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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 | [서평]
IMF,성선설 그리고 한국소설의 가능성
홍기돈 문학평론가(2005-02-15 14:30:29)
김지우는 아무래도 ‘성선설’을 믿는 듯하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라. “산송장처럼 황폐해진 남자는 청년이 죽었던 그 자리에서 뛰어내렸다. 저만치 달려오는 열차를 보고서였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또 다른 청년이 황급히 뛰어내려 남자를 끌고 나왔다. 그제서야 꽉 막혔던 울음이 터졌다.”(89쪽) 맹자가 그러지 않았던가. 인간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고. 우물 안으로 기어들어가려는 일면식도 없는 어린아이를 아무런 계산 없이 황급히 달려가 끌어안는 인간의 모습을 보라고.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의 두드러진 장점은 인간을 감싸는 따뜻한 시선에 있다. 범박하게 말한다면, 최근의 소설들은 개인의 욕망을 바탕에 깔고 만들어지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경박으로 추락하면서까지 흥미를 추구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개인과 개인의 관계[사회]에 대한 탐색은 뒷전으로 밀려난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나르시스트인 작가들이 창작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김지우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따뜻하게 감싸안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 중에서도 삶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인간들의 연대가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예를 들어 자해공갈단이 등장하는 「디데이 전날」을 보자. ‘칠범씨’는 개인택시를 하다가 좁은 골목에서 그만 어린아이를 치어 숨지게 했고, 그로 인해 빚만 지고 고향을 등지게 되었다. ‘영감’은 전쟁통에 단독으로 월남한 인물이다. 통일이 되면 북으로 갈 생각에 땅 한 평 없이 현금만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는 비닐하우스에 원인모를 불이 나서 한순간 거지가 되고 말았다. ‘나’와 ‘경범씨’는 서울역의 노숙자. 이 네 사람이 “달려오는 차에 기술적으로 몸을 부딪고 돈을 갈취하는”(18쪽) 한 팀의 자해공갈단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비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나’와 ‘경범씨’가 자해공갈단에 합류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너 이 새끼, 차 빨리 안 가져와? 오분 이내로 안 가져오면 너 오늘 뒈질 줄 알어. 알았어 새꺄?" 그리고 휴대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져버렸다. 청년이 빗물에 흥건히 젖은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다. 비에 찰싹 달라붙은 면 티셔츠 상의 뒤판에 새겨진 글자. 한영 카쎈터. 그제야 우리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수리를 맡겼던 손님의 차를 갖다 주는 중에 사고가 난 것이었다. 구경꾼들이 쯧쯧 혀를 찼다. 내가 청년이라도 뛰다죽을 노릇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영감이 누구의 부축도 없이 불쑥 상체를 일으켰다. “야야 청년이레, 내레 일없어야. 기러구 섰디 말구 날래 가보라마. 날래.”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었다. 청년이, “그래도 어떻게……” 하고 우물쭈물 망설이고만 서 있자 영감이 영감 바로 앞에 서 있던 경범씨와 나, 우리 둘을 가리키며, “내레 나중에 딴소리 안하가서. 저분덜이레 네레 증인이 돼주믄 되갔디?” 해서 졸지에 그날 현장 증인으로 그들을 만난 것이었다.(20쪽) 소설집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 가운데 비루하고 누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함께 감싸안고 살아가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디데이 전날」, 「그 사흘의 남자」, 「물고기들의 집」, 「눈길」이 있다. 이들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게 되는 이유는 서로에 대한 연민 혹은 스스로의 삶에 대한 연민이다. 「그 사흘의 남자」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남자’는 이혼한 남편이 남겨둔 카드빚 때문에 사채업자의 사무실에 와 앉은 ‘여자’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열여덟 살 남자가 소매치기 전과1범으로 형사 앞에 움츠리고 앉아 처음 조서를 꾸미던 날,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던가.”(87쪽) 연대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매개로 동일성의 확보에까지 이른 셈이다. 사실 김지우의 이러한 방식은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사회적인 약자를 소설의 전면에 내세울 경우 자칫 잘못하면 ‘연대’의 당위성으로 흐르게 된다. 개별적인 인간의 발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빈곤에서 출발하느라 분노에 가득 찬 집단(계급)의 목소리를 높이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당위가 허물어진 마당에 그러한 방식이 설득력을 얻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소설의 완성도 측면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IMF 이후 빈곤한 현실을 확인하면서도 우리 소설이 그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던 이유에는 혹시 당위에 대한 강박이 앞섰기 때문은 아닐까. 더군다나 ‘민중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계급의 분화가 분분하게 논의되었다. 그렇다면, 개별적 인간에서 출발하여 집단(계급)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이를 매개하는 것이 구체적 현실이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이 좋은 작품이라면, 아직 위대한 민중성의 발견으로 나아가지 못한 시기에, 바로 그러한 접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또한 IMF시기를 지나치면서 우리가 부닥친 현실에 대하여 문학적인 응답을 해 내고 있다. 그 가운데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신뢰가 빛나는 것이다. 물론 감동의 깊이 또한 「삼포 가는 길」에 비견할만한 수준에 올라 있다. 「작가의 말」에 나타나는 “혹독한 이분법으로만 살았던 내 젊은 날, 나의 독설에 알게 모르게 상처입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230쪽)라는 내용을 보건대, 김지우는 아마도 이러한 창작방식을 익히기 위해 오랜 시간을 걸어왔을 것이다. 이는 ‘문학의 죽음’이 논의되는 오늘날 우리 소설이 당분간 따라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 「댄싱 퀸」, 「해피 버스데이 투 유」에 대해서 언급을 못한 것은 순전히 지면의 제한 탓이다. 『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에는 버릴 만하다거나 고만고만한 느낌의 소설이 없다. 이것 또한 작가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는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뒷면에 붙은 소설가 현기영의 추천사를 인용하며 글을 맺도록 하겠다. 물론 인용하는 까닭은 현기영의 지적에 조건 없이 동의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빛나는 재능은 이러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실을 너무 정색해서, 너무 진지하게 발언함으로써 실패한 소설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았나. 위트·유머가 없이 진지하기만 한 연애가 재미없고 그러한 강연도 따분하듯이, 진지한 소설은 실패하기 쉽다는 징크스를 이 작가는 발랄한 동작으로 극복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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