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 | [문화저널]
[이종민의 음악편지]장사악의 봄비
이종민 전북대 영문과 교수(2005-02-15 14:14:19)
봄비를 기다리며..
또 하나 일을 저질렀습니다. 또 하나의 조직을 띄운 것입니다. 이름 하여 <천년전주사랑모임>! 이름이 좀 촌스럽습니다만 뜻은 제법 거창합니다. 전주 천년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천년의 문화를 가꾸어가기 위한 노둣돌이 되겠다는…
‘또 하나’에 대한 해명. 그러니까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애송이 교수 티를 막 벗어나려 할 즈음 뭔가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료교수들과 어울려 자주 ‘카드놀이’도 하고 술도 마시곤 했는데, 헤어져 돌아올 때면 항상 가슴이 숭숭 뚫린 것처럼 허허로웠습니다. 짱짱한 청춘을 이런 식으로 허송, 보내버릴 수는 없는 일인데…
당시가 전두환 폭압시절이니 어쭙잖은 지식인으로서 어떤 사명의식 같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감행한 대학졸업정원제 덕분에 손쉽게 대학교수가 되었다는 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고요.
그래 동료 선배 교수들을 찾아 이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자고,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을 하고 다녔습니다. 들어줄 리가 없었지요. 거창하게 ‘비판적 아카데미즘’을 들먹거렸지만 그 뜻도 잘 알지 못했으며 계획이나 전망도 오리무중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막연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열기만이, 기운 없는 사람 괴롭히는 허열 같았다고나 할까요.
하여 비슷한 부담을 갖고 있을 술친구 ‘카드친구’들을 먼저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모아지면 무엇이든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달에 2만원씩을 모아나갔습니다. 24명이나 되는 교수들을 월급날이 되면 찾아가 그야말로 강탈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돈 모으는 일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년을 모으니 5백만 원 가까이 되더군요. 당시 제 월급이 150만원을 조금 넘었으니 상당한 액수라 할 수 있겠죠? 이 돈을 가지고 이번에는 선배교수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돈의 위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분들의 반응이 그 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 때가 호헌철폐 서명운동이 한참 진행 중이던 바로 6.29선언 직전이었으니까요.
이렇게 하여 탄생한 모임이 <호남사회연구회>. 지역성과 진보성을 가지고 티격태격도 많았지만 지역학술운동의 당당한 주체로 지금까지도 그 고유한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지방분권운동의 중심에 서있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말 탄생한 것이 <문화저널>. 이 잡지의 출범은 물론 제가 주도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참여하게 된 것이 그 다음해 초이니 초창기 초석을 다지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임옥상, 임진택 형들과 <백제기행>에 참여했다가 나눈 얘기가 족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이 조직의 탄생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남사회연구회>가 제안을 하고 <문화저널>이 화답을 했으니 두 곳에 함께 몸담고 있는 저에게 시선이 모아졌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최근까지만 해도 이 모임 추스르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이 2002년 동짓날을 기해 시작한 <동지 북한어린이돕기모금운동>인가? 지난번에 잠깐 자랑을 했습니다만, 작년 말 이 모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어린이들을 위해 1,000만 원을 전달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천년전주사랑모임>! 참 영문 모르고 많이도 부스댔습니다.
‘영문 모르고’ 하니 제 영문학과 제자들이 좀 섭섭해 할까, 갑자기 염려가 됩니다. 사실 <호남사회연구회>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저희 영문과 내에 동아리 하나를 띄웠거든요. 이름이 좋아 필로스(Philos)! 사랑한다는 뜻이지요. 물론 지혜를 아니면 학문을. 매일 시위가 반복되던 시절, 그 핑계로 기초적인 학습을 소홀히 할까 염려가 되어 학습모임을 만들어 지도교수를 자임하고 나섰습니다. 지금도 이 모임은 저희 학과의 주요 학습동아리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천년전주사랑모임>. 줄여서 <천년전주>. 지속적으로 해나가자는 뜻에 사단법인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의 취지를 다시 설명드릴 여유는 없고요, 요즘 이를 어떻게 확산시켜 나갈까 한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장사익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전통음악을 나름으로 재해석하여 우리들 심금을 뒤흔들어놓는 늦깎이 소리꾼. 음악 조금 듣는다싶은 사람이면 거의 거들떠보지 않으려 하는 ‘트로트’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우리들 스스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춤을 추게 만드는 음의 마술사.
아! 그를 우리 전통문화의 전령사, 전주의 홍보대사로 삼으면 어떨까. 창립대회 마치고 잠시 쉬며 그의 <허허바다>를 듣다가 퍼뜩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실, 이런 일은 비밀리에 추진해야 하는 것인데 제가 지금 입방정을 떨고 있는 것이지요? 작전일지 모릅니다. 어영부영 기정사실화해버리려는.
제가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던 김수영시인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트로트’는 우리의 중요한 음악적 자산이요 전통입니다. 최근 한영애의 놀라운 재해석에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잘만 활용하면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장사익은 이런 점에서 가장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우리의 전통음악에 대해 전문가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통은 재창조요 혁신이다!’를 모토로 내세운 <천년전주>의 홍보대사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올봄 봄비 내리는 날 그를 불러 진짜 <봄비> 열창에 젖어보자는. 물론 <천년전주>에 가입한 분들만 초대될 것입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유혹이요 협박입니다. 이제 이 모임에 가입하지 않고는 전통문화를, 전주의 발전을, 감히 언급할 수 없게 될 것이랍니다. 문화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도 퍽이나 옹색해질 것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기타의 마술사 김광석씨도 부를 것입니다. 그날 진행은 어쩌면 이 모임의 이사이기도 한 개그맨 전유성씨가 맡을 것이고, 내친김에 한영애까지 불러! 제가 심은 매실나무가 꽃망울을 한창 터트릴 무렵 그런 음악회로 봄을 시작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는 노래를 혁신적으로 부릅니다.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러댑니다. 청이 그렇게 좋은 소리꾼이면서도 노래방에서는 점수가 잘 안 나오는 가수로도 유명합니다. ‘자발적 박치(拍痴)’로도 알려져 있는데 기계적 박자에 갇히지 않고 호흡을 따라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청난, 생생한 느낌과 공력을 담아서” 자기 나름의 호흡으로 “새 생명을 넣어” 부르는 것입니다.
하여 그의 노래 반주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김광석씨를 함께 부르겠다는 것도 이 때문에 하는 얘기입니다. 처음 그를 이끌어낸 임동창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고요.
그의 <봄비>를 기다립니다. <빛과 그림자> <열아홉 순정>
<님은 먼 곳에>와 더불어 <찔레꽃> <허허바다> <국밥집에서> 등이 우리들 봄을 흥건하게 적셔줄 것입니다. 아! 올봄에는 뭔가 큰 움틈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기대의 마음으로 이 모든 노래를 보내드립니다.
음악은 이종민 교수의 홈페이지(http://e450.chonbuk.ac.kr/~leecm)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