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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 |
도립미술관, 거기에 있다
관리자(2005-03-08 17:25:08)
가을이었다, 시내 곳곳에서 도립미술관 개관을 알리는 소식을 접했던 때가. 기쁨과 함께 설레는 기대로 즐거웠었다. 이젠 가까운 곳에서 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오래전 대전의 시립미술관을 둘러보며 ‘여기 사람들은 참 좋겠지’라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 그곳에 가면 언제나 그림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우리에게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더구나 모악산 자락에 안겨있는 미술관은 꼭 그림을 목적으로 찾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운 나들이 장소이기도 하다. 커다란 통 유리창을 통해 바라다보는 미술관 너머의 풍경은, 그대로 또 하나의 그림으로, 예상외의 선물까지 받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자유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직장인으로서 주말을 이용하여 미술관을 찾곤 했지만 난 아주 작은 바람 하나를 갖고 있다. 평일 오전 한가한 시간에 홀로 그림을 핑계 삼아 설레임 하나 챙겨 들고 미술관으로 향하는 거다. 꼭 전시실을 돌며 작품 하나하나에 눈도장을 찍듯 그렇게 돌아보지 않아도 좋을 듯 싶다. 오늘은 단 하나의 그림만 보고 가는 거다. 제일 맘에 드는 놈(?) 하나만 딱 찍어서 제대로 데이트를 즐기는 거다. 중간 중간 말을 건네기도 하고, 그저 그의 말에 귀기울기만 해도 되겠지. 커피는 내가 뽑아야 할까? 함께 잠시 밖으로 나가 시원한 바람을 바라보는 것도, 어깨가 부딪치길 기대하며 나란히 걸어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그렇게 한나절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싶은 것이다. 그랬었는데, 이번엔 어찌하다가 예상치 못한 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명품선’전에 다녀오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중 선정된 국내 회화위주의 작품113점 (서양화 53점, 한국화 41점, 판화 10점, 사진 9점)이 이곳 전주까지 나들이를 하였다. 일부러 서울까지 찾아 나서야만 볼 수 있었던 그림들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먼저였던 전시회였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최소한 세 번 정도는 찾아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첫 만남은 글 모르는 아이처럼 맑은 눈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그림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느껴지는 그대로 솔직하게 마음에 담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찾아가서는 설명을 들으며, 처음에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움을 발견하고, 첫 만남의 느낌과 비교해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듯싶다. 그때 그 느낌이 잊혀질 때쯤 한 번 더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눈으로 그림과 직접 대면하노라면 또 다른 감흥이 발걸음마다 축복처럼 쏟아질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이처럼 즐거운 미술관 나들이를, 한 달간의 전시기간이 길다고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어느새 전시회 마지막 날이 되어버렸다. 세 번은커녕 이번 전시는 관람조차 어렵겠다고 생각하며 백제기행에 참석하였는데, 기행의 마지막 순서를 미술관으로 정했단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셈이다. 기행팀과 함께 미술관에 도착할 즈음에는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긴 계단을 올라가서 마지막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면 거기에 빠져들고 싶은 풍경 하나가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내 눈이 호사하는 시간들은.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눈 내리는 겨울풍경을 맘껏 바라다보았다. 급한 마음은 벌써 전시실로 향하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휴일이라 제법 많은 관람객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도 적지 않았다. 모악산 등반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러 그림과 함께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사람도 보였다. 이렇게 미술관은 저 멀리 홀로 우뚝 서있지 않고 사람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그림들은 관장님의 설명 덕분에 보다 쉽게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관장님은 그림에 대한 설명이 오히려 작품감상에 방해요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하신다.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만, 설명을 들으며 그림 보는 재미 또한 크다. 많은 작가들을 그림을 통해 만났다.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을 자아내는 유명작가들의 그림을 이렇듯 가까운 지역의 미술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니… 이곳에서 나는 청전 이상범과 젊은 나이에 아깝게도 요절한 여류화가 최욱경을 만났다. 이상범의 산수화에서 느낄 수 있는 그 막연한 쓸쓸함이 난 좋다. 잡목들이 듬성듬성한 야산, 좁다란 산길 위로 소와 노인이 간다. 그 위에 얹힌 스산한 바람과 침묵. 잠깐 눈을 감으면 길가의 풀잎을 쓰다듬으며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내맡긴 나를 바라볼 수 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눈을 떠보니 파스텔톤의 환희가 음악처럼 넘실대고 있다. 최욱경의 그림이다. 그렇다. 이 그림 앞에서만은 솔직해져야 한다. 음악의 선율에 몸을 내어 맡겨 나를 자유롭게 하듯 잠시 동안이라도 정신이 육체를 벗어나 춤추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내 상상의 끝은 어디쯤일까? 이렇게 내 그림읽기는 계속되었다. 아름다움을 향한 끝없는 여정이다. 설명과 함께 둘러본 전시실을 그대로 나서기가 서운해서 다시금 나는 청전의 산수화 앞에 섰다. 이제는 바람도 잔다. 마른 풀잎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요함, 그림에서는 이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돌아서는 발걸음도 조용하게 미술관을 나서니 어느새 눈은 멈추었고 세상은 다시 활기에 차있다. 내 평범한 생활속에서 이 여정이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고운 눈길로 그림을 보듯 나를, 그리고 너를 어루만지고 싶다. 그래서 우리가 아름답기를 희망한다. 나는 액자 속의 그림으로 살고 싶다. 신명숙 |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랐다. 간호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현재는 공무원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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