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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 | [문화저널]
<제74회 백제기행> ‘강따라 삶따라, 강마을 사람들의 삶-자연에 얼크러져 흐르는 토종의 물결 ‘영산강’
정 훈 전북대 철학과 4학년 (2005-01-25 15:56:24)
끝도 시작도 없는 영산강 12월 동지를 얼마 앞둔 어느 날. 어른들 일색일 줄 알았던 버스안에는 초등학교에 다닐법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었다. 특별히 고향땅을 밟아보고자 동행하기로 한 박남준 시인만이, 모악산 자락에서 시내로 나오는 버스가 없어서인지 늦게 도착했지만 발만 동동 구르던 일행들은 마냥 기쁘기만 했다. 전주를 벗어나자마자 겨울 억새들이 가뭇가뭇 보이더니 영산강가에 다다라서는 그 몇 곱절이나 될 만큼 많은 그것들이 겨울바람에 제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산사의 어미억새는 새끼억새가 다 자랄 때까지 버팀대 노릇을 하다가 늦여름에서야 꺾어진다는데, 강가의 억새는 목마름에 흐들거릴 뿐이었다. 가는 도중 내내 山&#8228;江&#8228;人 으로 만들었다는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며 우리가 답사할 영산강 유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설명을 듣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에서 계절과 무관한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연과 얼크러져 흐르는’ 영산강에는 남도땅 사람들의 한과 정, 삶과 역사가 녹아 흐른다. 저기 저 담양의 용추봉에서 시작하여 목말라하면 물을 내어주고, 배가 고프다면 물고기를 내어주며 한 평생을 살아왔다. 좀 더 잘 살아본다며 여기저기 파헤치는 인간의 이기심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에서 그저 흐르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 오를 뿐이다. 옹관속에 숨 죽인 역사 광주에서 나주로 들어가는 국도 1호선 북쪽 길가에 지역의 안정을 빌기 위하여 동문밖에 세웠다는 석당간을 지났쳤을 쯤인가, 도로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옹관묘터에는 아직도 발굴작업이 한창이다. 서남해안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잇는 옹관묘와 옹관석실묘, 전방후원분은 마한과 백제에 걸쳐 수세기동안 이용 되오던 우리나라 고유의 묘제문화다. 근자에 일본인들이 그들의 전방후원분과 짜맞춰‘임나일본부’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 고고학계가 여간 신경이 날카로운게 아니라고 한다. 대개 하천이나 해안에 인접한 구릉, 능선에 정상부에 위치한 이들 고분군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곳이나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규모나 부장품들도 특출한 것이 많으므로 주로 지배적인 인물을 매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단다. 겨울 노을이 한창일때 정읍 입암에 있는 백학농원 황토방 비슷하기도 하고 , 여는 시골마을에 있음직한 뒷동산 같기도 한 둥글고 커다란 무덤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었다. 덕산리에 도착해서는 그 품새가 어찌나 넉넉해 보이던지 일행 모두가 꼭대기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팔방이 평야와 낮은 구릉지대여서 해지기 전에 신촌리와 대안리 고분군을 보기 위해 자미산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자미산에 오르면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기대는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날이 저물어 옹관묘의 자태는 찾을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 알싸한 기억만이 아직도 남아 아쉬움을 달래준다. 게다가 백제시대에 축조됐다는 자미산성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믐달같은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만 한 장 찍고 하산했다. 이곳 일대는 일본열도와 중국반도를 연결해주는 지역으로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유적과 유물만 존재할 뿐 역사적 문헌이 전혀 없어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잇다. 이러한 틈에 강봉룡 교수 왈 “분명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백제나 倭나라가 아니라 ‘옹관고분사회’가 영산강과 바닷길을 따라 존재했다”며 자기만의 독특한 명명을 귀뜸해 준다. 그길로 곧바로 목포에 들어와 저녁식사를 후다닥 마치고서 목포문화원으로 갔다.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자마자 강교수의 ‘옹관고분사회’ 특강이 이어졌는데 그야말로 인공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정갈한 나물무침을 먹는 맛이었다. 인동주로 하나된 사람들 숙소에 여정을 대충 풀고 만남이 흥겨운 사람들이 다시 시내로 나왔다. 덩굴줄기 전체에 짧은 갈색 털이 나고 초여름에 잔 꽃이 핀다는 인동초. 그 인동덩굴로 빚은 인동주를 마시고 올라오는 취기만큼 모든게 깊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농선생에게 인동을 배웠다는 어느 화가의 멋들어진 노래(목포의 눈물)와 박시인의 자작시 한가락으로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렇게 하루는 갔다. 유달산, 기운센 늙은 산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많이 먹는 법이다. 노곤함을 잊고 숙소 바위 뒤에 우뚝이 서 있는 유달산을 올랐다. 목포의 내항과 외항, 삼학도, 노적봉 등이 말해 주듯이 질곡과 회한의 여정을 이곳 목포인들과 함께 한 것임에 틀림 없다. 짧은 생각에 모자를 눌러쓰긴 했지만 노련하게 귓불과 광대뼈를 쏘아오는 풍장군에게 나는 항상 노출되어있는 표적이 되고 만다. 손바닥을 비비며 내려와 아침을 해결하고 바다로 나갔다. 흔적을 낚는 곳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멍텅구리 배가 세월을 얘기해 주고, 얼핏 본 하늘색과 바다색이 어찌그리 닮았든지...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나와 알려지게 된 신안군 앞바다 해저 유물, 어디론지 항해마다 난파된 유물선 등이 발굴&#8228;복원을 거쳐 전시되어 있는 목포해양박물관. 이곳에서 전체를 관람하는 내내 관장님이 동행하면서 자칫 하나라도 놓칠새라 직접 설명 해 주었다. 또한 건물 자체가 바닷가에 한쪽 귀퉁이를 살짝 기대고 있어 밀물땐 물과 한몸으로, 썰물땐 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그리움으로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는 공부하러 박물관에 간다지만 나는 이곳에서 눈으로는 유물을 보고, 마음으로는 역사의 흔적을 낚은 셈이다. 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목포시 향토문화관은 이름만 그럴 듯 하지 속을 열어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소장품 모두가 기증자의 헌납으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예향전시관으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고, 소치&#8228;미산&#8228;남농으로 이어지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만 기억에 남는다. 만일 이쪽지역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들은 이곳에 들러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무튼 절대적으로 실망이다. 뾰족함이 후덕함으로 이어진 산 영암에 다 닿았을 때 월출산이 멀리서 보인다. 어떤 마음씨 고약한 산신이 그랬는지, 거친 세월만 줄곧 살아와서 그런지 제 몸둥아리를 왜 저리 만들어 놓았을까? 자고로 산은 지리산처럼 후덕한 육산과 설악산처럼 뾰족한 골산으로 나뉘는데 평야를 어우를 줄 아는 월출산은 한 눈에 후자임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살다보니 아주 이색적인 현수막을 볼 수 있었다. ‘월출산 도갑사에서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라는 글귀를. 매표소에서 돌담을 지나면 금방 도갑사 해탈문을 만난다. 국보 50호 임에도 불구하고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해탈문이 국보인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지만 문외한인 나는 그저 모를 일이다. 경내에 들어서 막상 계곡의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한 고급스런 돌다리와 일요일인데도 유물전시관의 문은 빗장을 풀지 못한 이 절에 심심한 유감을 표하고 급하게 돌아 섰다. 마침 도갑사에서 나오는 길에 조그마한 시골장이 열려 우리 일행이 끼니나 떼울까 해서 잠시 들렀지만 작은 규모여서인지 국밥 한 그릇 먹을 마당이 없었다. 급한대로 점심은 읍내로 들어 와 먹을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있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차밭이 흐드러져 잇는 월남사지터에 도착했다. 사찰의 흔적으 s사라지고 오직 탑만이 남아 세월을 얘기 해 준다. 어렸을 때는 이른바‘낙하산’이라고 하며 동네어귀나 뒷동산에서 가지고 놀던 박주가리를 보며 신기해하는 꼬마 녀석들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는데도 부여의 정림사탑을 모방하는 특성이 살아있는 점이 늘씬하고 텁텁한 풍모를 느낀다. 바로 이곳이 월남마을로 월출산자락에 감겨져 흐르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 안에 사는 몇 안되는 사람들 역시 뾰족한 꼭지처럼 모나지 않을까 했지만 전혀 조잡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차를 진하게 우려 마신 느낌이다. 갑자기 시간이 촉박해 졌다. 시간을 &#51922;아도 시원찮을 판에 그놈에게 &#51922;겨 기행하는 것 같아 한심했다. 월남리에서 강진쪽으로 나와 만난 무위사는 오래된 낡은 절집이었지만 분위기 하나만큼은 청아할 뿐이었다. 뻥뚫린 하늘이 그렇고, 극락전이 그렇고, 극락보전을 보기위해 대구에서 왔다는 어느 보살의 미소가 그렇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조선초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축으로 맞배지붕의 단아한 기품을 품고 있으면서 측면의 기둥과 들보를 노출시켜 조화를 이룬다. 극락보전안에 아미타 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가 원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탱화가 아니라 토벽에 그려진 것이 큰 특징이다. 또한 아미타여래 양 옆으로 협시보살이, 그 위로느 s6인의 나한상이 구름 속에 쌓여 부처님과 회통을 하고 있다. 불화에서 이같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란다. 시끄러운 세상에 아미타 벽화처럼 한 세월 살아갔으면... 야속해서 던진 돌들 긴 오후 영산강 포구는 잔잔했다. 예전에는 물이 들썩 거렸을 텐데 지금은 수량이 적어 강변에 유채꽃은 심었다. 한참을 달려 다다른 강가에서 나이를 잊은 채 영산강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우리들의 심정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나 있을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박시인이 낭송해 주었던 나해철 시인의 <榮山浦 1>을 다함께 들으며 여정을 막을 내렸다. - 배가 들어/멸치젓 향내에/읍내의 바람이 다디달 때/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은 걷다가 누님은/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파도처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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