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 |
푸지기도 푸질세라!
관리자(2005-03-08 16:53:34)
날씨가 심상치 않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오전 내내 빗방울을 흩뿌리더니 심통난 시어미처럼 돌아앉았다. 운암대교를 지나 재를 넘는데, 이제는 달리는 차안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거센 바람이 분다. 임실 필봉마을 정월대보름굿을 만나러 가는 길은 춥기도 하구나!
백련산 자락을 마주하고 회문산에 기댄 채 섬진강 언저리에 발을 담그고 앉은 임실필봉마을. 대보름을 앞당겨 굿판을 벌인단다. 마을로 올라가는 진입로에 이 추운 날씨에도 차들이 제법 그득하게 정렬하고 있다. 볼만한 굿판에는 저절로 사람이 모이는 것을 알겠다. 저만치 당산나무 아래서 당산제가 한창이다. 얼핏 보아도 몇 백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치배들을 둘러싸고, 치배들은 당산나무를 둘러싸고, 판에는 벌써 물이 올랐다.
필봉마을 정월대보름굿은 새해를 맞아 묵은 액을 털어내고 새해의 안녕을 비는 굿판이다. 호남좌도임실필봉농악보존회(회장 양진성)가 주최하고 전국 각지의 풍물동호인과 마을주민들이 참여하는 행사이다. 필봉농악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단위로 치러지던 굿판을 더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기 위해 보름날이 가까운 주말로 옮겨 벌이고 있다고 한다.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진 결과이다. 필봉은 현재 22가구 60여명이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지만 임실군 청웅, 갈담, 덕치 등 주변마을과 공동으로 꾸려내는 대보름굿은 이제 우리 굿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찾아올 만큼 전국적인 행사가 되었다.
“정월대보름날이 제일 행복합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여요! 일년 동안 많은 초청공연을 다니지만 현장에서 필봉굿의 진수를 보여주고 굿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필봉농악보존회장 양진성 씨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굿판을 자유자재로 휘젓고 다니며 연신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양진성 씨의 동생이며 필봉굿보존회 사무국장인 양진환 씨는 전체 행사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대보름굿의 절정인 달집태우기, 민속놀이마당, 민속음식나누기 등 찾아오신 손님들이 굿판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부대행사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인제 좀 팍팍 밀어주면 좋겠어요! 푸진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도 푸지게 모여야 되고, 말도 푸져야 하고, 악도 푸져야 하고, 술도 푸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이 제일로 푸져야 합니다.” 양진환 사무국장은 문화재청에서 구경차(?) 굿판을 찾은 공무원에게 넌지시 원성을 건넨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행사준비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마을회관 앞 동청마당에 들어서니 솥단지를 걸어놓고 무럭무럭 피어나는 연기 속에 동네 어머니들이 음식준비에 바쁘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치배는 치배대로, 어르신들은 어르신대로 저마다 맡은 역할대로 대보름굿을 챙기고 즐기는 것이 참 보기에 좋다. 펄펄 끓는 돼지찌개로 추위에 언 몸을 녹이고, 빈속도 채우고, 덤으로 막걸리도 한 사발 들이켜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마을 공동우물에서 벌이던 샘굿이 벌써 끝나고 마을을 돌며 마당밟이가 한창이다. 풍물가락에 맞춰 앳된 학생들이 제법 추임새도 넣고 어깨 짓, 손짓을 하며 하나가 되는 것이 굿판엔 이력이 난성 싶기도 하다. 이름난 대보름 굿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모여든 전국의 사진쟁이들도 치배의 몸짓을 따라 이리 찰칵 저리 찰칵 참 볼만하게 돌아간다. 풍물소리가 잦아들면 구경꾼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가락이 휘몰아치자 저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치배들과 한 몸이 되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아니 마을 전체가 한몸으로 춤을 추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마을 하늘 위엔 연이 떴다. 제 갈 길이 바쁜 연도 연신 춤을 춘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추위와 바람은 더욱 기승을 부리지만 정월대보름판굿에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아보자고 풍물소리는 바람을 뚫고, 추위를 뚫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푸지기도 푸질세라! 춥기도 오사하게 추울세라! 필봉 정월대보름굿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굿이 끝나고 며칠 후 진짜 대보름날 양진성 씨와 통화를 했다. 엄동설한에 보름굿을 준비하느라 예순일곱 어머니의 무릎 관절이 다 주저앉아 병원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그런다. 어머니의 쾌차를 기원한다.) | 김승민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