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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 | [문화저널]
[옛사진으로 보는 삶과 역사]한벽당의 물안개와 홍수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2005-02-15 14:21:30)
“한벽당이 맞아요? 한벽루가 맞아요? 우리 어렸을 때는 ‘한별땅’이라 했던 것 같던데요.” 시민들과 답사를 할 때면, 종종 들어보는 질문이다. 한벽당은 전주 8경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곳으로 한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피서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마당재에서 태어나 기린봉 계곡물에서만 놀던 필자 역시 풍남초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여름이면 낙수정을 지나 발산(어릴 적에 고추산이라 불렀다)을 넘어 옥류동 샘으로 내려와 철길을 건너 한벽당 밑에서 개헤엄이라도 배워 볼 생각으로 뛰어 들던 풋풋한 기억이 있다. 한참 동안 그게 한벽당이건 한벽루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별땅이면 족했었다. 전주 토박이들에게 전주의 향수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곳이 한벽당인지 한벽루인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쩜 우리 고장 사람들에게 있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각설하고 사실 한벽당이나 한벽루나 모두 불릴 수 있는 말이다. 한벽당은 한벽루의 당호(堂號, 집이름)이고, 한벽루는 ‘한벽(寒碧)’이라는 이름을 가진 누각을 지칭한 것이니까, 한벽루라 부를 때는 건축물의 형태를 따라 부른 것이고 한벽당이라 할 때는 그 건축물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결국 둘은 다르면서 한 몸과 같은 말이다. 때문에 어떤 명칭을 사용해도 무관하지만 건물 자체를 가리킬 때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제 제15호로 등록된 ‘한벽당’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주사람들에게 있어 한벽당과 한벽루는 단지 건축 구조물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사진 1) 청명한 햇볕이 내려 쬐이는 날, 향교 명륜당을 나와 만화루(萬花樓)를 지나 한벽당에 올라선 유생들이 중바위와 남고산 고성(古城)이 죄여드는 좁은 목으로부터 전주천 물길에 실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시운(詩韻)을 내 걸고 시조를 짓는 풍류의 멋을 즐겼을 터이니 전주 8경의 으뜸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사진 2) 전주 8경의 첫 번째인 ‘한벽청연(寒碧晴烟)’은 맑게 개인 날 한벽(寒碧)에 부딪쳐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의미하는 말로, 슬치에서 발원한 전주천의 물이 북으로 치 닿다가 한벽당 밑 바위에 부딪쳐 서쪽을 급히 숨을 몰아 쉴 때 내 품는 물보라 안개를 가리킨 것이다. 그렇지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그 곳이 전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또한 물난리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장마비가 한참 쏟아 부을 때면, 한벽당에 부딪쳐 서쪽으로 흐르는 전주천의 물길이 남고산성과 흑석골에서 내려오는 남고천과 반석천의 물길과 부딪치게 되니, 자연히 그 물길은 전주성을 향해 흘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주는 홍수에 시달려야 했다. ≪호남읍지≫에 의하면 1509년에 6,000척 길이의 제방을 수축했다고 한다. 1731년에는 전주부윤 이수항이 승군을 동원하여 수축하였으며, 1784년에는 관찰사 조시위가 대규모로 제방을 수축하였다.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개축을 실시하였고, 그 이후 수차례의 제방 공사가 있었지만 일본에 강점된 즈음 전주 사진을 보면 제방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1920년 대홍수로 13명이 사망하고 546채의 가옥이 파괴되자 1932년에 완산교에서 상류쪽으로 339m의 제방을 준공하였고, 1933년에는 전주교 하류 좌우 제방 576m를 시공하여 쌓았다. 이듬해 400m를 확장하였고 1936년까지 668m를 추가로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1936년 대홍수를 만나 쌓아놓은 제방마저 대부분 유실되었다.(사진 3) 1936년 대홍수 때는 4시간 동안 무려 188mm를 퍼붓는 강우로 인해 전주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리도 무너져 버렸다. 1937년 총 32만2천8백 여원을 들여 좌우 제방 총연장 8400m를 축조하였으며 다가교 아래에는 보트장을 시설하기도 했다. 이때 쌓은 제방은 폭을 90m로 넓히고 높이 역시 1m를 올려 하상과 6m의 높이로 축조되었다.(사진 4, 5) 그럼에도 돌아가신 작촌 조병희선생님의 증언에 의하면 범람한 전주천의 물이 풍남문을 지나지는 못했다고 한다. 한벽당은 1971년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 1가 산 7-3에 위치한 누각으로 1404년 (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7`~8평이라는 아담한 누각이지만 고지도(사진 6)에 나타난 한벽당은 5층의 누각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고지도의 한벽당이 여러 개의 건물이 층층이 늘어선 형태로 보이지만 누각의 방향으로 보면 아래로 한벽당에 오르는 회랑(복도)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적어도 현존하는 한벽당이 지도에 나타난 가장 중심 건물이라고 한다면, 5층의 외관은 천변의 하상까지 이어졌을 것이고 지금과는 달리 전주천 제방 안쪽 밑에서 한벽당에 올라야 했을 것이다. 국가나 지방정부가 아닌 개인이 세운 이 누각은, 최담의 별장으로 지어졌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전주의 풍류를 대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벽당에 올라 시를 읊었으며, 창암 이삼만이 오수를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벽교에 치여 예전의 모습은 없지만, 우리들이 사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한벽당은 수학여행 기념촬영지(사진 7)로 또는 소풍을 가는 곳으로 전주와 타지 사람들의 휴식공간이었다. 한벽교에 의해 잘려 나간 한벽당의 풍관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전통문화도시인 전주에 전통문화 랜드마크를 구성하는 요소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전통문화의 복원은 단순한 건물의 복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벽당이 전주사람들 가슴에 건물이 아닌 문화공간으로서 남아 있는 것처럼 한벽당의 복원은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능 복원을 수반해야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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