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마라톤>마라톤의 매력은 단순함에 있다
관리자(2005-03-08 16:59:30)
5년쯤 전 풀코스를 처음 뛸 즈음 왜 뛰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럴 듯한 대답을 하려고 궁리하다가 생각해낸 대답이 있다. “길이 거기에 있으니까. (Because the way is there.)” 조지 멀로리의 불후의 명답을 슬쩍 인용한 것인데, ‘길(the way)’이라는 단어가 영어든 우리말이든 중의적 해석이 가능하기에 당시에는 썩 나쁘지 않다고 상당히 만족했었다.
내가 달리기를 하게 된 동기와 과정은 내 또래 도반(道伴)들의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언젠가 여름휴가를 다녀와서 휴가 중에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다가 일순 아연했다. 가끔 내려다보면서 내 눈에 ‘좀 나왔군’하는 정도였던 ‘똥배’의 융기를 카메라가 잡으니 끔찍스러웠던 것. 이후 체육관에 등록하고 트레드밀 달리기, 도로 달리기, 인터넷 검색하며 도움 받기, 연습시간과 마일리지 늘리기, 하프부문 참가 등을 거치며 고생해 마침내 풀코스를 완주하게 되었다. 인내의 한계를 벗어나는 동안 다시는 이 짓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은 골인과 함께 사라지고 나는 벌써 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달리기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도 뱃살을 빼기 위한 방법으로 오래 달리기를 주저 없이 택했던 것은 (매우 잘한 선택임에 분명하다) 마라톤선수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인간들이라고 평소 동경했던 탓인가 한다. 홀로, 자신만의 힘으로, 출발하면서부터 단 1초의 편한 시간을 용납치 않으며, 그 오랜 시간을, 가장 단순하고 건조한 동작의 반복만으로 그 넓은 공간을 통과해야 하는 그들이 존경스럽지 않은가. 그러기에 우리는 우승한 주자를 포함하여 골인한 모든 주자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는가.
마라톤(혹은 겸허하게 그냥 달리기)은 분명 사람을 끄는 성질이 있다. 매력이라기보다 마력이 더 어울리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내가 마라톤에 빠졌다면 그것은 첫째, 연습이든 실전이든 늘 느끼는 단순에 가까운 그 정직성에 기인한다. 전날 과음하면 뒤쳐지게 되고, 며칠간 성실히 연습하면 편안하고, 힘든 만큼 성취감이 들고, 훈련한 만큼 성과가 있고 실력이 늘고, 욕심을 내서 무리하면 바로 몸이 신호를 보내는 등 한번도 예외가 없었고 한번도 배신당하지 않았다.
둘째, 한 사흘 정도 연습을 쉬면 몸이 개운치 않음은 당연한데, 게다가 일종의 죄책감마저 든다. 특히 주말 이틀간 어느 정도 거리를 뛰어주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마치 몸속에 주충(走蟲)이 있어 일정기간 뛰지 않으면 이놈이 마구 꿈틀거려 그 숙주(宿主)로 하여금 못 견디게 만드는 것처럼. 이것이 중독증세나 예속감의 다른 묘사인지 모르겠으나, 비슷한 경력의 주변 사람들에 비해 결코 많이 뛰는 편이 아닌데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 때로 좀 이상스럽기도 하다.
마라톤 인구가 많아지고 세인의 인지도도 올라가 이제는 문외한이더라도 왜 뛰느냐는 ‘무식한’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물어본다면 이제는 한결 여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뭐 별거 아냐. 뛰고 나서 얼굴에 낀 소금을 긁어 모아뒀다가 삼겹살 구울 때 찍어 먹으려고.”
| 글 . 김성연 (주)다미상사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