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마라톤>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조건 회복
관리자(2005-03-08 17:06:38)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 온 것 같다. 하지만, 이성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운동을 자청하는 동물은 아마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유사 이래 인간이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여러 가지 단련법 중에서 마라톤은 가장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운동에 속한다 하겠다.
학자들은 원래 인간이 초식동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인간의 길고 구불구불한 장 때문에 그렇게 판단한다고 한다. 알곡이나 영양분을 쉽게 내놓지 않는 야채를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긴 소화기관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초식동물은 먹이를 찾아 먼 여행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도 차츰 심장이 튼튼해지고 지구력도 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육식을 겸하게 되면서, 엄청난 스피드로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육식동물과 달리, 장시간에 걸쳐 동물을 쫓아야 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더욱더 극한적인 지구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나는 바로 이렇게 가장 본능적인 운동으로서 마라톤을 좋아한다. 마라톤은 가장 원시적인 인간의 조건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마라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원시성은 특히 현대생활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에도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인성의 파괴와 개성을 중시하는 세태에 따른 다변화된 인격들의 정서적 충돌로 빚어지는 온갖 스트레스가 매일 매일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이 바로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육체적 충동을 회복하는 마라톤인 것이다.
왜 많은 뜀꾼들이 실내에서 트레드 밀 위를 뛰는 일을 지루해 하고 못 견뎌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원시적인 건강성이 없기 때문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인간의 조상이 했던 것처럼 대지를 두 발로 박차고 공기를 가르며 들판을 지나고 산을 넘는 달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람은 어머니의 자궁을 향해 출발할 때부터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달려가야 하는 존재이다. 삶 자체가 거대한 달리기의 연속이며 우리는 더 나은 생존을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달려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났다.
달릴 때는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또한 연습 없이는 잘 달릴 수가 없다. 나는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마다 더 열심히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인간의 원시성을 회복하는 긴 마라톤의 여정을 마치고 나면 온몸에 깃든 피곤함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과 용기의 싹이 움트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부산출신 친구가 말했다. “야, 광호야, 니 하나만 물어보자. 마라톤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뛰노. 난 말이야, 혼자 야산엘 오른 적이 있는데, 그기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던데, 마라톤 하는 사람들 도저히 이해를 몬하겠더라.”
오래전 한 때 직속으로 모신 적이 있고, 여러모로 존경해오던 직장 상사를 춘천마라톤에서 만났다. 그 분은 특유의 베이스 톤 목소리로, “난 네가 마라톤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이 말은 42.195km를 달리는 동안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간헐적으로 떠오르곤 했다. 무슨 의미일까. 그 짧은 말이 마음 속으로 날아와 날카롭게 박힌 이유는 10여 년 전 그 상사를 모실 때 직장에 성실하지 못했던 기간이 있었던 탓이었다. 그분이 혹시 그때를 상기하시고, 마라톤처럼 인내와 노력, 정성이 필요한 운동을 당시 불성실했던 내가 좋아하고 또 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씀은 아니었을까?
되돌아보면 나는 참 나약했었다. 누구보다도 강하다고 입으로만 외쳐댔었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천으로 옮긴 성취물이 있었던가. 변화와 다짐의 계기가 필요했다. 건강이야 논외로 하더라도 아내와 아이들과 자신에게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 이제부터라도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자성으로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이제 6년째. ‘마음을 닦는 길 1백5리’ 내내 붙잡고 끙끙대는 화두들을 감히 ‘마라톤의 미학’이라고 이름 붙여 몇 문장 열거해본다.
대회가 끝난 후 불과 3일 만에 한강변을 달렸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또 나는 달린다. 왜 달리는가? 벌써 삼십 후반, 그저 한없이 달리고 싶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점점 힘들어지고 이겨낼 자신이 자꾸 없어지지만, 그래도 나는 달리고, 그리고 완성하고 싶다. 이겨내고 싶고, 이겨내야만 한다. (박병섭 씨, 중앙일보 하프 마라톤을 달리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 여의도 결승점에 4시간 8분 만에 도착했다. 결승점을 지나며 조용히 두 팔을 올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를 배반한 젊은 날의 꿈, 오랜 세월을 두고 나를 괴롭힌 꿈을 생각했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 열심히 살아야지. (박희영 씨, 한강변 마라톤)
달리다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내 가정을 위하여’ 라는 명제가 그 중의 하나임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멈추어선 안 된다, 쓰러져선 더욱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게 된다. (SAKA 하프 마라톤)
38km. 한계에 이르렀다. 벌써 4시간 경과. 한없이 밀려드는 걷고 싶은 유혹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극복하려 애썼다. 특히 살아오면서 범한 숱한 잘못들, 사과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라도. (조선일보 마라톤)
가로변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과 근육경련으로 쓰러졌지만 끝내 의무차량에의 탑승을 거부하는 런너를 보았을 때, 달리는 내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달리는 동안만큼은 누구나 지순한 상태가 되는가 보다. (동아일보 마라톤)
박병섭 씨는 내 대자이며 박희영 씨는 한강변 주로를 함께 달렸던 도반이다.
| 글. 류장영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 단장 겸 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