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마라톤>왜 마라톤인가?
관리자(2005-03-08 16:58:20)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는,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한 아이가 어느 날 자폐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고, 그 엄마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 좌절하게 된다. 스무 살이 되도록 다섯 살 수준의 지능에 머물러 있는 아이…, 엄마는 마라톤이라는 탈출구를 발견하고 아들과 함께 그 곳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최근 개봉된 영화 <말아톤> 이야기다. 십 년 전, ‘톰 행크스’가 주연해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던 <포레스트 검프>의 한국판이라고나 할까? 한번쯤 산다는 문제를 뒤돌아보게 하는 잔잔한 감동의 영화다. 흔히 주변에서 인생과 마라톤을 유사한 것으로 거론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네 삶이 달리는 일과 비교된다는 것, 그 만큼 우리의 일상이 숨 가쁘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은 아닐까? 아니면 마라톤이란 운동이 사람의 일생처럼 희노애락과 더불어 감정의 극한까지 체험케 하는 굴곡 많은 운동이라는 뜻이던지…
아무튼 마라톤을 소재로 한 영화가 등장할 만큼, 마라톤에 관한 일반의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삼 백 개가 넘는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수 천의 아마추어 동호회가 활동 중에 있다. 각 대회마다 수천에서, 많게는 수 만 명의 참가자들이 출전하고 있으며, 풀코스 완주자만 사 만, 혹은 육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추산되고 있다. 이 정도면 가히 마라톤 열풍이라 할 만하다. 모두 최근 수 년 사이의 일이다.
마라톤 열풍이 분다
아마추어 마라톤의 역사를 최근 수 년 사이로 국한할 일은 아니다. 춘천마라톤의 경우 마라톤 발전과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지난 96년부터 일반 마라톤 애호가들도 정상급 선수들과 함께 달릴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조깅이나 마라톤을 즐기는 인구는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대회 참가라는 통로를 통해 공식적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이 이쯤부터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춘천마라톤은 현재 국내에서 가장 많은 참가자 규모를 자랑하는 대회다. 그러기에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춘천마라톤에 참가하기 시작한 최근 십 년이 아마추어 마라톤 성장사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96년 일반인에게 문호를 연 이후, 춘천마라톤 참가자수는 가파르게 증가해왔다. 98년까지만도 4,157명에 그치던 참가자가 99년 만 명을 훌쩍 뛰어 넘어 12,667명, 풀코스로만 치러졌음에도 2004년에는 이만 사천 명 가량이 춘천 호반을 뛰었다. 한 대회의 경우지만 이 수치 중 98년에서 99년 사이 참가자가 급증한 사실이 상당히 흥미롭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한국에서의 마라톤 열풍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라톤 열풍…, 사람들은 왜 갑자기 뛰기 시작했을까? 일차적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국민소득 일 만 불을 넘어설 때, 마라톤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사회체
육학자들은 진단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운동은 하나의 사치일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개인적인 건강을 희생해왔던 사람들이, 이제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그 기점이 국민소득 일 만 불이라는 설명이다.
상당히 적절하고 공감할 진단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의 마라톤 열풍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마라톤 이외에도 다양한 레저와 스포츠가 얼마든지 있으며, 단순히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면 보다 더 적절한 운동이 많기 때문이다. 상당한 인내과 고통이 따르는 마라톤이라는 운동, 과연 건강을 지키는데 가장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것인가라는 의문도 한번쯤 해봐야 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우 IMF를 맞아 소득 일 만불이 붕괴되면서 실업자가 양산되던 시절에 오히려 마라톤 인구가 급증했다. 앞의 진단은 이 점은 효과적으로 설명해내기 어렵다.
최근 마라톤 열풍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결과들도 속속 보고되고 있다. 단지 체중조절을 통한 체지방 감소가 목적이라면 걷는 것의 효과가 월등하다는 언론의 보도, 그리고 심하게 달릴 때 생성되는 활성산소가 노화를 촉진한다는 의학계의 보고, 또 무리한 관절 사용으로 연골을 비롯한 각종 부상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스포츠 학자들의 조언, 어디 그 뿐인가, 심장과 혈관계통의 이상으로 인해 해마다 몇 건씩 생겨나는 레이스 중 사망 사고 등은 마라톤 열풍에 얼음물을 끼얹기 충분한 것들이다.
마라톤을 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제기된 문제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라톤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에는 분명 무엇인가 다른 설명이 따라야 할 것이다. 달리는 운동을 취미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꼭 건강만을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대목이다. 도대체 마라톤에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람들이 달릴까?
왜 갑자기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을까?
마라톤의 매력은 운동의 유연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라톤, 하면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이는 마라톤 경기를 지칭하는 것이지 평소 운동으로서 이 거리를 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라톤이라는 용어는, 조깅을 포함한 모든 달리기를 포괄하고 있다. 달린다는 것은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에 따라 수 km에서 수 십km까지 천차만별일 수 있으며, 그 속도 또한 운동자의 능력과 기분에 따라 그 선택의 폭이 엄청나게 넓은 운동이다.
또한 마라톤은 아무런 기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철저히 혼자 해야 하는 운동이다. 탁구나 배구, 혹은 테니스처럼 수준이 유사한 파트너가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운동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적절한 파트너와 운동을 약속하는 번거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구나 파트너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시간과 장소 선택의 자유까지도 함께 누리게 해준다. 여기에 달리기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서, 모든 운동의 기본이 된다는 점도 마라톤 매력에 일조하고 있다.
흔히 마라톤을 고독한 운동이라고 한다. 비록 동호회를 통해 정보교환과 친교를 다진다 해도 대부분 일상적인 운동은 홀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마라톤이다. 실제로 어느 여론조사 통계를 보면 평소 훈련을 혼자서 한다는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이 81%에 달했다. 마라톤에 푹 빠져든 사람일수록 의외로 내향성격을 지닌 사람이 많다는 점도 참고할 만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마라톤은 인내의 과정을 통해 극도의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운동이다.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라톤은 다른 운동에 비해 엄청 많은 운동량으로 극한의 고통까지 맛보게 하는 운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고통이 큰 만큼 돌아오는 성취감 역시 대단히 높은 편이다. 실제로 주변의 상당수 지인들이 경제적 위기와 자기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방편으로 이 고통스러운 운동, 자신과의 싸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운동에 몰입하는 것을 보았다. 의외로 마라톤 붐을 젊은층보다는 중장년층에서 주도했던 점 역시 이를 증명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의 마라톤 열풍에는 최근 수 년 사이 한국적 특수성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추어 마라톤 인구가 급증했던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우리 사회는 IMF라는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그로 인한 실직과 고용불안이 우리 사회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불어 고령화 사회로의 본격적인 진입, 또한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온라인 문화공간의 확장을 통해 온라인 세대들의 대사회적 영향이 강하게 대두되는 등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다. 이 모든 변화들이 현재의 4, 50대에게 상당한 직간접적 충격을 던졌다.
마라톤 붐 주도한 4, 50대 한국 남자들
언론에서는 마라톤 붐의 중심세력인 4, 50대 층이 경제적 안정을 이루면서 건강을 챙기는 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령층이 바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세대라는 점은 간과되고 있다. 그 동안 달려왔던 삶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고, 앞으로의 삶 역시 불안정한 고해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들, 전통적 관습으로 부모를 부양해온 세대지만 자식으로부터 부양은 기대하지 못하는 바로 이 ‘낀 세대’의 심리적, 정서적 정체성 고민이 달리기에 빠져들게 했다 말하더라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듯싶다.
같은 관점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마라톤 대회들을 바라볼 수 있다. 단순히 경기력을 측정하고 비교, 시상하는 차원이라면 이처럼 많은 대회가 열리고 많은 참가자들이 몰리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마라톤 대회는 하나의 축제처럼 열린다. 그리고 대다수 대회참가자는 하나의 잘 만들어진 축제에 함께 하는 기분으로 대회에 참여한다. 그들의 대회 평가 기준에 어김없이 축제성을 암시하는 말투가 끼어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예 상당수 지방자치단체들은 지역축제와 자연스럽게 연계시켜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고 있기도 한다.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의 연간 대회수를 묻는 질문에 가장 많았던 답이 11회였다. 평균 한 사람이 연간 10회 가량의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본다면, 월 1회 가까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셈이다. 대회 참가는 상당한 비용과 시간 투자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주말이면 가족들과 함께, 혹은 이웃들과 함께 대회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그 곳에서 무엇을 얻어갈까?
나날이 소외를 부추기는 현대의 사회 속에서 가장 원시적인 운동으로 축제의 장을 만들고 있는 마라톤 대회. 이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고통 속에 있는 것이 비단 나 뿐만은 아니라는 공동체적 연대의식으로 안도와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철저히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라톤이라는 운동. 노력한 만큼의 솔직한 결과를 보여준다는 이 운동을 통해 자신과 싸움의 결과를 지켜보는 일 자체도 아마추어 마라토너에게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요, 삶의 중요한 일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 김정수 문화저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