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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0 | [문화저널]
<제 73회 백제기행> (살아꿈틀대는 물길 칠백리, 낙동강)-임나(任那)는 가야제국의 일본진출 거점이었다
萱沼紀子(카야누마 노리코) 전북대 일문과 객원교수 (2005-01-25 15:55:29)
지난 십월 십사, 십오일 양일에 걸쳐 문화저널 주최 기행에 참가하여, 경상남도 낙동강 유역일대를 돌아보았다. 가야산의 해인사를 위시해서 우포 습지대와 대가야 고분군까지 광범위하게 들러 본 여행이었다. 해인사는 한번 견학한 적이 있으나 다른 곳은 가 본 일이 없던 터라 이수자 선생의 권유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여행 목적 가운데 하나인 자연관찰도 매우 자극적인 테마였으나 나에게는 대가야의 땅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가야지방은 일본열도에 많은 영향을 준 나라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던 지역이다. 물론 그곳을 지나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발로 직접 그 흙을 밟아 보기는 처음이다. 나는 일본에서 “영상(映像) 하늘”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상회사에 관계하고 있을 때 한국 시골에도 몇 번 가 본 적이 있다. 그 중에는 한국 사람에게도 별로 익숙하지 않은 지방에도 찾아 간 적이 있는데 대가야에는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실제로 1993년 KBS와 공동 제작할 생각으로 시작한 “철과 가야와 대군들”이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 우리 스텝들은 이곳을 여러 번 왔었으나 나는 로케이숀에 참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가야나 가야의 고분군은 영상에서 밖에 본 적이 없다. 영상에서는 옥천리나 고령 양전동, 지산동 고분군이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이번에 직접 내 눈으로 보게 된 대가야의 지산동고분군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구월에 막 개관했다는 대가야 왕능 전시관도 구경할 수 있어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깊은 관계를 새삼 인식시켜주는 기회가 되었다. 원래 한국 역사에서 가야지방의 여러 나라들은 소국이어서 이른바 삼국에 필적되는 존재가 아니어서 경시되어 온 것 같으나 그곳에서 출토된 풍부한 부장품으로 가야 문화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주장 된 것이다. 일본에서도 1987년에 가야문화전이 개최되어 이를 계기로 일본과 가야지방과의 관계의 중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굳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존재를 강조해서가 아니다. 일본 각지에 가야식 고분이 여러 지역에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예를 들면 와카야마현(縣)이나 북주주(北九州)뿐 아니라 일본해 측(한국에서 보면 동해 측) 등에서 실로 많은 가야식 토기와 마구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마주(馬&#20881;)는 1957년에 일본 화가산현 대곡고분(和歌山縣 大谷古墳)에서 발굴 출토되어 당시에는 아시아 유일의 희귀한 출토품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그 후 한국 부산 복촌 고분에서 1969년에 동형의 마주가 발견되었고 우리는 이것을 가야 문화전에서 확인 할 수 있었다. 대가야 왕능 전시관에 있었던 마주는 그것들보다 소형이었지만 말의 머리를 덮던 틀림없는 철제 마구(馬具)였다. 1.1.1.1.1.1.1. 가야지방 일대는 자칫 산 속 오지로 생각하기 쉬우나 지도를 자세히 보면 이 지역은 크고 작은 다수의 하천이 유입해 들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천은 옛날에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하천을 내려가면 그 곳엔 망망대양이 펼쳐져 이 것은 바로 세계로 이어지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열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본열도의 중심지인 아스카 지방으로 유입된 가야 문화의 선구(先驅) 부대(部隊)는 화가산현(化歌山縣)의 웅야천(熊野川, 현 신궁천 新宮川)을 거슬러 올라가 내량현(奈良縣)으로 들어갔다. 1.1.1.1.1.1.2. 전에 가야지방에는 바다가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야가 지닌 힘이었다. 가야지방의 대왕들은 남해상의 많은 섬들을 포함해 크고 작은 여러 나라를 만들어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가야지방은 해양국이었지 “기마민족”나라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화가산현 대곡유적지(化歌山縣 大谷遺跡地)에서 마주가 나왔을 때 화가산시에 살던 히노테르미씨(저널리스트)는 江上波夫氏의 [기마민족국가론]에 따라 마주는 기마민족의 발자취라고 간주했으나 가야 문화전을 대하는 순간 그 설의 모순을 직감했다가 한다. 왜냐면 말 위에서 가능한 민첩하게 행동해야 했던 기마민족에게는 이와 같이 무거운 마구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리가 이는 말이다. 남방인 가야지방에서 마주가 나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1.1.1.1.1.3. 가야지방의 대왕들은 널리 해외로 손길을 뻗어 일본열도까지도 활발히 진출하고 있었다. 현재 일본 각지에 있는 가야식 고분이나 출토품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任那日本府”라는 표현이 <日本書紀>에 나와 있어 일제시대에는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임을 증명하려는 무리들이 고분 수탈을 일삼아 이 지방 고분 대부분이 그 희생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小倉(오꾸라) collection이 바로 그것이며 현재 이들 대부분이 동경국립박물관이나 동경대학, 경도대학 등에 소장되어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행히 지산동 고분군이나 고령 양전동 고분군, 가야지방의 옥천리 고분군 등은 높은 산 정상에 있었던 덕에 일본의 약탈을 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가야는 일본의 식민지 내 출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任那”야말로 가야국의 일본 진출을 위한 거점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가야 대군들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다량의 출토품이 말해주듯이 그들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에 전혀 손색이 없는 힘을 갖추고 있었던 강대한 나라였던 것이다. 1.1.1.1.1.1.4. 그러나 어느 날 가야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백제나 신라에 흡수되었다고들 하지만 그 정도로 권력을 과시했던 나라가 감쪽같이 하루아침에 없어져버렸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지나치게 해외 거점을 구했던 탓이 아니었을까. 특히 일본열도 안에 이미 안정된 세력을 가졌던 가야제국은 구태여 한반도 내에서의 세력유지에 목숨을 내 걸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라고 억측해본다. 1.1.1.1.1.1.5. 가야지방 일대로부터 다도해, 대마도, 북구주를 포함하여 그 일대가 왜국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본인 중에도 꽤 많이 있다. <三國志><魏志倭人傳>의 왜인이란 일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인(倭人)”이란 중국문헌에 의하면 “키가 작은 왜소한 사람“이라는 경멸 섞인 호칭으로 문신을 한 남방계 민족으로 한반도 남부 일대에도 거주했다는 것은 민속학적으로도 밝혀진 바 있다. 이들 왜족이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 간 최초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된다. 1.1.1.1.1.1.6. 우포에서 본 옛날식 고기잡이 방법이라든가 창녕군 박물관에서 본 옛 농업 의식 등은 일본 문화 기층과 상통하는 면이 아주 많다. 가야 지방의 왜인들은 호수나 습지의 자연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이 곳에 그들의 나라를 이룩했던 것 같다 1.1.1.1.1.1.7. 가야노마 노리코 / 1940년 출생. 북해도대학 문학부 국문과 졸업. 동경대학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국어국문학 전문과정 수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0년부터 작신학원여자단기대학(作新學院女子短期大學) 교수로 재직했으며 올 3월부터 전북대학교 일어일문과객원교수로 와 있다. 최근 발표된 [감금된 욕망-중세적세계] [주탄동자(酒呑童子)]의 여자들]등을 비롯해 일본문학에 대한 30여편의 논문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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