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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관리자(2005-03-08 17:26:24)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굴레이고 어떤 이에게는 나이가 자유다. 여든 여덟, 미수(米壽)의 나이. 일곱 살 때 붓을 잡기 시작했으니 화력(畵歷) 80년!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속을 들여다보는 아이처럼, 나는 여든 해의 생애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섰다. 대체 이 거대한 깊이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사람들이 “하도 들끓어 싸서” 익산에 있던 화실을 군산으로 옮겼다는 노화백은 여전히 손에 붓을 들고 있다. 나이가 주는 억압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나는, 여든 여덟의 화백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자못 걱정스러운 채다. 허나,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고 했던가. 그는 소년처럼 경쾌하고 청년처럼 활달하다. 뇌종양으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고 지금도 뇌혈관이 9개나 막혀 있어서 날마다 약을 먹어야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관자놀이 옆쪽으로 수술 당시 꿰맨 상처가 깊게 패여 있다. 오른쪽 눈이 거의 감겼다가 이제 겨우 뜰 수 있게 됐지만 “아픈 것엔 관심 없어! 내 나이가 여든 여덟인데… 죽어도 원이 없지.” 하며 보는 이의 걱정을 날려버린다. 다만, 이라고 노화백은 단서를 단다. 다만… 작품을 더 못해서 한(恨)이지. 여든 해 동안 그려온 것으로는 부족하단 말인가. 더 이상 그릴 무엇이 있을까 싶지만, 그림에 대한 노화백의 집념은 세월을 거꾸로 세는 것인지 청년의 그것보다 더 파릇하다. 그 동안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만을 주로 그려와 놔서 앞으로는 추상계열의 작품을 많이 그려보고 싶다는 하반영 화백. 화가의 그림에 무슨 단계야 있겠는가마는, 지금까지의 것을 뛰어넘는 “쉬르 레알리즘”을 꼭 추구해보고 싶다는 노화백의 열정은 아직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살아 꿈틀거린다. “쌍놈 소리 들어가면서, 부모 속 있는 대로 썩혀가면서 선택한 길인데, 화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세계를 다 섭렵해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하나의 사실을 정밀하게 묘사도 해보고 현실세계를 기록도 해보고… 그것도 아니면 ‘쉬르’도 해보다가, 그것도 아니면 미지의 세계, 뭐 우주의 생성과 근원에 이르기까지, 누가 본 것도 아니고 사진으로 찍어둔 것도 아니지만 그런 미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내 관심은 끝이 없어.” 그의 관심을 반영하는 양, 올해만 해도 전시 계획이 빽빽하게 잡혀 있다. 3월 25일부터 전북예술회관에서 미수기념전이 계획돼 있고, 5월에는 일본 작가 20여명과 함께 하는 한일전을 연다. 곧이어 캐나다 초청 전시회도 이어진다. 5월 21일에는 군산 시청 전시실에서 한일전 일본측 위원장과 2인전도 가질 계획이다. 그런 작품전이 아니더라도 해마다 상이용사, 결식아동을 돕기 위한 작품기증을 하기 때문에 그의 붓질은 하루도 쉴 날이 없다. 그림을 기증하여 그 판매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도와온 지는 벌써 수십 년이 넘었다. 그렇다고 화백의 삶이 특별나게 풍족하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예술은 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7살 때부터 서예를 시작한 그는 서당에서 사군자며 수묵화를 익혔고 보통학교 4학년을 중퇴했다. 온통 그림에 혼이 팔린 그에게 학교교육은 불필요했다. “선생 한 사람한테 기계처럼 배우는 것이 싫었어. 내 혼, 내 사상, 내 철학은 오직 하나뿐인데, 어떻게 기계처럼 다른 사람에게 배우겠냐고. 그건 내 것이 아니지.” 예술가에게 그런 자기고집이야 있음직한 것이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고달픈 길을 자초한 꼴이 됐다. 글이야 쓰고 싶을 때 쓰면 그만이지만, 죽도록 그리고 싶어도 재료가 없으면 못 그리는 것이 그림이다. 얼마나 고달팠던지 그는 지금도 어린애들한테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림 하는 데 돈이 엄청 들어가. 돈이 들어간 만큼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거든. 대학에서 배출하는 화가 지망생들이 한 해에 수 천 명인데, 그 중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 도태해. 취미가 아닌 이상 직업으로 갖지는 말라고 하고 싶어. 더러 선생이나 교수하면서 미술을 겸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화가가 아니야. 그냥 선생이지.”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그는 절대로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 필요했기에 요즘말로 ‘알바’를 뛰었다. 주로 영화, 연극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제법 연기력이 돋보였던지 신상옥이며 김진규며 김희갑이며… 유명짜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었고 주연으로 캐스팅하겠다는 이도 여럿 있었지만 그는 손과 발의 출연으로 만족했다. 손이 세 번 나오면 세 몫의 출연료를 받았고, 그 돈으로 그림을 그렸다. “가난을 면하려면 영화를 해야 한다”는 유혹의 손길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영화 일에 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까웠다. 하기사, 지금도 밥을 먹는 시간이 아깝다는 그다. “나는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림을 위해 조금 먹어둔다, 이거지. 생명을 유지해야 그림을 그리니까.” 일상의 모든 행위는 철저히 그림으로 귀속되고 그림으로 귀결되지 않는 일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돈을 따랐다면, 명예를 따랐다면, 사람을 따랐다면, 지금의 하반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는 노동으로, 화공은 그림으로   80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고 머리 속에는 늘 그림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림 속에 갇혀 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매우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해온 축에 속한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한 ‘반영미술상’이며 장애인들의 사회체육 활성화를 위해 마련한 ‘하반영배 전국 론볼링 대회’가 그것을 말해준다. 반영미술상 운영위원회가 있고 하반영 화백 기념사업회가 있지만, 사실 그는 실무적인 일에까지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 “내 입김이 들어가면 수상자들이 어용이 돼버려서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의 그림은 그렇듯 사회적인 공익을 위해 아낌없이 쓰여진다. 지금까지 그림을 통해 기부한 액수를 따져보면 수십 억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하나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의 그의 철학이 깔려 있다. “나는 화공이야. 화공은 그림으로, 노동자는 노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나는 종교는 없지만 나에게 그림을 그리면서 밥을 먹게 해준 조물주에게 감사해.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서 사회에 이바지를 하는 것 뿐이야.” 쉽고 단순한 말처럼 들리지만 자신의 혼이 들어간 작품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선뜻 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집착 없이 비울 줄 아는 도인적 자세가 있지 않고서야 평범한 필부들은 흉내내기도 어려운 일. “인간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기 마련이야. 그런 걸 빨리 알고 속을 비워야해. 나는 무(無)를 좋아해. 무는 유의 싹이거든. 속을 비웠다고 못 사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과욕이 병이지. 남보다 앞서려고 하는 것도 병이고… 자라는 천천히 천리를 가지만 토끼는 빨리 가려다가 지쳐서 죽어.” 그림의 생명은 작가의 개성과 영혼 그것은 세월이 얹어준 현명함일지도 모른다. 여든 여덟. 생에 대해 어떤 기대와 설렘이 있을까 싶지만 그는 젊음 못지 않게 나이듦도 좋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어서야 그것을 알게 된다고. 그러니 그 언저리에도 가보지 못한 채로, 어찌 나이듦의 자유를, 그 끝자락이라도 만져볼 수 있으랴. 그 자유는 그림에 대한 잣대에서도 보여진다. “그림만 그리는 것은 기교요 기계일 뿐이며,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이 깃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노화백은, 어린아이의 그림이 서툴다고 하여 기교만 왕성한 어른의 작품보다 못하다고 평할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더러 심사위원도 해봤지만 몇 분만에 많은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작가 개인의 개성과 영혼을 강조하는 그는, 그래서 일부러 작심하고 제자를 기른 적이 없다. “지금도 학교 선생들이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하지만, 느그들 허고 싶은 대로 해라, 하고 말아.” 하지만 그가 꼭 하는 한 마디가 있다. 서양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서양화 그리지 말라는 것이다. 서양에 없는 것을 지니고 있어야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다는 것. 동양화에서 출발했지만 서양화 역시 많이 그렸던 화백인지라 “선생님 서양화가 아니신가요?” 했더니 단박에 답변이 돌아온다. “나는 화공일 뿐이지 서양화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내 신조야.” 비록 ‘서양물감’을 사용하지만 동양적인 뿌리를 찾아서 작업을 한다는 노화백은 “서양화가는 다 서울에 있고 이런 촌구석에는 서양화가 없다”고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긴다. “대학교수며 이름난 화가들이 정작 붓으로 자기 이름하나 못 쓰는 게 현실이야. 소위 대가라고 하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붓에는 정신이 들어있어. 붓 글자 하나 못 쓰면서 서양화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지.” 미수의 청년화백 그가 요즘 자주 되뇌이는 말은 “진인사대천명”이다. ‘천명’을 기다리는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진인사’ 밖에 없다고. 허나 천명을 기다리는 자리가 이토록 허술한 화실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노화백의 화실은 커피숍이었던 자리에 화구들만 덩그러니 옮겨놓은 채다. 벽면마다 박혀있는 거울도 안 떼어낸 데다 기역자 주방도 그대로다.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 계시나요? 했더니 뭐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귀찮은 눈치다. “가족들은 다 분산(分散)해서 살아.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다 내 가족이야. 한 방에 있으면 가족이지.” 깨달음이란 자유에서 오는 것일까. 노대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이미 선승(禪僧)의 경지에 들어선 것 같다. 거창한 전시실도 필요 없고 명토 박은 멋진 화실도 필요 없다. 찢어진 도화지에 서양물감으로 흘려 쓴 ‘하반영 화실’이라는 글자가 전부인 작업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세상사의 어떤 그물에서도 자유로운 영혼 하나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 베레모에 희끗한 수염, 약간 구부러진 등… 여든 해 넘도록 화공으로 살아온 자유인, 미수의 청년화백 하반영의 모습이다.   | JTV 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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