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 | [문화저널]
<제96회 백제기행>장날을 지나 팔덕면 남근석까지, ‘역사가 된 일상의 힘’
조희숙 전주시 문화관광과 문화정책 팀장
(2005-01-25 16:12:18)
갈 수 있을까 싶다. 백일도 안된 아이가 옆에 누워있고, 늦은 출산으로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백제기행이라니 내겐 아직 무거운 이름이다. 그런데 여섯 살 우진이가 맘에 걸린다. 아빠와 함께 백제기행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에게 그냥 우리끼리 자장면 시켜먹자고 꼬드겼더니 펑펑 눈물부터 쏟아낸다. 도리 없이 갓난이 현우(賢雨)를 어머니께 맡기기로 한다.
가을바람에 마음을 뺏겨본 사람은 안다. 그 바람 덕에 어린시절 동네 골목길을 걸어보고, 애틋했던 첫사랑의 그림자를 밟다가 지친 일상을 다스릴 힘을 얻는다. 들녘의 가을정취를 지나 벌써 강진장이다.
기획실장은 천원어치 물건사서 자랑하기를 제안한다. 뭘 살까. 싱싱한 다슬기에 눈길한번 주고 유행지난 옷가지들 틈을 지나 간절인 생선들 콩이며 들깨, 참깨, 치자까지, 세월을 견뎌내며 변하지 않은 것들은 애닳다. 작아지고 왜소해져 낡고 초라해진 장을 둘러보면서 요란하지도 않고 부산하지도 않으며 치열하지도 않은 참으로 느슨한 시간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때가 아닌데도 국수집에선 금방 말아낸 국수에 막걸리가 오간다. 이제야 장에 온 듯 하다.
순창 귀미마을은 오늘로 네 번째 찾는다. 600년이나 된 역사적인 마을로 생성동기까지 분명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여 TV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이 첫 인연이었다. 백제기행의 참고자료로 나눠준 책자에는 영조 26년(1760) 편찬된 순창군지의 산천조를 소개하고 있다.
군의 동북 30리 아동방(阿東坊)에 있는 무량산은 임실 노산(盧山)의 줄기이다. 옛날에는 귀악(龜岳)이라 불렀는데 국초에 현감 양사보(縣監 楊思輔)가 어릴 때에 이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배를 가르니 무량이라는 두 글자가 나왔으므로 그로부터 산 이름을 무량산(無量山)이라 불렀다.
이 산 아래에 귀미(龜尾)라는 마을이 있는데, 곧 양씨의 오래된 터이다. 열녀 이씨가 비홍재에서 산기를 바라보니 이곳이 명기여서 찾아가 잡은 터이다. 풍수가에 따르면 군내에서 제일로 치는 터라고 한다.
열녀이씨가 이곳 구미마을에 터를 잡게 된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이씨부인은 재가 할 것을 권하는 친정 부모를 설득하여 유복자를 낳는다. 유복자를 낳고서도 친정부모의 재가 종용이 계속되자 이번에는 수만리 길을 걸어 남편의 본향인 남원을 찾는다. 얼마 안 되어 왜구의 난이 일자, 풍수를 두루 살펴 고르고 고른 끝에 마침내 자리 잡은 곳이 이곳 구미마을이라는 것이다. 그 후 자손이 번창하여 순창의 명문가가 되었으니 이곳 구미마을은 가문을 지키려는 한 여인의 신념이 세월 속에서 어떻게 승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공간이다.
600여 년전 이씨부인이 온갖 고난 속에서 지켜낸 시아버지와 남편의 과거 급제 합격증은 이제 보물 제725호로 지정되어 마을 한가운데 귀문각(龜文閣)에 자리하고 있다.
한 여인의 흔들이지 않는 신념이 역사가 되어 내 앞에 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신념도 명확한 입장도 없이 하루하루 그저 물흐르 듯 살아가는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행적이다. 그 사이 버스는 좁은 길을 위태롭게 건너 장구목에 닿는다. 이곳의 풍경은 유장하다. 물결치는 대로 무늬가 되어 오목하고 볼록하게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진 바위와 바위.
빼어난 경치 덕에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배경이 되었다는 이곳 장구목에서 가족사진을 찍는다. 누군가 건네는 찰진 밤 한 톨. 2004년 가을, 지금 이 시간 같은 공간속에 있는 일행들과의 인연이 새삼 각별하다.
이번엔 동계장이다. 강진이나 동계나 한숨에 둘러볼 정도로 장터는 좁다. 두리번 거리다 눈길 머무는 곳은 장 귀퉁이에 들어선 잡화상. 오래 전에 사라진 나무궤짝을 쌓아 진열장으로 쓰고 있다. 아버지는 나무궤짝에 켜켜이 지푸라기를 채워 복숭아를 담으셨다. 외할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복숭아를 유난히 좋아하셨던 장모를 위해 세심하게 크고 좋은 복숭아를 골라 담던 막내사위는 이제 고희를 넘기셨다. 쌓아올려진 나무궤짝 중 혹여 아버지가 챙기시던 그 복숭아 상자가 있지 않을까. 자꾸 궤짝사이로 외할머니의 복숭아가 어른거린다.
여태 팔리지 않고 남은 다이알 비누부터 제비표 성냥까지 그냥 구경만 해도 이야기가 쏟아지는 물건들이 그득하다. 일행중 한명은 두터운 솜버선을 집는다. 할머니가 행여 동상 걸릴까 발에 씌워주시던 솜버선을 여기에서 만났다고 벌써 어린시절로 돌아가 있다.
일행중 어떤 부부는 아예 좌판 한 켠에 벌어진 점심상에 끼어 앉는다. 한술 뜨고 가라는 아줌마들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인 모양이다. 좋아 보인다.
순창군 입구에 서 있는 장승을 본다. 둥글둥글 인자한 분위기에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장승은 순창사람들을 닮았다 한다. 그래, 그걸 만들고 세운 사람들의 마음이겠지. 무섭게 우뚝서서 마을을 지키기 보다는 반갑고 기뻐서 찾아오는 이를 넉넉하게 반기는 순창 사람들의 마음이겠지.
1759년에 건립된 순창객사는 지금은 초등학교의 일부처럼 남아있다. 학교건물을 새로 짓기 전에는 도서실이며 교실로도 쓰였다고 한다. 현재는 정당(正堂)과 동재(東齋)만 남아있지만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을 때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켜 항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옥천교를 건너면 순창향교가 있다. 전주 향교를 지척에 두고도 향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니 이흥재 선생님의 설명에 한참 귀 기울인다. 아직 글씨도 쓸줄 모르는 우진이가 제 목에 건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인다. 새로운 곳에 도착할 때마다 열심히 기록하는 일행들의 모습이 제 눈에도 멋져보였나 보다.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이며 공자와 우리나라의 18현을 배향하고 있는 대성전의 내력을 듣고서야 향교의 정신을 만난다. 역사를 느끼는 일은 쉽지 않다. 아는 것이 없으니 감동은 쉬이 내 곁에 오지 않고 시험을 대비해서 외운 몇 가지 지식은 역사를 이해하는데 오히려 해가 된다. 동기와 원인 흐름을 덮어두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역사는 편협한 사고를 부른다.
신말주의 귀래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권과 신권의 다툼 속에서 세조반정의 역사를 한마디로 단언해서 설명한다는 일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역사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다가온다. 역사를 보는 시각을 갖는 것. 그것을 역사시간에 배웠어야 했는데 이제는 아쉽게나마 호기심을 챙길 수밖에 없다.
팔덕면의 남근석을 바라보며 이흥재 선생님은 남근석의 형태나 역사적인 배경, 학술적인 가치에만 빠지지 말고 그것을 세웠던 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라고 권한다. 아주 오래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마을 입구에 세울 상징물 하나를 논의했을 것이다. 모양새며 크기와 위치, 적합한 소재를 고민했을 터이다.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십시일반 역할을 나눴을 것이고 마침내 마을 입구 남근석을 세우던 날 온 마을은 축제분위기로 들떴으리라.
내가 아는 우리 지역의 노장은 혁명보다 개혁이 힘들다는 말로 이 시대의 힘겨운 상황을 대변했다. 지금 산적해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이 어디 쉽게 풀리겠는가마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은 덜 모인 까닭인지 개혁의 물꼬는 쉽게 터지지 않는다. 장터와 더불어 순창 곳곳의 역사를 호흡하면서 역사로 남은 일상의 힘을 생각한다.
오늘 하루 아직은 온전치 못한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가을바람에 두둥실 나의 딸과 아들, 우진이와 현우가 살아갈 이 땅의 기운을 확인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하루하루를 싱싱하게 기운차게 당당하게 채울 것을 스스로에게 주문한다. 백제기행이 내게 준 선물, 훗날 역사가 될 일상의 가치를 깨우친 덕이다.
조희숙 |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전주KBS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개방형 전문직으로 전주시 문화관광과 문화정책 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