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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 | [문화저널]
[저널이본다]물건을 보여 주십시오
정철성 편집주간(2005-02-15 13:25:11)
제가 아는 김 씨는 전화번호나 연락처를 받아쓸 때 손등과 팔목을 이용합니다. 처음에는 손바닥을 이용했는데 악수를 하거나 깜박 잊고 손을 씻다보면 지워지기 일쑤여서 부위를 바꿨답니다.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지우고 다시 쓸 수 있으며, 약간의 손상은 저절로 복구되니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동물의 가죽에 글자를 쓰던 옛 습속이 떠올라 볼 때마다 저는 불편합니다. 문자를 터득한 이래 인간은 점토판, 파피루스, 나뭇잎, 양피지, 뼈, 비단, 목간 또는 죽간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하여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다가 종이가 나왔습니다. 종이는 인류가 발명한 기록 매체 가운데 최고라고 합니다. 반도체의 도전이 만만치 않지만 아직도 종이는 사용 빈도의 첫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문화저널』 한 권을 죽간으로 만든다면 여름에 쓰는 대자리 몇 판이 나올까요? 저 시인처럼 온몸에 새긴다면 목욕을 몇 번 해야 할까요? 만일 양피지를 쓴다면 양을 몇 마리나 잡아야 하나요? 책값은 또 얼마가 될까요? (죄송합니다. 구독료가 올랐습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등장하기 전에 유럽에서는 어느 귀족이 12권의 책으로 대단한 장서가 행세를 했다고 합니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한지라는 이름의 전통 종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한지의 용도는 기록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백 년 전의 한옥에 우리가 앉아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방바닥, 벽, 창호, 천정은 말할 것 없고 병풍, 족자 등 장식품을 비롯한 생활용품의 태반이 종이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물건들은 물론 환경친화적입니다. 그러나 생활양식이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전주한지는 명성을 잃고 전통제지술의 명맥마저 끊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서화용을 만들어 근근이 유지하는 형편인데 그나마 값싼 수입품에 밀리고 있답니다. 최근 이 종이를 되살려보자는 각계의 의지가 왕성합니다. 옛것이라 아까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을 뿐입니다. 볼펜에 밀려 만년필도 사라지는 이 시대에 붓을 쓰자고 나선다면 라 만차의 기사 꼴이 되겠지요. 그렇지만 볼펜도 요즘에는 기름똥 없이 잉크처럼 흘러나오는 신형이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잉크가 적당히 스미고 보기 좋게 번지는 종이로 공책을 만들어 주세요. 천년전주사랑모임이 돛을 올렸습니다. 전주시의 몇몇 민간위탁 문화시설들은 수탁자가 새로 선정되었습니다. (시군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군산시의 문화인들은 이나마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방법을 모색하는 토론에서는 어김없이 ‘선택과 집중’ 못지않게 ‘전통의 현대화’라는 어구가 자주 들립니다. 그럼 물건을 보여 주십시오. 제가 이십 년 전에 어떤 연극을 보았는데 어디에서 보았는지 가물가물하건만 배우의 표정이며 배경에다 줄거리까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내용입니다. 추신: 처음 무대에 올라온 배우의 눈에는 관객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지만 저는 관객의 존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눈을 마주칠 여유가 아직 없습니다. 오로지 성실한 연기만이 두려움을 덜어줄 것이라 믿고 저는 혀와 몸을 움직입니다. 대사 하나 몸짓 하나 모두 완벽에 가까워질 때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애정과 함께 준엄한 비판을 기다리겠습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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