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마라톤>한 바탕 뜀질로의 몰입
관리자(2005-03-08 17:03:00)
아주 옛날 어린 시절에 나는, 만경 벌 철길 건너 마름 방죽 옆댕이 논에서 쟁기질 하시던 아버지에게 샛밥 거리로 한 손에는 양은 주전자에 탁주를 담아들고 다른 한 손에는 삶은 고구마 몇 개와 가닥무우김치 종재기를 들고 들판을 가로질러 맨발로 터덜터덜 걸어갔습니다. 좁은 도랑을 훌쩍 뛰어 건너 주전자 꼭지로 찔끔거리는 막걸리 국물이 안정되기를 기다려 다시 가던 걸음을 막 시작하려 할 때, 이 갑작스런 소동으로 들풀 섶에 숨어 있던 왕 개구리 한 마리가 놀래어 두 다리를 모아 깡총! 허공을 날아서 도랑의 냇물 속으로 뛰어 들
었습니다. 나는 퐁당! 하고 뛰어든 개구리의 물 자맥질 자국을 바라보며 이 개구리가 어디로 숨었는지 도랑물 속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일었던 구정물이 가라앉고 냇물 속이 진정되자 그 때까지 한참이나 더듬거리며 개구리의 행방을 찾던 나의 눈에 드디어 그 개구리의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여간해서 찾기 힘든 개구리 등 거죽의 위장 무늬와 또 방금 일었던 진흙이 가라앉으며 개구리 등 거죽 위에 올라 타 앉아 더 더욱 그 개구리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그 추억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어린 나에게 그 상황에서 참으로 인상 깊게 각인된 것은 그 때 그 개구리의 물속 자맥질로 인한 입수 행동으로 그는 그 때부터 세상 모든 것과 철저하게 유리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찌는 폭염도, 근처 플라타나스 나무 위에서 귀청을 때리던 매미 소리도, 점심 꺼리를 찾는 허공 위 매 한 마리의 위협적인 선회도 도랑 속 진흙 안에 은폐된 이 개구리에게는 전혀 딴 세상일이었지요.
그 개구리가 참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움칠움칠 진흙 속을 더 파고들며 다른 세상으로의 도피를 꿈꾸는 이 개구리는 정말로 대단한 재주의 소유자로 보였습니다. 언젠가는 자기의 세상으로 다시 나와야겠지만, 적어도 자기가 택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몰입이, 잠복이 그 개구리에게는 보기 드문 특혜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나의 뜀질에서 이 개구리의 잠복을 흉내 냅니다. 나는 나의 마라톤에서 이 개구리가 자신을 은폐했던 그 재주를 본떠 봅니다. 한 바탕 뜀질로 인해 흥건한 땀이 내 몸을 촉촉이 적셔갈 때 나는 더 깊은 물속으로의 자맥질을 꿈꾸어 봅니다. 적어도 내가 뜀질을 하는 동안에만은 나는 이 세상 모든 잡사에서 유리되고 싶습니다. 내 달리기 수양이 덜되어, 비록 이 노력이 완전히 결실 맺지 못하고 겨우 주둥이, 대가리 앞부분만 진흙 속에 감춰진다 하더라도 나는 잠시 잠깐이지만 현실로부터의 이런 잠수를, 이런 이탈을 꿈꾸어봅니다.
짧게는 세 시간 남짓의 도심 질주 마라톤으로부터 길게는 13시간여의 산과 들, 총총한 별밤과 그 밤이 부서지는 새벽하늘의 열림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달리는 100km 울트라 마라톤, 그리고 그보다 더한 또 다른 세계의 경험을 위한 초 장거리 200km 울트라 마라톤을 통해 저는 그 개구리의 잠수를 흉내내 보려합니다.
나의 마라톤 철학은 이처럼 단순합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의도는 가끔씩 현실로 나타납니다. 나의 의도에 심각한 접근만 하지 않고, 그리고 그 의도를 까맣게 잊고, 얼마만큼 달리다 뒤돌아보면 나는 나의 목적을 달성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방금 지나친 완벽하니 현실을 잊고 달리기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그 순간, 인식하게 되면 달아나는 완벽한 평화, 그래서 또 다시 되찾고 싶은 그 평화를 위해서 나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 글. 박복진 오 마이 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