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4 | [문화저널]
<제93회 백제기행>佛國에 닿으려는 안타까운 꿈과 현실적 욕망 사이
박물관을 통해 보는 역사·문화기행 (경주일대)
이재규 CBS전북방송 생방송 ‘사람과사람’ 진행자
(2005-01-25 16:10:03)
또 늦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길 기다려 점심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부랴부랴 나섰건만 이번에도 버스 맨 뒷자리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타보신 분은 알겠지만 관광버스 맨 뒷좌석은 쉼 없이 귀를 울리는 주행 소음과 줄기차게 덜컹대는 진동이 장난이 아니다. 때문에 일단 자리를 배정받은 이상, 쾌적한 여행은 일치감치 포기하는 것이 마음이라도 편하게 갖는 방법일 터. 우리 가족은 일단 그렇게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에서 1박2일의 외출을 시작하기로 했다.
90회 운주사-소쇄원 가족여행 이후 여섯 달 만에 나선 백제기행. 이번엔 경주다. ‘경주’하면 조건반사처럼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던가. 아 신라의 밤이여, 가수 현인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 불국사, 석굴암 우편엽서 사진이 몇 컷 지나가고 인솔교사 따라 줄줄이 이어지던 고단한 수학여행길이 낡은 영사기에서 흘러나온다. 아, 또 하나 있었지. 경주이씨 익재공파. 준비 없이 떠난 여행처럼 평생 내 발목을 잡아채던 우리 집 가계도의 맨 위쪽 성씨의 본향이 경주였던 것이다.
“박혁거세와 함께 신라를 건국한 알평님이 우리 시조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또랑또랑 이어가던 아들 지호는 지금 5시간이 넘는 장거리 여행에 지쳐 잠이 들었다.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라는 지금, 전주와 경주는 그만큼 멀었다.
성씨야 내 선택과 무관한 것이고, 세상으로 걸어 나온 뒤로 내게 신라 경주는 적향(敵鄕)이다. 언제 섞여졌을지는 모르지만 내 핏줄에 백제 전라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 하나를 버릴 수 없는 자부심으로 알고 살아왔었다. 전남 광주에서 태를 묻고 철없이 뛰어다니던 10대를 마감한 후 동학의 고장 전북에서 시퍼렇게 젊은 날 대부분을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보냈다. 전남을 출생으로, 전북인으로 20년을 넘게 살아온 내 의식의 족보에서 전라도-백제라는 말은 떼어놓을 수 없는 동의어이다. 정치평론가들이 자기 집 젓가락처럼 즐겨 쓰는 지역주의, 지역감정과는 좀 다른 종자의 것이겠으나 아무튼 내 머릿속에서 뭔가를 의식한 뒤로 여러 번의 정치국면에서 ‘영남’- 신라인은 영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백제기행- 백제의 아픔과 슬픈 역사의 섭리를 넘어서는 진정함을 찾아 떠나는 길, 서러운 꿈 하나 흘려놓고 간 백제가 간직한 아픔과 회한을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과 떠나는 길>
백제기행 안내문에 나오는 글귀처럼 서러운 꿈 하나 흘려놓고 무너진 백제와 대비되어 지금도 영속하고 있는 신라의 본향, 경주를 향해 가고 있노라니 황산벌 거시기들이 적진의 한복판으로 변변한 무장도 갖추지 못한 채 걸어가는 그런 기분이었다면 이해가 되실까.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니 낮은 기와집들이 눈에 띈다. 경주를 보존하고자 하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의해 발이 묶인 경주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고 하지만,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의 눈길로는 그저 그만한 다른 도시들에 비해 경주다움을 첫머리에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다.
경주기행의 첫 도착지는 감은사지 탑이다. 봄 산과 들녘을 배경으로 고즈넉이 서 있는 두 개의 탑신은 막 어두워진 주위 풍광과 어울려 참 보기 좋았다. 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이룬 뒤 부처의 힘으로 왜구를 막고자 세운 절로 아들이 신문왕이 완성했다고 한다. 터만 남은 금당의 지하에는 바다용이 된 문무왕의 휴식을 위해 만든 상징적인 공간과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 바다쪽으로 난 통로가 이채롭다. 석탑 끝의 모서리 처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 품이 단순하면서도 상당히 세련된 멋을 준 것이라는 조법종 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사위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에 도착한 탓인지 문무왕릉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해변에서 약 2백 미터 앞쪽에 있는 문무왕 수중릉만 아니었다면 이곳도 여느 평범한 동해바다처럼 그저 좋은 풍광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인근의 파도소리 민박에 짐을 풀었다. 경상도 음식은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입맛에 맞았다. 민박집 솔숲 한 켠에 마련한 모닥불에서 구워낸 고구마 맛이 아니었다면 경주의 밤은 너무 스산했을 것이다.
아침 일정을 서둘러 도착한 곳은 장항리 절터.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서 대왕암이 있는 동해를 바라보며 동쪽으로 내려온 산줄기에 쓸쓸하고도 적막한 절터가 하나, 절 이름도 전하지 않아 지명을 따서 장항리에 있는 절이라 하여 ‘장항사’ 혹은 ‘탑정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현재 금당터 오른 쪽으로 두 탑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은 1923년 사리를 탐낸 도괴범의 소행 때문으로 도괴범에 의해 탑이 폭파된 후 그 잔재가 대종천에 방치되었다가 1966년에 수습되어 현재의 자리에 놓였다고 한다. 탑 한쪽 불상대좌에 남아 있는 인왕상 조각은 자세가 독특해 사람의 눈길을 끈다. ‘참 좋은 날씨다’를 연발하며 우리는 그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경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석굴암(국보 제24호,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해발 565m 소재)은 8세기 중엽인 경덕왕 10년(A.D 751)에 당시 신라 재상(시중)이던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동굴사원이다. 삼국유사(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세계에 여러 동굴사원이 있지만 자연 암벽을 직접 뚫지 않고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든 독특한 건축법은 세계의 자랑거리이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여름철이 되면 항상 동해 해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동해의 고온다습한 공기가 석굴 내부로 들어와 내부의 차가운 벽면과 만나면 물방울을 맺게 돼(결로현상) 내부의 많은 조상들이 심한 풍화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당시 신라인들은 석굴암 바닥으로 항상 영상 9도에서 13도가 되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게 하였다. 내부로 들어온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 차가운 바닥에 습기를 빼앗겨 버리고 내부 벽면은 항상 건조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1200년을 유지해온 석굴암의 자연 제습장치는 1913년 일제의 무분별한 수리공사로 큰 손상을 입었다. 광창과 감실의 작은 구멍들도 두터운 콘크리트 외벽에 의해 사라졌는데 박정희 정부 때 제2차 수리공사에서도 바로잡지 못했다고 한다.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다고 쳐놓은 유리벽 때문에 천년의 시간을 넘어 경외심을 자아내는 그 자연조화의 건축물을 직접 만져보지는 못했다.
불국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장엄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화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로 전해진다. 뛰어난 불교문화재 뿐만 아니라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어 한국불교의 지혜의 맥을 이어가는 중심적인 수행처이기도 하다.
불국사를 처음 찾았던 때가 중학생였던가. 동무들과 떼로 몰려다니며 문화기행 보다는 노는 데 정신이 팔렸던 기억, <신라의 달밤>이란 영화에서처럼 수학여행에서 마주치는 다른 학교 또래 애들과의 기 싸움에 정신 쓰느라 불국은 관심 없는 남의 나라 일이었다.
사진에 많이 등장하는 청운교, 백운교를 직접 보니 사진보다 폼은 덜 나지만 참 잘 지어진 건축물이란 생각이 든다. 현존하는 신라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다리로 두 개의 돌다리가 45도의 경사로 높다랗게 걸려 있다. 보호를 위해 현재는 출입이 통제된 상태여서 다리 아래의 사바세계와 다리 위의 부처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불국과 인국의 경계에 서있는 이 다리를 직접 걸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다보탑. 국보 제20호. 높이 10.4미터의 이 작은 탑은 아마도 우리 불교 문화재 가운데 가장 유명할 것이다.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져 유명세를 얻은 대신 너무도 흔해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이 탑은 1987년 선거전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을 위해 다보탑 안에 뭔가를 새겨 넣었다는 ‘설’이 나돌았던 것으로 다시 세상밖에 나왔다. 실제 10원짜리를 꺼내 비교해 보자니 1971년 동전은 옆면으로 다보탑 모형이 새겨져 석탑 갑석 위에 사자가 보이지 않는데 비해 1987년 이후 주조된 동전에는 사자 한 마리가 계단 중앙에 턱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원래는 각 귀퉁이에 네 마리이던 것이 일본으로 반출되고 없어지고 해서 한 마리만 남아 지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백제의 공인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이야기로 유명한 석가탑은 화려한 다보탑과 비교하니 더욱 간결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조법종 교수의 해설이 곁들여지는 가운데 대웅전과 비로전의 부처를 보니 다양한 포즈의 부처상이 보여주는 사인을 이해하게 됐다. 부처님의 수인(手印)은 각 사찰과 전각마다 각기 다른 모양을 취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설법·항마·성도의 상징적 표현인 이 수인은 위와 아래, 중간 어디에 놓이냐에 따라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하품하생(下品下生)까지 다양한 변주가 있다고 한다. 사람의 깨달음을 위해 각자가 처한 조건과 준비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방편을 준비하는 부처의 현실주의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어느 산자락, 절터에 가봐도 돌부처의 코는 사람의 손을 타 뭉개져 있다. 자손을 보고자 하는 여인네들이 속설에 따라 부처의 코를 문지르거나 코 부분 석물을 떼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상과 수인이 상징하는 높은 경지의 깨달음과 현실에서 자손을 얻고자 하는 기복신앙이 부처 몸 하나에서 통일되어 있는 모습에서 佛國에 닿으려는 속인의 안타까운 꿈과 현실적 욕망 사이의 갈등이 바로 오늘의 일인 듯 절실하게 다가왔다.
불국사를 나와 왕릉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우리 일행은 남산과 박물관 팀으로 갈라졌다. 우리 가족은 다른 몇 분과 함께 박물관 쪽을 택했다.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라는 서라벌의 진산, 남산을 오르지 못하는 아쉬움은 컸지만 아이들 핑계로 몸을 쉴 수 있다는 안도감도 들긴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가기 전 왕릉과 계림을 만났다. 넓은 초지에서 사람들이 봄볕을 즐기는 모양이 보기 좋았다. 수천 평에 펼쳐진 유채꽃밭도 인상적이었다. 유채는 멀리서 집단으로 보기에 좋은 꽃이지 가까이 다가서면 노란색이 주는 자극이 별 효과가 없어지는 군락형의 꽃이기도 하다.
첨성대를 발견한 아이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뛰어간다. 고대 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인 첨성대에 대하여서는 천문사상과 지식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건물이니, 불교의 영향을 받은 제단이니, 도시계획의 기준점적 축조물이니, 실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화강석 석재 365개를 쌓아올린 술병형 건축물을 가까이서 처음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에게, 이렇게 작아’였다.
이제 경주박물관. 고고관에서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유물과 고분에서 출토된 수많은 부장품들을 만났다. 역사책에서 보던 민무늬토기, 금관 앞에서 우리 딸 지수는 환호했다. 책에 나온 것을 실물로 확인하는 기쁨은 남다르겠지.
왕경을 중심으로 찬란하고 화려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유물, 반가사유상, 금속공예품에 553년에 창건돼 1238년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황룡사 모형도 인상적이었다. 박물관 뜰에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범종인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직접 대하는 즐거움도 작지 않았다. “아빠, 근데 왜 종에다가 어린아이를 집어 넣었을까. 부처님은 자비를 베푼다면서?” “?? !!”
남산팀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박물관을 나서는데 후드득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바쁜 와중에도 조교수님이 특별 부탁한 경주 황남빵을 사기위해 잠시 택시를 세웠다. 수십 명의 종업원이 수작업으로만 생산하는 황남빵은 바로 인근에 경주빵집 등 아류작들을 여럿 낳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정작 입에 넣고 기대했던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2, 3개를 먹으면 이내 질리고 마는 달작지근한 단팥빵 하나를 브랜드화하는 전략만은 배워야 할 듯.
사족 ) 혹시라도 경주에서 택시를 탈 땐 조심하시길. 전주시내라면 3천원 정도면 충분할 요금이 9천원이 넘게 나왔다. 혹 우리가 탄 택시가 미터계가 잘못되었던가 다른 동행에게 물으니 거기도 비슷했다고 한다. 경주는 거리 산정과 미터당 요금체계가 다르다는 설명.
고단한 몸을 차에 뉘이고 또 다시 다섯 시간을 시달리며 백제 경계로 넘어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전주 시내를 축축히 적셔가는 비의 환영인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각자의 정든 집, 백제의 작은 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적향에서 챙겨온 별다른 전리품도 없이, 무너진 부처의 코와 ‘이렇게 하면 알아듣겠냐’ 적당히 지친 표정으로 수인을 보내오는 부처의 손가락만을 그곳에 남겨둔 채, 적당히 피곤한 몸으로 우리는 무너진 백제의 한 귀퉁이에서 오래오래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