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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 | [문화와사람]
"자,멋지게 한 번 올려보자고!"
김선경 객원기자(2005-02-15 14:03:38)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기댈 언덕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신윤동욱 ‘스위트홈은 악몽이다’ 중에서, 『씨네21』 486호) 그는 결코 기댈 언덕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중에 돌아갈 곳이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기댈 언덕이 없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만나기로 한 음식점에 들어섰을 때 (그가 근무하는 곳의 여건이 장시간 대화를 하기에는 부적절했으므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만났다.) 그는 아무 곳에도 앉지 못하고 홀 가운데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이보다 훨씬 단출해 보이는 인상과 옷차림이었다. 눌러쓴 야구모자와 색깔이 진한 안경, 목도리를 둘둘 말아 감은 모습은 언뜻 혈기 방자한 고등학생을 연상케 했다. 내가 들어서자 그는 비로소 앉을 자리를 찾았다. 매우 어색하고도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서른 여덟, 중견 연극인 김준씨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연극인 김준 씨. 전주대학교 연극 동아리 ‘볏단’에서 활동하다 졸업 후 92년도에 ‘황토’에 입단, 전문적인 연극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생활은 ‘극빈’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입단해서 6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더니 5천 원 주데요. ‘준아! 이걸로 막걸리 값이나 해라!’ 하고. 그래서 그 날 저녁에 막걸리 실컷 마셨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두렵지 않았다. 명절날 정종 한 병 달랑 들고 찾아가는 고향길도 부끄럽지 않았다. 젊음이, 꿈이, 창창한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두려움이 생겨났다. 슬슬 돈벌이에 대한 중압감이 들었지만 틀에 박힌 직장생활에 몸을 끼워 넣기는 싫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구두닦이, 우유배달, 자장면 배달, 신문배달… 일용잡부로 푼돈을 모으며 남은 시간과 열정을 연극에 쏟아 부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세상과의 타협처럼 생각됐어요. 시립극단에도 두 번이나 입단했다가 나와버렸어요. 제 성정이 원래 좀 그래요. 평범한 삶에 묻히는 게 싫다고나 할까요? 내가 뭐 유난히 순수하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짜여진 틀 안에서 생활하는 것 못 견디고 자꾸 제 머리 속에 ‘이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드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올곧게 연극인의 길을 걷고 있을 무렵, 갑자기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그는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다시는 연극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올라간 서울길. 연극 포스터가 눈에 띄면 눈을 질끈 감아버리며 연극으로부터 멀어지고자 애썼다. “2003년 3월이었어요. 부모님이 사업을 크게 벌이면서 내 이름으로 대출 받은 은행돈도 상당했는데 그걸 갚을 길이 막막하더라고요. 모든 걸 잊고 오로지 돈만 벌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취직한 회사는 ‘인터넷 폰’을 만드는 회사였다. 하지만 그곳 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망해 가는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다가 어쩌지 못하고 다시 전주로 내려와야 했다. 그가 다른 직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회사가 비전이 없다는 걸 알고 다들 그만 둘 생각을 할 때, 그는 어떻게 하면 회사를 살릴 수 있을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월급도 없었고 사장이 그에게 부탁을 해온 것도 아닌데 그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그와 다른 사람의 차이점이었다. “내가 참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 혼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내가 손해를 당해도 항의하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그렇게 에돌아온 연극의 길. 다시 그 자리에 서고 보니 마흔이 코앞이다. “20대는 그냥 어울렁더울렁 살아도 되는 시기이고, 30대는 진정으로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찾아 열심히 연구하고 실험하는 시기이고, 40대는 그것을 꽃피우는 시기”라고 나름대로 정의하는 김준씨. 그는 지금 전주 풍남제 조직위원회 행사지원팀에서 일하고 있다. 아직 첫 월급도 받아보지 못한 초짜 생활인. 거처할 곳이 없어서 얼마간은 고향집이 있는 순창에서 전주까지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해왔다. “버스비가 4800원인데 너무 아깝더라고요.” 날이 추워지면서 오토바이 출퇴근이 불가능해져서 한 달 동안 찜질방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결국 풍남동에 방을 하나 구했다. 외풍이 심해서 코가 시리는 집이지만 후배 연극인 백민기 씨가 입방 선물로 이불을 사줘서 따뜻하게 지내고 있다. 다행히(?) 술은 못 한다. 소주 석 잔이면 자버리는 스타일. 술이 아니더라도 워낙 촌놈이라 밤 10시만 되면 잠이 와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래서 극단 시절, 심야에 연극 연습할 때면 잠을 자기 일쑤여서 별명이 “자니, 준?”이었다. 그렇게 선후배들한테 기대어서 살아온 인생. 너무 많이 도움만 받았기 때문에 돈이 생긴다면 쓸데가 너무 많을 거라는 김준 씨. 그래도 서릿발 같던 선배들이 있었던 옛날이 좋았다고 한다. “지금은 후배들한테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는 분위기예요. 교감이 안 되니까 말을 해도 소용이 없죠. 그래도 저는 가끔씩 후배들을 울리는 편입니다. 자주 하지는 않지만 한 번 말을 꺼내면 심장에 있는 말까지 다 끄집어내야 하는 성미거든요.” 그런 김준 씨의 성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들은 소극장 <판> 식구들이다. “정진권은 연극인으로서 당당해서 좋고 백민기는 연극관이 뚜렷하고 진지해서 좋다”는 그는 오는 3월 말에 선보일 개관 공연 스탭으로 참여하고 있다.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20일이 넘는 장기공연인데다 풍남제 준비기간과 겹치는 바람에 ‘무대감독’이라는 역할로 중심에서 비켜났다. 선배들은 젊은 혈기로 모인 <판>을 보면서 ‘기대반 우려반’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지만 김준 씨에게 <판>은 든든한 버팀목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에 출연을 했지만 제일 기억나는 작품은 대학 연극반 시절에 올렸던 작품 <만선>. 지나가는 어부 역할로 몇 마디 하는 것이었는데 그만 그 대사를 까먹어 버렸다. 대사를 까먹은 30초 동안의 고요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단다. 그건 뭐랄까, 미안한 것도 창피한 것도 아니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했단다. 그 허망함이 그를 오늘까지 연극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다시는 그런 허망함에 빠지지 않으리라. 황토에 입단해서 올린 작품 중 <아일랜드>는 아직도 그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2인 출연작으로 50일 동안이나 장기공연을 했던 작품.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올리고 싶은데, 작품에 빠져서 살았던 아프고 고독했던 나날들이 떠올라서 두렵기도 하단다. <탁류>로 93년도에 우수연기상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작품은 따로 있다.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라는 작품. 작품 속 출연자들은 다 말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말더듬이 역할을 하면서 침묵과 말더듬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가져다 주는지 여실히 체험했단다. 말과 말 사이의 여백, 몸짓과 손짓과 눈짓의 힘을 알게 됐다고. 발음이 ‘새는’ 것 때문에 연극배우로서 자격미달이 아니냐고 나름대로 자괴감에 빠져서 살았는데 그 작품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았다고 한다. “예술은 어떤 장르든지 결핍 속에서 꾸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유독 연극이 더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나만 어렵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는데 막연하게 슬퍼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지금 경기도 일산에 올라가 있다. ‘연극인 강사 풀(Pool)제’를 위한 2주간의 연수를 받기 위해서다. 무작위로 흩어져 있던 경험들을 체계화 시켜서 연기자 학교 같은 것도 열어보고 싶고, 전공학과를 졸업한 도내 연극 지망생들을 유입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젊은 후배들이 같이 가야 우리 연극이 발전할 수 있고, 배우훈련 시스템을 구축해서 연기 신체훈련도 해마다 받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 지금까지 그런 부분에 투자하지 않았던 게으름을 반성한다고. “문예진흥기금이 활성화되면서 스탭들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는 등의 순기능도 있지만 배우입장에서는 역기능이 많습니다. 지원을 많이 받을수록 공연 규모가 커져야 하니까 없던 관현악 파트도 생겨야 하고, 그런 대규모 작품은 일 년에 한 두 작품이 고작이니까 오히려 배우는 놀아야 하는 상황이 생겨요. 지원금 4,5천만 원이 넘는 대작들은 배우들이 ‘헤쳐 모여’식으로 하는 공연이라 연극인에겐 오히려 마이너스죠. 설혹 그 작품이 대상을 탄들 지역연극계에 남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바라건대 지역 극작가의 층이 좀더 넓어지고 두터워지기를, 또 예술이 생활과 유리되지 말고 좀더 깊숙이 밀착되기를, 그리하여 배우가 경제적으로 힘들다 할지라도 연극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그는 소망한다. “이제는 옛날처럼 우유 배달하고 구두 닦아서 연극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버렸습니다. 어느 날 머리 깎고 거울을 보니까 그 속에 배우의 얼굴이 없는 거예요. 맨날 자장면 나르고 구두 닦다 보니 그저 생활과 세파에 찌든 얼굴이 그 속에 있는 겁니다. 배우처럼 살아야 배우의 얼굴이 만들어집니다. 이제는 배우처럼 좀 살아보려고 해요.” 왜 그렇게 바보처럼 연극을 잊어버리려 애썼던가. 지금 생각하면 후회도 된다. 그러나 이제 앞만 보고 살아갈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생활이 나를 힘겹게 해도 거기에 발목 잡히지 않을 것이다. 같이 살아줄 사람도 없고, 번듯한 집도 없고, 주머니에 돈도 없고,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없지만,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걸어갈 생각이다. 그 앞에 무엇이 놓여 있든. 그리고 호기롭게 한번 외쳐볼 것이다. “자, 이번 작품 멋지게 한 번 올려보자고!” | JTV 구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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