹어대는 안가의 집사처럼 우리도 이십 수년을 그렇게 먹고살았을 것이다. 미국적 가치와 자유시장주의에 대해 궁시렁거리고 때론 국이 되어 적당히 빨기도 하면서 살아오는 동안 이제 김부장처럼 입 냄새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세상은 민주화되었다는데, 정말 그런가. 유신 때 간첩의 누명을 쓰고 죽어간 사람들의 진실을 밝혀주는 법은 마련되었는가. 산 것들을 지키기 위해 100일 단식한 스님을 두고 여승이 과연 안 먹는가 봤냐고 말할 수 있는 노망한 잡지의 사장이 있고, 파이프 담배를 문 고문자는 엑스파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외친다. 제발, 그가 밥 먹여 주었다고 말하지 말라. 눈을 부라리며 밥을 먹으라고 또 밥멕여주며 피눈물 뽑았던 그들에게 감사하라는 소리 이제는 집어치우라고.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
소도 안다. 법원의 판단은 분명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다. 다큐장면이 없는 영화는 확실히 조건형성(으르렁거리는 두 마리 짐승의 외부적 조건)이 만든 우발적 상황으로 해석의 폭을 좁힐 위험을 갖는다. 각하의 헬기에서조차 자리를 뺐기는 김장군이 질투에 눈이 멀어 차대위를 죽일 수밖에 없는 지극히 개인적 상황 말이다. 결국 이런 폭 좁음은 70, 80을 견딘 운동권에게 임상수가 욕을 먹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상영 지침’에 감사한다. 우리시대 문화예술의 이해 수준이 아직 야만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블랙코미디를 늘어놓을 아량이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밝혀야 할 진실과 시각이 많아야 하기에 앞으로도 10.26 버전은 쭈욱 계속될 것이다. 후일 티비 드라마에서 중년 가수 보아가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하다가 장동건이 소지섭에게 빵빵 하는 버전이 나올지? 이 절름발이 필름이 아직 100만 밖에 넘지 못했다는데, 호텔방 묵주사건이 잠잠해질 때쯤 이 영화는 비디오로 출시되고 또 내년에는 설 특집 명화로도 나올 것이다. 아니, 내 아이가 어른이 될 즈음에는 교육방송 추억의 명화로 다시 상영될 터. 고문기술자가 호텔 아닌 광장에서 묵주 들고 진정 참회할 때까지. 그가 끝내 참회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좋다. 그는 항상 우리 초식동물들에게 끝없는 긴장과 때론 코미디의 소재를 오래도록 착실히 제공해 줄 테니까.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