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 | [문화저널]
[테마기획]천년 한지의 어제와 오늘
강진하 전북대 교수(2005-02-15 13:40:16)
종이와 한지
한지도 종이의 일종이므로 한지의 위치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종이의 기원과 더불어 한지를 포함한 종이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기록용 재료로서 목간, 죽간 및 동물의 뼈 등이 사용되었으나, 이집트에서는 BC 5~8 세기경부터 나일강변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를 이용하여 기록용 재료로서 이용하였다. 그러나 파피루스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종이와 같이 각각 분리된 섬유(펄프)를 가지고 만든 것이 아니고 파피루스 줄기 조직을 얇은 조각으로 쪼개고 이들을 겹쳐서 만든 것이므로 지금의 종이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이는 언제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의 기원은, 그 이전이라고 볼 수 있는 종이 유물들이 발굴되었지만 AD 105년 중국 후한시대에 채륜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종이는 마섬유로 종이를 만들기에 적합하도록 자르고 맷돌에서 마쇄하여 제조하거나, 볏짚, 밀짚, 갈대 및 대나무 등과 같은 초본류를 자연상태에 방치하여 자연계에 존재하는 각종 미생물에 의한 리그닌의 분해로 섬유를 해리시켜 제조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제지기술은 AD 3세기경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그 우수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진 닥나무 인피섬유로 만든 한지가 제조되었으며 천년이상 보존이 가능한 대표적인 중성지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은 한지는 닥나무 인피섬유를 천연재료인 잿물에 삶아 섬유들을 해리시키고, 이들을 흐르는 깨끗한 물 속에서 장기간 세척, 일광표백을 할 뿐만 아니라, 한지 제조 시 사용되는 부재료도 황촉규라는 식물의 뿌리 점액을 사용함으로서 품질이 우수하고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제지기술은 AD 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주로 삼지닥나무 인피섬유를 이용하여 지질이 한지보다 치밀한 화지(和紙)를 제조, 사용하였다.
한편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서양으로도 전파되었는데, AD 750년경 지중해 연안(아라비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에 전래되었으며, 그 후 스페인, 프랑스, 독일을 거쳐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스웨덴, 핀란드 등), 미국 등으로 전파되었다. 이와 같이 제지 기술이 서양에 전래되었을 때 이들은 자기 지역에서 종이의 원료로서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섬유 자원인 목화, 아마, 대마 등을 이용하여 동양에서와 같이 수록법으로 종이를 제조하였다. 이와 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이의 원료는 특별한 설비나 화학약품 없이 쉽게 섬유를 얻을 수 있는 닥나무 인피섬유, 뽕나무 인피섬유, 볏짚, 대나무, 목화, 아마, 대마 등을 원료로서 잿물 증해방법 또는 자연계에 있는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방법과 더불어 맷돌로 마쇄하는 방법으로 종이 제조용 섬유(펄프)를 제조하였다. 또한 종이를 제조하는 방법도 한 장씩 손으로 뜨는 수록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문화와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종이의 수요량이 급증하게 됨으로써 종이의 원료인 섬유(이하에서는 「펄프」라 지칭하겠음)가 대량으로 필요하게 되었으며 단시간에 다량의 종이를 제조할 수 있는 방법이 요구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연중 어느 때나 구득, 사용할 수 있고 자원도 풍부한 목재가 펄프 원료로서 선택되었고, 목재펄프를 제조하는 기술과 종이를 만드는 초지기계들이 서양에서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렇게 제조된 종이의 주용도는 단순한 기록용 및 포장용이었으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종이의 용도에 새로운 분야가 생기게 되었다. 기록분야에서는 사무자동화 경향에 따라 새로운 종이의 수요가 창출되었고, 감열기록지, 감압기록지 등 여러 종류의 가공지가 출현하였고, 컴퓨터 관련 용지도 가세하여 정보 용지 시대로 접어들었다. 포장분야에서는 종이봉지, 골판지 등의 기존 종이제품에 새로이 플라스틱 필름과의 복합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방수·방습 기능을 가진 제품과 일회용 종이컵과 같은 생활용품도 출현하였다. 액체의 흡수성을 이용한 화장지, 종이수건, 일회용 기저귀가 개발되었고, 또한 청과물의 선도를 유지할 수 있는 포장재료 등도 개발되었다.
이와 같이 종이의 용도는 우리 생활 곳곳에 확대되고 있으며 수요도 계속 증가되고 있는데, 한지 산업은 영세하여 이러한 경제 사회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결과 오늘과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한지의 어제와 오늘
전주한지는 협의로는 전주에서 생산되는 한지를 의미하나, 광의로는 전주인근 뿐만 아니라 전북지역에서 생산되는 한지를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전주한지는 우리지역의 기후와 토질이 우수한 닥나무 생육에 적합하여 양질의 닥섬유가 생산되었으며, 일찍이 문화가 발달되어 한지의 수요가 많았으므로 한지 산업이 크게 발전되어 왔다. 한편 이와 같은 한지는 서사용지, 서화지 뿐만 아니라 창호지, 장판지와 같은 주거용과 지승공예품, 지호공예품 등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그 용도는 우리생활 거의 모든 곳에 이르렀으므로 한지와 함께 태어나서 한지와 함께 생활하다가 한지와 함께 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기계초지기가 도입되면서 목재펄프를 주원료로 한 양지가 보급되기에 이르렀으며, 점진적으로 서사용지 영역을 양지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주거 양식이 변화되면서 창호지와 장판지 수요가 크게 감소되었으며, 생활양식이 바뀌면서 지승공예품, 지호공예품의 사용 영역도 대체품의 출현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서화용지 영역만이 남게 되었는데, 중국과 수교이후 중국에서 저렴한 화선지가 대량 수입되면서 서화지 시장도 상당히 잠식됨으로써 한지 산업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와 같이 한지 산업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원가를 절감하기 위하여 주재료인 닥섬유를 국산닥이 아닌 태국 등지로부터 수입한 저급 닥섬유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부재료인 목재펄프도 품질이 열악한 고지를 이용함으로써 한지의 품질이 저급화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지는 가격면에서 중국 화선지에 밀리고 품질면에서는 일본 화지에 뒤떨어지는 위치로 전락하여 한지는 그 영역이 더욱 축소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한지의 미래
그러나 한지는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품질이 우수한 전통문화상품이므로, 전통문화를 계승함은 물론 국가 경제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한지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문화가 경쟁력이라는 사고의 변화에 따라 전통문화상품 중의 하나인 한지를 발전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지원시책들이 시행되어 왔으나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한지와 한지관련 제품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소비자의 의식변화, 신상품 개발을 통한 신수요 창출 등과 같은 관련업계의 자구노력과 더불어 각계 관련기관의 계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한지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
강진하 | 1949년에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임학과에서 펄프·제지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전북대학교 농과대학 학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