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2 | [문화저널]
[최승범 시인의 풍미기행]해장의 복탕 맛
최승범(2005-02-15 13:31:26)
‘복어는 장다리꽃이 필 무렵부터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겨울철의 먹거리로 알았던 것이다. 장다리꽃철이면 나비가 나오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철이면 복어의 독이 맹렬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냉동기술로하여 철을 챙기지 않는 먹거리가 되었다.
복어는 줄여서 ‘복’으로 일컬어 왔다. 지방에 따라서는 복쟁이, 한자어로는 ‘하돈(河豚)’·‘취두어(吹 魚)’로도 일컬었다. 알집과 간장·위장·신장·안구(眼球) 및 피에 맹독(猛毒)이 들어있어 잘못 조리하면 사람의 생명을 해치기도 한다.
18세기, 이덕무(李德懋)는 《사소절》(士小節)에서 ‘복어는 먹을 것이 아니다’의 말씀이었고, 시문집에서는 <하돈탄>
(河豚嘆)을 남기기도 하였다.
- ‘하돈에 혹한 이들의 말인즉, 맛 치곤 천하에 으뜸이라네. 비린내 가시도록 솥에 푹 삶아, 후춧가루 뿌려 기름 쳐 놓으면, 쇠고기 맛보다도 더하고 방어의 맛도 저리 가란다네. 사람들 하돈 보고 모두들 기뻐하지만 나는 그들 보면 근심일레. 아 슬픈지고 세상 사람들, 목구멍 윤낸다고 기뻐들 마소.’
나는 이 어른의 《사소절》을 좋아하면서도 복어에 대한 말씀은 어겨왔다. 술 속을 푸는 데엔 복탕·복국이 으뜸인 것 같고, 술안주로도 복사시미·복찜·복포(河豚脯)를 대하면 젓가락이 가기 전, 먼저 입안에 침이 돌 지경이니, 어찌하랴.
‘복사시미’는 값도 대단할 뿐 아니라, 다루는 음식점도 흔하지 않다. 그동안 꼭 세 번 맛보았을 뿐이다. 30여 년 전 일본 교오또[京都]에서 처음이었고, 그 다음이 전주의 ‘대락’, 그리고 10여 년 전 광주의 ‘청해식당’에서였다. 저때 중앙동에 자리하였던 ‘대락’도 없어졌거니와 그 후 전주에서 복사시미를 다루는 집을 본 적도 없다.
복국·복탕·복찜으로하여 자주 찾았던 전주시내의 음식점이라면 ‘곰집’·‘한일관’·‘비둘기집’·‘태봉집’·‘그때산집’·‘양지식당’ 등을 들 수 있다. 어느 식당엘 가거나 맛이 없어 못 먹겠다는 경우는 없었다. 복어의 종류나 고추장·된장의 농도에 따라 국물 맛이 다르긴 해도 어느 집의 것이거나 그 집 나름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바로 지난달 초순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전날 밤의 술 속을 달래기 위해 ‘태봉집’(완산구 고사동 195-1, 전화 283-2458)을 찾았다. 이집에선 복지느러미를 넣은 소주도 마실 수 있어 몇 해 전만해도 자주 들린바 있었다.
저날 아침의 해장에는 초서(草書)의 대가 취운·진학종(陳學鍾)선생을 뫼시고 운경·황호철(黃鎬哲)화백과 자리를 함께 했다. 취운(翠雲)선생은 안팎 주인과도 익히 아는 사이이셨다.
‘이리가 있는지 몰라. 이리를 많이 넣어서 끓이시게.’
의 당부이셨다. 그리고 상차림이 이루어지기까지 복요리에 대한 말씀이었다.
- ‘복이리를 서시유(西施乳)라고도 하지. 그 빛깔이 서시의 뽀얀 젖빛처럼 희고, 맛도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야.’
- ‘복요리야 일본 요정의 것을 당할 수 없지. 큰 왜접시에 백지장처럼 엾게 회를 떠서 문양을 놓아 내놓는 사시미의 맛이라니…’
해장을 마치기까지 복요리에 대한 말씀은 부진장강(不盡長江)이었다. ‘태봉집’을 나오면서는
- ‘이집 복탕으로 해장하고 서울에 돌아가야만 전주에 다녀온 기분이 난다’
의 말씀이었다. 저날 아침의 ‘태봉집’ 복탕의 해장 맛은 한결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