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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 | [문화저널]
<제89회 백제기행>마음 속으로 들어온 ‘안도 타다오’천년세월을 넘어 만나는 백제문화의 원류Ⅲ‘일본’편
이현배 손내 옹기장이 (2005-01-25 16:06:35)
■ 첫째날 이게 뭐야. 너무 싱겁잖어. 아니 비행기를 타는 건데 적어도 짜던지 맵던지 해야 하는 거 아냐. 꼭 첫경험 때처럼 너무나 허망하잖어. 아프리카,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길이 아니기 때문일까? 천년을 훨씬 더 소급하여 백제문화의 원형을, 그것도 일본땅으로 찾아나선 허무맹랑한 행위 때문일까? 내 어려서는 시골버스에도 있던 안내양, 나중에는 고속버스에 남았다가 나의 생활권으로 사라진 안내양,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풍경이 비행기 안에는 있더라는 거 말고 너무 싱겁게 비행기를 타봤다. 이천삼년 팔월육일 수요일에. ‘여태껏 나는 비행기를 못 타 봤다.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뜨거운 대륙 위에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는 킬리만자로. 그 산의 모순을 오르고 싶은 거다’(이천삼년 사월) 인공섬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바다를 본다. 바다를 눈 앞에 두고 ‘저건 바다가 아니야!’한다. 산중놈에게 바다는 이미 그 어떤 상징이 되었나보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감흥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예 노골적인 바다를 대하게 되니 주체를 못하여 부정을 하게 된다. 일본이야, 일본인거야. 왕인박사의 묘, 백제왕신사. 백제, 백제는 나에게 무엇인가? 서울 살 때, 몸살을 앓았던 이십대 때 부여를 자주 찾았다. 겨울날 백마강의 적막감에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 또 신동엽님의 시 ‘금강’이 그랬다. 그러고는 일부러 외면하기까지 했던 백제. 일본땅에서 알 수 없는 말 들 중에 ‘백제’라는 글귀를 보게 되고 백제에 대한 얘기를 듣자니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그 무엇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백제. ■ 둘째날 내가 왜 이래? 일행에서 살짝 빠져나와 혼자가 된 건데 그 어떤 끈을 놓고 나니 오히려 편안한 거. 오 분 아님 십 분의 여유에 골목길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조여 오는 그 어떤 기운에 오히려 자유로운 이거. 이게 뭐야? 도대체 이건 뭐야? 낯설지가 않아, 새롭지가 않아. 그런 나를 나는 가게에다 넣어 뒀다. 길 건너 조법종 교수님의 애타는 손짓, 택시로 일행에 복귀. 야유. 이후 나는 인원점검표. 광륭사의 ‘반가사유상’. 일본의 국보 일호, 한국의 국보 삼십 팔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우거지상과 크게 대비되는 살떨리는 미소. 생각이 끊기고, 한 발을 마저 땅에 내딛으며 과연 이 땅에서 그 어떤 삶을 살고자 했을까? 어찌 그 세계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았을까? 이 땅에서 나는 그 세계를 무한히 갈망하건만, 그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으련만. 더 살아지는 삶이 있었나보다. 그렇지 삶이란 사는 거지, 살면 살아지는 게 삶이지. 그 삶이 사람이지. 그렇지만 사람은 다 달라. 동본원사가 그랬다. 청수사도 그랬다. 크다, 클 뿐이다. 나의 범주를 벗어난 그저 클 뿐이다. 내용은 심심하다. 다르게 작은 걸 작게 만든 네네의 길. 나는 다시 담담해졌다. ■ 셋째날 법륭사에 들어서는데 이제사 된장 맛이 나는 거야. 내가 뭐 절을 알아, 불상을 알아. 아예 불교를 잘 모르는데. 그동안 몇몇 절을 다녔지만 집 떠나 사흘째, 뭔가 좀 칼칼하고 구수한 맛이 그리웠는데 법륭사에 들어서니 된장 맛이 나는 거야. 담징의 벽화? 나 그거 모르겠어. 실망하며 뒤처져 가는데 전시물 중에 나도 모르게 칼 앞에 서게 된거야. ‘칠성검’ 그리고 다시 ‘백제관음상’. ‘칠성검’에서 부처님을 봤고 ‘백제관음상’에서 칼을 봤으니 참으로 묘한 일이다. 난생 처음의 먼 여행을 나서면서 여행에 서툰 사람으로 가슴에 뭐 하나만 담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싶었다. 그래 사진기 없이 나섰드랬는데 기행문을 쓰라 한다. 그래 이렇게 쓰고 있지만 내 ‘칠성검’과 ‘백제관음상’에 대해 더는 언급을 못하겠다. 어떻게든 덧없이 부족하니 말이다. ■ 넷째날 아 ‘안도 타다오’. 십 년이 넘었구나. 자리를 잡는다고 돌아다니다 정여립 장군의 본거지였다는 죽도. 그 죽도 가깝게, 솔이실. 솔이실 맨 끝집 귀틀집이 좋아 보여 주인 할머니께 “집이 참 좋네요” 했더니 손사레를 치며 “무슨, 석 달 살려고 지었는데 삼십 년을 살았어” 하신다. 그러고는 그 말씀과 그 집이 나에게 건축미학이 되었다. 그 뒤로 이삼년 지나 같은 느낌의 집을 동숭동 대학로에서 보게 되었다. ‘대학로 문화공간’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승효상 선생의 설계. 그리고 다시 이삼년 지나 이가솜씨 이선생님께 건축을 해보란 소릴 들었다. ‘십년을 입어도 일 년 된 듯한, 일년을 입어도 십 년 된 듯한’하는 신사복 카피를 만드신 분인데 작으마한 책을 보여주시며 세계적인 건축가인데 복싱선수 출신으로 건축을 독학했다는. 그러나 이름은 내 듣고도 기억을 못하는. 그러다 얼마 전 다시 이선생님께 그 건축가가 ‘안도 타다오’고 노출콘크리트 공법을 세상에 내놓은 이라고 들었드랬다. 그 안도 타다오의 ‘도판 명화의 정원’과 고베에서 ‘미술관’. 살아서 알아진 삶을 정직하게 담아 내는 설계. 그런 그에게 콘크리트는 그냥 콘크리트야, 그래 노출콘크리트. 그이는 당신의 삶에 정직했던 거야. 그건 위대한 거지. 일본, 큰 나라다. 내 다른 건 모르겠고 안도 타다오, 딱 이 한 사람의 건축가만으로도 큰 나라다. ■ 마지막 날 오사카성. 성벽이 이미 칼질 형상이다. 같은 형상을 전통가옥 지붕에서 봤는데 오사카성 성벽에서 또 보게 된 것이다. 비바람을 피하려는 지붕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아성을 지키려던 성벽이 칼이 그리는 선을 따른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성과 담을 이렇게 공부했다. ‘성이란 들어갈 수는 있으나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것이요, 담이란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올 수 있는 것이다’라고. 그러니 성벽을 넘었다면 죽기 아니면 살기의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 원두막에서는 지혜로 나갈 길을 내둔다는 말이 있다. 도둑(?)더러 볼 일 보고 조용히 돌아가라는 얘기다. 아님 과일 몇 개에 쑥대밭이 되니 말이다. 책을 샀다. 우리는 담을 쌓고 그들은 성을 쌓았던 게 이제 내 마음에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성을 쌓았던 게 아니었나’하는 반성을 하게 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세 권인데 미술관에서 안도 타다오의 ‘건축’, 헌책방에서 ‘다실’,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의 문화’였다. 이것은 ‘다실’을 통해 그들의 공간의식과 그 의식을 어떻게 채웠나 하는 ‘히데요시의 문화’ 그리고 채우려 하는가(안도 타다오의 ‘건축’)를 알고 싶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차에서 내리려는데 인사 한마디하고 내리라 한다. ‘택시 혼자만 탄 거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고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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