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 | [문화저널]
[테마기획]창호지에서 우주선 보호 장비까지
김중태 팬아시아종이박물관 학예실장(2005-02-15 13:42:17)
한지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으로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난 문화유산이다. 아직까지도 전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경은 한지의 우수한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문화재이다.
중성지로서 보존성이 뛰어나고, 닥나무 섬유질의 질긴 특성으로 인해 폭넓게 사용되어 왔던 한지가 현재는 몇 군데 영세한 업체에서만 생산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제품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개발이나 연구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들어 한지 생산 업체 및 국가 기관, 대학 등 몇 곳에서 한지의 산업화를 위해 끊임없는 연구를 벌이고 있는데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되며, 이들의 연구가 조만간에 큰 빛을 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 생산되고 있는 산업적 기능을 가진 한지의 개발은 아직 초보 수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생산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인쇄용 한지, 벽지, 포장지, 인화지, 압지(oil blotting paper), 차량용 필터지 등이다.
도침(한지를 만든 후 표면을 매끄럽게 해주기 위해 다듬이질을 해주는 것) 과정을 거친 전통한지는 붓을 이용해 글씨를 쓰기에는 아주 훌륭한 종이이다. 그러나 인쇄를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데, 이는 사이징 (종이를 만드는 과정 가운데 하나. 펄프만을 사용하여 만든 종이는 흡수성이 있어서 필기나 인쇄를 하면 잉크가 번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내수성이 있는 콜로이드 물질을 혼합해서 섬유의 표면이나 섬유 사이의 틈을 매워주는 과정을 말함)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쇄를 할 수 있는 한지를 개발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인쇄용 한지, 또는 기계 한지, 개량 한지라고 불리는 것이다. 한지의 우수한 보존성과 질긴 특성, 그리고 질감이 잘 살아 있어서 상장이나 책 표지, 포스터, 엽서, 명함 용지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 인쇄용 종이에 비해 부드럽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또한 한지는 통기성과 보온성이 좋고, 새집증후군의 주범인 포름알데히드를 중화시키는 기능이 탁월하여 벽지로도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웰빙 시대에 잘 어울리는 제품이어서 앞으로 사용량이 매우 많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한지인화지 역시 사진의 은은함과 고풍스러운 멋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 압지는 여성들 또는 지성 피부인 사람들에게 매우 유익한 제품으로 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차량용 필터지는 기존의 화학제품으로 만든 필터지에 비해 먼지 흡수성이 뛰어나고, 사용 후 소각 시 공해가 적어 친환경 제품으로서의 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고부가가치의 제품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장판지, 창호지, 돈띠지 등이 생산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의상 디자이너들에 의해 한지의상이 제작되어 각종 패션쇼 등에 선보이고 있다. 한지의상은 아직 실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한지사(韓紙絲)가 개발되어 있어 앞으로는 충분히 실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지사의 수준은 아직 40수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 지속적으로 연구를 이어간다면 고품질의 한지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입는 내복이나 셔츠, 양복 등은 물론 위생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수술용 의상이나 조리용 의상도 만들어 실용화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지로 만든 수의(壽衣)는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데 한지의 우수한 특성으로 인한 효과가 뛰어나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인하대학교의 김재환 교수는 미국 NASA와 공동으로 한지를 이용해 우주선 보호 장비를 개발하고 있다고 하니 한지가 얼마나 우수하고 그 쓰임새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 수 있다.
일본 화지보다 강도가 높고 보존성도 뛰어난 한지는 현재 극소수 장인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일본에 비해 산업화가 매우 뒤쳐져 있는 상태이다. 국내 한지시장의 규모가 320억원 정도인데 비해 일본 화지시장의 규모는 우리보다 30배 정도가 많은 1조원대로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32억원 정도의 규모에서 전통한지의 점유율이 5%에 그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도 없이 한지 산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의 화지가 1조원대의 시장규모를 가지고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지속적인 연구 개발을 통해 역사기록용 보존용지, 공예용지 등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생산해서 유럽 및 전 세계에 수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가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던 나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이 세계 수제(手製) 종이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것만이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고부가가치의 한지를 생산해서 판매함으로써 그들을 넘어서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정부에서 한지 산업의 발전을 위해 한지의 KS규격 제정은 물론 정부문서의 한지화, 정부 포상 및 학교 상장 용지의 한지화, 닥나무 재배단지 확대, 한지를 이용한 문화상품의 개발 등을 추진하겠다고 하니 지금보다는 조금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며, 얼마 전 출범한 한지산업발전진흥회에서도 산학연계를 통한 신기술 개발, 실용 신상품 개발, 마케팅 전략의 수립, 한지의 산업화 촉진 등 한지 발전을 도모해 간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다만 한지 생산자들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정부나 한지산업발전진흥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나무는 가꾸지도 않고 열매를 얻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 같아 우려가 된다.
한지는 정말 우수하고 다양한 기능성을 가진 종이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지를 이용한 다양한 산업적 시도들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느 것은 연구 및 개발이 진행 중이고, 어느 것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다. 한지의 다양한 기능 및 우수함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지의 산업적인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다른 화학제품에 비해 가격이 비싸 모든 제품의 생산 및 판매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단점이나, 디자인적인 요소를 가미하면 충분히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과거 우수한 종이를 생산해서 종이를 만든 중국에서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 한지! 그러나 지금은 우리들의 입으로만 우수하다고 떠들고 있는 종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 다시 과거의 찬란한 영광과 잃어버린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