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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 |
<마라톤>자다가도 달리고 싶을 때가 있다
관리자(2005-03-08 17:08:26)
무슨 이유에선지 바닥에 등만 닿으면 울어대던 까탈스러운 첫 아이, 새내기 직장인으로 여유가 없었던 남편의 소원함, 20개월 차이로 태어난 둘째 아이. 늦은 시간 두 아이를 겨우 재워놓고 베란다에 나가 남편의 늦은 귀가를 기다리면서 라이트 불빛만으로 우리차를 구별할 수 있었고, 엘리베이터의 스르륵 문 열리는 소리로도 몇 층인지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만큼 나의 모든 신경은 예민하게 곤두서서 괴롭히며 15층에서 몸을 날리면 이 세상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서 끈 풀린 애드벌룬처럼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꽤 심한 우울증 이었다. 원래 살도 찌지 않았고 동적인 걸 싫어했지만, 우울증에 변비에 소화불량에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러닝머신을 달리기 시작했는데 20여분 달리는데도 도를 닦는 일처럼 힘들고 팍팍했고, 창을 통해 비치는 앞 건물도 싫었다. 마치 내가 갇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아 운동장으로 나가 달렸지만 처음엔 운동장 역시 200m트랙 열 바퀴 돌기도 힘들었는데 무슨 조화속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초연해지며 하루하루 보람 있는(?) 일이 되었다. 같이 달리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운동장으로 향하면서 우린 어김없이 매번 이런 대화를 한다. ‘정말 나오길 잘했어 왜 이 좋은 달리기를 사람들은 하지 않을까.’ 달리기에 익숙해질 즈음 나도 모르는 사이 만성지병처럼 내게 머물던 변비와 소화불량이 없어지고, 남편이나 주변사람에게서 활기차 보인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운동장 트랙을 벗어나 집 주변 코스를 달리고 마라톤대회를 몇 번 나가면서부터 나의 조깅은 마라톤으로 바뀌며 거리에 대한 두려움이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풀코스 대회를 신청해 놓고 몇 달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면서 거리를 늘려가는 일. 뭐든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즐겁고 아름답다고 했던가. 달리고 난후의 밀려오는 노곤함과 뿌듯함이 주는 며칠의 행복. 나의 머릿속은 열애에 빠진 사람처럼 언제 시간을 내어 한번 달려볼까, 오늘은 어느 코스를 달릴까 동호인들과 긴 거리를 달리는 주말이 기다려지고 나의 모든 인맥은 마라토너이고 대화의 모든 중심은 달리기가 되었다. 누구든 ‘마’자만 꺼내기만 하면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신도처럼, 달리기를 하니 이렇게 행복한데 당신은 왜 달리기를 하지 않느냐며 같이 달리기를 강권하니 이것 역시 병이 아닌가 싶지만, 운동을 하면서 즐거움은 없고 힘들기만 하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할 것인가. 나도 모르는 사이 중독성이 제일 강하다는 이 달리기에 빠져, 당신이 이해를 못한다 해도 하는 수 없지만, 나는 가끔 자다가도 일어나 나가서 달리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나, 뭔가의 꺼림칙함이 자리 할 때, 풍경 좋은 주로에 나서서 아주 천천히 달리다보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며 이 대자연에 깃들여 사는 게 축복처럼 느껴진다. 달리기를 하면서부터 온통 회색빛이었던 하늘이 투명한 소리를 내고 15층 우리 집에서 탁 트인 저수지와 먼 산의 능선이 보이고, 따스한 햇살은 우리 집에 왜 더 오래 머무는지…. 겨울철이면 헬스클럽으로 향하다가 작년부터는 주로를 달리는데 40여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겨울철 진풍경을 이제야 만나볼 수 있었다. 동상저수지 이어지는 능선이 수묵화처럼 어찌나 아름답던지, 때 맞춰 내리던 함박눈을 맞으면서도 달리고, 맞바람 치는 칼바람을 맞으면서 달리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는데, 그새 나뭇가지는 상처의 새살처럼 빨갛게 차오르는 봄이다. 이것들은 금방 내 눈길,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싹을 틔우겠지.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 보낸다는데, 나는 이 봄 그을릴 채비를 갖추고 이 따사로운 봄볕 속으로 달려 나갈 것이다. 당신도 나와 함께 42.195km의 여행을 찾아 떠나보지 않으실래요. 그 처음 시작은 운동장 몇 바퀴부터입니다. | 글. 조은숙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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