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 | [문화저널]
[기획연재]끈기와 충절이 서린 땅
이복웅 군산문화원 원장(2005-02-15 13:53:09)
군산의 명칭
고려시대까지 지금의 군산은 고정된 명칭이 없었다. 금강유역은 천연자연 포구의 포가 많았다. 그 중에서 제일 수운의 편리한 곳에 고려 초 조창, 조운의 기지 선창을 두었다. 조창에는 조운이 있었고 이를 관리하고 지키는 관리와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진을 둔 포구이기에 진포라고 불렀고, 당시 군산지방의 총칭은 자연스럽게 ‘진포’가 되었다.
조선시대 초에도 진포로 또는 북진포로도 불리었지만, 군산이라는 명칭은 군산진에서 연유된다. 고군산도는 본래 이름이 군산이며, 고려시대에는 대송무역로와 조운의 주요 기항지뿐만 아니라 국방상의 중요 진터였다. 고려 우왕 6년 8월에 왜구 선단 500여척이 곡식을 약탈할 목적으로 금강하류 즉 진포 연안으로 침범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무선이 제조한 화기를 쓰도록 하였으며 최무선은 전함 100척을 이끌고 진포로 급거 출동하여 왜선 500여척을 일순간에 대퇴시켰다. 이것이 유명한 진포대첩이다.
이곳 군산도에 있었던 군산진(지금의 선유도)이 세종 초 옥구현 북단인 진포로 옮겨왔을 때 그 이름까지 따라와 그대로 군산진이라 불렀기 때문에, 본래의 군산도는 옛고 자를 붙이어 고군산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군산의 역사
1919년 3월 1일 항일항쟁과 독립선언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군산에도 영명학교를 중심으로 같은날 호남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2월 28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병수가 기독교계통의 연락망을 통하여 독립선언문 200매를 받아들고 밀사로 내려와 구암리 영명학교 교사에게 전달하고 3월 5일(장날) 서래 장날을 기하여 교직원, 학생, 예수병원 사무원 그리고 신자 및 일반시민들까지 합세하여 일어났다.
옥구 농민 항일항쟁은 1927년 11월 25일에 농민(소작인)들에 의해 일제 농장주에게 항거한 전국 최대규모의 농민 항일항쟁이 있었다. 일제 하에서 우리민족의 80%가 농민이었고 그중 80%가 소작인이었다. 더욱이 군산옥구지방은 일제시대 일본인농장의 밀집지대였으며 농토수탈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옥구농민조합이 확립되고 서수농민조합, 서수청년회가 생기면서 서수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의 폭압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항쟁의식을 갖고 있었다. 조선인 농민 소작인을 관리하는 이엽사는 1927년 11월 20일에 소작료 75%의 교육 소작료를 요구하였다. 이에 소작인들은 서수농민 조합대표를 내세워 소작료를 45%로 인하하여 징수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묵살 당하자 조합원 임시총회를 열어 요구 내용이 관철되지 않으면 불납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농민대표를 체포, 포박하여 연행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농민들은 대거 집결하여 임피지서를 습격, 농민대표를 구출하고 이어 서수지서를 파괴하여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본경찰은 주모자 51명을 검거, 검사국에 송치하여 34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농민항쟁 최대규모의 판결이었다.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정책구현의 전진기지였던 군산·옥구 지방의 미두장을 배경으로 식민지 민족의 슬픔과 사회상을 처절하고, 풍자적으로 막힘 없이 써 내려간 소설 『탁류』, 채만식은 『탁류』의 작가이다. 채만식은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1902년 6월 17일에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의 5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를 중퇴했으며, 신여성과의 결혼으로 불행한 가정사를 지닌 그는 말년을 빈곤과 실의 속에서 폐결핵으로 1950년 6월 11일 4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채만식은 「세길로」가 1924년 「조선문단」에 발표되면서 정식 문단데뷔를 하였고 1950년까지 많은 희곡, 장·중·단편소설, 수필, 꽁트, 동화 등 폭넓은 분야를 두루 섭렵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표 작품인 『탁류』는 1937년 조선일보에 연재됐던 글로 그는 그 당시 1934년부터 해방전까지 일제의 탄압이 날로 가혹해졌던 시기에 풍자성이 강한 작품을 많이 써 문화의 황금기를 누렸다고 후세인들은 평한다. 임피면 축산리에 묘소가 있으며 그의 생가터 비가 임피파출소 건너편에 세워져 있다. 군산 월명공원 수시탑에서 3·1절 기념탑 쪽으로 100여 미터를 가면 무선송신소 앞에 그가 말했던 탁류가 흐르는 서해를 바라보며 서있는 채만식 선생 문학비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를 보면 전국에 총67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그 중 북방의 변경지대에 배치된 것이 353개 소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경상도 134개소와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64개소로, 그중 약 200개의 봉수대는 왜구들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곡창 지대를 왜구의 약탈로부터 방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 대부분은 서해연안선에 집중되어 있었고 금강 남안을 따라 형성된 금강 남안선도 있었다. 우리 고장의 봉수대지를 보면 서해 연안선에 위치한 사자암 봉수대지, 화산 봉수대지, 점방산 봉수대지, 금강 남안선에 위치한 오성산 봉수대지, 불지산 봉수대지, 서해전초 기지선인 어청도 봉수대지, 만경강 내륙선인 남산 봉수대지가 있다.
향교는 고려때 지방에 세워졌던 관학 교육기관이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학교이다. 고려시대 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향교는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이 흥하였다. 우리 고장에는 임피향교와 옥구향교 두 향교가 있다. 임피향교는 태종 3년(1403)에 전국 360여개의 향교 창설과 더불어 대정동(현 임피면 취산리 교동마을)에 창건하였으며 그 후 인조 8년(1633)에 서모곡(임피면 미원리 서모리)으로 이전하였고 이어 숙종 36(1710)에 장유동(임피면 성내리)으로 옮기고 대성전과 명륜당을 세운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옥구향교는 조선 태종 3년(1403)에 창건 성종 15년(1484)에 광월산 북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인조 24년(1646)에 옥구면 상평리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특기할 만한 것은 최치원이 유시에 독서했다는 정자 자천대를 이곳 향교 바로 이웃 문창골(비행장 구내)에 옮기어 놓고 기념하고 있다는 일이다.
사학과 향교가 관학이었음에 대하여 민간 사학의 중등 정도 교육기관으로 서원이 있었다. 서원은 본래 내외의 명현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는 사설교육 기관으로 선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제(齊)가 합쳐서 설립되었다. 우리고장의 서원을 보면 염의서원, 옥산서원, 문창서원, 산앙서원, 치동서원, 봉암서원이 있었는데, 이 중 옥산·문창 서원은 옥구향교내에 있어 서원으로서의 본색을 잃었고 봉암서원은 고종 5년(1868년)에 헐리운 채 그 유허지만 남아있으며 서원의 진면목을 지키고 있는 것은 염의와 산앙 서원이라 볼 수 있다.
우리 지방에는 전통적으로 큰 사찰이 적었기 때문에 석탑·석등·석불등 불교 유물도 많지 않은 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들 중 살펴볼 만한 것은 발산리 오층석탑과 석등이다. 군산에서 대야간 도로에서 과적차량 검문소를 지나기 전 왼쪽에 발산초등학교가 있다. 이 곳의 학교 건물 뒤편에 가면 석등과 석탑이 있다. 오층 석탑과 석등은 원래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의 봉림사 터에 있었는데 일제때 미치야(島谷)라는 일본인 지주가 자신의 농장 정원을 꾸미기 위하여 옮겨 놓은 것이다. 해방되면서 미치야의 농장은 폐쇄되고 그 자리에 1947년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섰다. 발산초등학교 경내에는 이 석탑이나 석등 이외도 교정의 곳곳에 사자상이라든가, 양 모양의 석물, 무엇인가의 받침돌이었을 듯한 안상이 새겨진 네모난 돌 등 여기저기에서 수집한 듯한 석물들이 놓여져 있다. 여기에 놓여진 돌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한 우리의 문화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석등은 보물 276호, 석탑이 보물 234호로 지정되어 있고 군산에서는 단 2개뿐인 보물급의 문화재이다.
끈기와 충절의 고장
우리민족의 역사를 볼 때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끈기’와 ‘충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꺾일 듯 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강인함, 그리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백성들의 충절의 역사는 참으로 자랑할 만 하다. 이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유산이요 전통이다. 그러기에 반만년의 역사를 지키고 이어온 것이다. 그러면 우리 고장의 정신적 유산과 전통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끈질긴 저항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요약한다면 첫째로, 지금부터 1,339년 전 백제 멸망 시 당나라 소정방의 위력 앞에서도 겁내지 않았던 오성산상의 다섯 노인의 호국 저항정신의 기개를 들 수 있다. 둘째는 고려 말 우리 고장의 곡식을 탐낸 수차에 걸친 왜구의 침탈에 겁내지 않고 남녀노소 모두 일어나 마을과 이웃과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싸운 긴 항쟁사의 저항정신을 들 수 있다. 왜구 격멸에 으뜸가는 진포대첩의 격전지에서 토적대의 관군과 같이 끝까지 싸워 왜구를 섬멸시킨 저항정신의 오성산상의 다섯 노인의 저항정신은 이어온 것이다.
셋째로 진포대첩으로부터 212년이 지난 조선 중기 임진왜란의 국난에 우리 고장의 조상들은 솔선 자원 종군하여 왜군과 싸워 크고 작은 공을 세운 분들이 많았다. 당시는 지방에 장수가 나오면 그 밑에 일가 친척은 물론 향당이 모여들어 다 같이 공생공사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우리 고장이 낳은 조선 중기의 명장 최호 장군 휘하에서 많은 향당들이 종군하여 왜적과 싸워 순국한 무명의 용사들도 많았다. 이 또한 항거정신의 전통을 또 그대로 이어 받은 우리 고장의 향토정신이다.
넷째로 한말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는 우국충절의 의병장과 의병이 우리 고장에서 많이 나온 것도 오랜 전통의 저항 정신의 발로이고 계승이다. 다섯째로 나라를 강점당한 후 일어난 3·1운동에 호남에서 제일먼저 봉기한 항일항쟁의 저항운동도 역시 줄기차게 이어온 저항정신의 향토정신의 발로이다. 여섯째로 3·1운동이후 일제의 경제적 약탈과 인권의 억압에 항거하여 항구를 중심으로 조직하고 항거한 각종 단체의 지속적인 저항운동도 향토정신의 계승이었다. 일곱째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 속에 일인 지주들의 착취에 항거한 옥구농민의 소작쟁의 항일운동 역시 저항정신의 산 역사의 표상이다. 여덟째로 우리 고장 출신의 독립 유공자의 항일 운동을 활동 계열별로 정리 할 때 우리고장의 향토정신이 그대로 계승 지켜왔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고장 군산의 조상들은 예부터 지금까지 나라가 위급할 때나 이웃이 어려울 때 앞장서서 묵묵히 나라를 지키고 고장을 지켜왔었다. 우리 고장의 기질은 끈기와 인내, 그리고 굽힐 줄 모르는 의로운 저항정신이다.
이복웅 |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군산문화원 원장과 전북문화원 연합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한국시인협회이사, 국제 펜클럽이사, 한국문인협회 윤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