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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 | [문화저널]
<제 78회 백제기행>천년 세월을 넘어 만나는 백제문화를 찾아 _ 일본
박선희/전주 기전여중 교사 (2005-01-25 15:59:16)
마침내(?) 역사적인 아침을 맞았다. 모두가 잠든 새벽 공기를 가르며 어슴프레 동이 트기 전 만남의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제법 경쾌하다.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운 이 때에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전주의 새벽을, 만해 선생이 백담사에서 맞은 ‘임의 침묵’ 탈고의 순간과 버금간다고 말한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일까?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이 아침이 참으로 새롭다 못해 비장(?)하다. 늦은 결혼으로 그 동안 혼자만의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었고, 답답하게도 해외여행만은 사랑하는 그이와 함께 동행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나의 지론이 그 동안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했었다. 김해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들뜸과 미지의 땅을 향한 초조함이 적당히 교차하고 있었다. 나 혼자였기에 둘, 셋씩 짝을 이루고 백제기행에 참여한 이들을 부럽게 바라보노라니 벌써부터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민다. 이런 것이 인연일까? 얼떨결에 내 옆자리에 앉은 이가 방 배정표의 룸메이트와 일치한지라, 출발부터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김해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스키마 제공용 비디오 두 편을 보았다. 조법종 교수님이 준비 해 오신 것이다. 백제기행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조법종 교수님의 준비성과 성실성은 역시 탁월하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비디오를 보면서 잠을 자다 깨다 하니 어느 새 김해공항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반가운 두 분을 만났다. 4박 5일 동안 우리들의 일본기행을 알곡으로 꽉꽉 채워주신 인제대 이영식 교수님이 그 한 분이고, 무엇이라 형언하기 어렵지만, 상업화되지 않고 질박함이 묻어나는,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던 가이드 이분우 씨였다. 기내식 쥬스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눈 깜짝할 사이도 없이 후쿠오카 공항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난다. 공항 밖에 대기한 버스의 승차 입구와 운전석 위치(우리나라와 반대)만 빼면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풍경들을 보며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우리나라 자동차 문화에 익숙해진 탓일까? 자동차 구조의 뒤바뀜으로 우리는 자꾸만 부딪힐(?) 것 같은 자동차들을 보며 한 동안 불안해해야만 했다. 이치닌 마에(一人前)-한사람 앞에 하나씩 음식상을 차려놓고 먹음-라던가, 마치 소꿉놀이를 하듯 작고 예쁜 그릇에 참새 눈꼽(?) 만큼도 안 되는 음식을 담아 놓고 정갈함으로 치장한 일본음식은, 푸짐한 찌개 그릇에 오순도순 퍼 먹는 우리네 음식상과는 느낌이 정말 다르다. 일본인들의 정서가 ‘이치닌 마에’ 속에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몫을 다 할 수 있는 사회적 책임감이 경제대국 일본을 만들었고, 자신의 몫을 다 하지 못하는 사람을 용납지 못하는 일본사회가 이지메를 가장 두려워하는 사회로 만들어, 개인보다는 국가와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풍조를 형성했던 것 같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우리네 구조와는 정말 다르다. 식사 때마다 나오는 가지는 잘 구운 생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일본의 독특한 가지요리였다. 우리가 보았던 가지보다 훨씬 크고 통통한 가지에 양념을 해서 쪄 낸 음식인데 색깔의 독특함 때문에 모두들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잘 먹었다. 일본음식은 대체로 싱겁고 달작지근하영 맵고 짠 맛에 익숙한 우리의 식욕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따뜻한 녹차가 있어 식사 때마다 음식을 먹긴 먹어도 어쩐지 허전한(?) 우리들을 감싸주었다. 화장실 문화 역시 일본인 특유의 검소함과 절약정신이 잘 느껴지는 곳이었다. 작은 공간을 활용하는 그들에게서 조잡(?)하다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그들의 좋은 점을 좀 더 배워야겠다는 다짐이 많아졌다. 큐슈의 여름은 무덥고 습했다. 무더위를 가르며 다자이후(太宰府) 방위 시설의 하나로 쌓아진 오노 산성에 오르니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발밑에 있다. 오노 산성은 백제 귀족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백제의 산성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군사외교의 전담기관이었던 다자이후를 방위하기 위해 축성했던 성이다. 다자이후 유적지의 광활함은 터만 남아 세월의 무상감을 느끼게 했으나, 그 규모의 방대함과 함께 넓은 공간이 깨끗이 보존되고 있어서 또 한 번 감탄했다. “좋은 것은 기꺼이 취한다(이이도코토리)”는 일본은 종교도 많고 신도 많고 귀신도 많은 나라라더니 다자이후의 천만궁에 가 보니 정말 그러했다. 여기저기 소원을 적어 비는 종이쪽지들이 바람결에 춤추는 모습들을 보니 마치 무속촌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일본은 덥고 습해서 가는 곳마다 땀으로 목욕을 해야만 했다. 옹관묘를 원 없이 볼 수 있었던 야요이 시대인의 공동묘지인 카네노크마 유적이나 야구장 펜스공사를 하다 발굴되었다는 외국사절의 접대를 전담했던 기관의 유적지인 코오로칸 전시관이 그랬다. 유적지의 보존을 위해 에어컨 시설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끈적끈적한 더위 이상의 열기로 우리는 조금이라도 놓칠새라 관장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정적으로 임하여 더위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일본특유의 고분형태인 전방후원(前方後園)-열쇠구멍 같은 모양-형의 치부산 고분등을 돌아보며 백제의 석실 축조술과 고구려의 벽화장식과 같은 특징들도 보았다. 오시노가리 유적지는 웅장한 규모의 환호취락(야요이 후기, 2~3세기)과 망루터나 저장창고 등이 고대국가 성립을 짐작케 한다. 지금은 애초의 공단조성 계획을 과감히 포기하고 문화유산의 보존과 함께 관광자원으로 개발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오시노가리 유적을 보고 “오시노가리는 역시 노가리야”라고 우스개 소리를 해대며 작은 것 하나도 자긍심으로 받아들이고 기를 쓰며 최고의 것으로 보여주려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나고야성 유적지를 오르는 우리들은 더위에 지쳐있기도 했지만, 1592년(선조 25년)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까지도 침략하려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욕의 전진기지였던 나고야성 박물관이 위엄을 갖추고 보란 듯이 정비되어 있음에 기가 질려 맥이 풀렸다. 물론 그들은 나고야성 박물관에 ‘벼 경작과 금속문화의 도래’로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문화의 영향을 주제로 여러 유물들을 진열하는 치밀함을 통하여 그들의 침략의 역사를 교묘하게 치장하는 화려함도 과시하고 있었다. 나고야성 박물관에서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거북선 모형을 대하니 감개무량이다. 나고야성터 어디에서도 침략의 역사는 느낄 수 없었고 살랑이는 바람결에 우리 모두는 멀리 현해탄이라도 보일까 까치발을 해댔다. 사세보에서의 밤은 평소 온천을 좋아하는 나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노천욕 내지는 혼탕에 대한 관심이 우리 일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표출되었지만 호텔에 딸린 작은 온천탕에서의 온천욕은 오래오래 흡족함으로 남아있다. 난생 처음 입어 보는 유까타를 입고 룸메이트와 서로의 낯선 모습에 히히덕거리며 카메라를 누르는 기쁨과 일본고유의 타타미 방에서의 하룻밤 잠자리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우리나라가 석탑(석탑)의 나라, 중국이 전탑(전탑)의 나라라면, 일본은 목탑(목탑)의 나라로 불리운다고 한다. 목조를 근본으로 하는 일본의 건축과 공예라는 풍토 속에서 석불이 무리를 지어 늘어서 있는 우스키 석불군은 나에게는 무척 놀라운 광경이었다. 우리나라의 운주사나 경주남산과 같은 분위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혹자가 말하였으나, 불행히도 나는 아직 그곳에 가보지 않았기에 경주남산에 대한 추억거리가 없음에 무척 후회도 하고 언젠가 꼭 가 봐야겠다는 다짐도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오늘까지도 내 가슴에 여울진 풍경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삼평도조신사 견학과 아리타 도자기 문화가 숨쉬는 아리타 거리인 것 같다. 일본에는 ‘쿠다라마이’-백제 것이 아닌 것은 시시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그들에게 도자기 문화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전수해 준 백제인에 대해 끝없는 감사와 함께 신봉에 가까운 우러름이 있음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분명 아리타의 도자기는 백제인 이삼평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일본인들이 오늘 날 세계적으로 이름난 일본 특유의 아리타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음도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될 귀중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메모라도 남겨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곳은 아소산 관광이었다. 아소산 언저리에서 생옥수수를 사 준다는 가이드의 말 때문이었는지 아소산 관광은 출발부터 굉장히 설레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바람 때문에 아소산 분화구의 입장을 통제한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모두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평생에 언제 또 아소산까지 올까 싶은 생각이 드니 안타까움은 더 컸다. 눈덩이만한 아쉬움을 안고 되돌아가는 버스 안에 갑자기 희색이 도는가 싶더니 이내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얄미운 바람이 우리를 위해 잠시 멈춰 주었다고. 왜 나는 검붉은 핏빛이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아소산 분화구만을 상상했던 것일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른다. 옥빛이라고 할까? 아니면 고려자기의 영청빛이라 할까? 그 투명함 속에 끓어오르는 것들은 분명 ‘나무꾼과 선녀들’에 나오는 선녀들이 목욕했음직한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정경에 넋을 놓고 탐을 내서일까? 얄미운 바람이 살짝 부는가 싶더니 알싸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숨이 컥컥 막힌다. 질식사(?)할까 두려워-실제로 작년에 질식사한 이가 있었다 함- 서둘러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니 가이드 이분우 씨가 아소산의 명물 중에 하나인 생옥수수를 내민다. 아삭아삭 아소산의 전설을 말하는 양 씹혀지는 아소산의 생옥수수, 아! 먹고 싶어라. 벳푸는 아소산과 너무도 달랐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증기가 솟아 나와 도시 전체가 마치 고장난 커다란 보일러실 같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잘 다듬어진 지고프(바다지옥) 주변의 정원과 정원 속에 피어난 원색적인 수련의 모습이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했다. 손 내밀면 금방 닿을 것 같은 벳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뛰어 들어가 온천욕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한다. 모처럼 자유인으로 돌아가 나만의 시간 속에 새겨진 일본. 일본 열도 중에 하나인 큐슈, 그것도 큐슈의 극히 일부분을 보고 일본은 어떤 나라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일본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백제인의 온화하고도 지혜로운 미소를 언뜻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아울러 두고 온 내 나라의 소중한 것들과 그리운 사람들을 추억하며 되돌아온 내 삶 속에서 순간순간 보고 느낀 그날의 기억의 파편들이 반짝이는 별이 되어, 나도 모르게 내 삶의 순간순간마다 황홀한 빛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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