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회 백제기행 (다시가고 싶은 백제기행 세 번째)
-고구려의 강인함과 단종의 슬픔 찾아 떠난 여행
충북지역과 동강답사를 다녀와서
오금숙 제주 4.3 연구소 연구원
답사는 이제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나는 주로 제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오름(흔히 기생화산이라 불리는 조그만 산)들과 역사 유물들을 답사하여 왔다. 벌써 팔년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지만 답사를 떠날 때마다의 기대와 흥분은 어느 초보자와도 같다.
내가 몸담고 있는 제주 4.3연구소에는 달마다 문화저널이 배달되어 온다. 하지만 꼼꼼히 들춰보거나 내용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책에 실린 정보와 길들은 비교적 전문성이 갖춰져 있었고 전북이라는 지역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문화저널 4월호에 이번 답사 코스를 처음 보는 순간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 푸짐한 답사코스들 중에 내가 가본 곳이라곤 단 군데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내가 생활하는 제주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려 했지만 내가 살아온 30여년 삶이 우물안 개구리의 그것과 다를게 그리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거창하게(?)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잠깐뿐이었고 어떤 수를 쓰더라도 참가하자는 마음이 생겼다. 석가탄신일을 겸한 연휴로 인해 항공편을 구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함께 참가하기로 했던 두 사람은 포기를 하고 남편과 나 둘만이 21일 저녁 군산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수학여행을 처음 떠나는 학생처럼 마음이 설레었다.
다음날인 5월 22일, 좀 이른 시각에 우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하나 둘 동행인 듯한 사람들이 모여 드는가 했더니 조용하게 버스가 채워졌다. 인원을 점검하던 한 분이 ‘과연 제주도 분이 왔을까’하듯 우리의 출석을 확인 했다. 우리는 손을 번쩍 들어 우리의 존재를 알렸다.
첫 답사지인 충주 탄금대로 떠나는 고속도로 위에서 답사는 이미 시작 되었다. 안내를 맡은 선생님의 ‘대동여지도에 대한 설명이 그것이다. 사실 우리집 방문에는 포스터 크기의 대동여지전도 영인본이 걸려있다. 고교역사교사인 남편은 방학만 되면 여러 지역을 답사하고는 포스터와 도록 등을 잔뜩 구해 와 집안 곳곳에 걸어 놓는다. 대동여지전도 역시 그러한 경위로 인해 구해 놓은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눈에 띌 때마다 지도로 보기 보단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이 멀찍이 떨어져 감상(?) 했었다. 그래서 눈을 들이대고 거기에 쓰여진 글자나 기호들을 주의 깊게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답사할 지역을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지명을 표기한 한자 외에는 모든 것이 기호로 표기되어 있으나 조잡하지 않고 오히려 한눈에 그 지역이 밟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도 하나에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어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다던 대동여지도.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를 모두 불태우고 김정호를 살해 했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을 일제가 퍼트릴 정도로 그 중요성이 깊었던 대동여지도의 진가를 나는 어설프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탄금대에 도착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남한강과 달래강이 합류하여 고고히 흐르는 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그 강물을 보며 가야에서 신라로 망명한 우륵이 가야금을 타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 맴도는 탄금대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가. 임진왜란 당시 드넓은 강변을 달려오느 s조선 기마병들을 향해 거침 없이 조총을 쏘아대는 왜병들의 모습. 말과 함께 뒤엉켜 나뒹글고 피 흘리며 스러지는 흰 옷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인해 대패를 한 뒤 자결하는 신립 장군의 안타까운 모습이 더욱 현장감있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가족들이 손잡고 오순도순 놀다가는 공원처럼 꾸며진 탄금대를 보면서 전쟁의 아픔을 더 이상 간직하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금대를 나온 우리들은 신라 중앙탑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중원고구려비에 새겨진 ‘고려 대왕(大王)과 신라 매금(寐錦 )’이라는 호칭으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의 하위 국가쯤 되었던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고는 이곳이 나라의 중앙임을 알리기 위해 세웠다는 중앙탑. 탑은 그 의도가 너무도 분명하듯 높이 치솟아 있었다. 힘에 겨운 상대를 쓰러뜨리고 그것을 여실하게 증명이라도 하듯 중앙탑은 다른 신라의 탑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거대한 칠층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꽤 높다란 언덕위에 턱하니 세워져있어 웸만한 주변 어디에서건 볼 tnb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원고구려비가 있는 곳에서도 탑의 꼭지부분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중원고구려비까지 둘러본 우리들은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마애불상군을 보기 위함이다. 버스가 세워진 곳에서 저 멀리 숲속을 향해 나 있는 시멘트 계단이 보였다.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펼쳐져 있었고 우리들은 좁다란 논두렁을 따라 백여미터를 일렬로 주욱 걸어 들어갓다. 논이 없는 제주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마애불상만큼이나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이 뚜렷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논이라는 것을 처음 눈여겨보았던 어느 해 여름이 생각난다. 어떻게 벼포기가 물에 썩지 않고 저렇게 초록으로 잘 자랄 수 있을까. 일상에서 논과 벼를 흔히 보아왔던 사람들이 들으면 웃음을 터트리겠지만 내게는 경이롭기만 한 일이었다. 자연의 오묘한 힘은 우리 주위에 항시 있는데도 우리들은 너무나 무감각하게 살고 있지는 안은 건지.
봉황리를 떠난 우리들은 청룡사터로 향했다. 보각국사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사자석등이 있는 곳이다. 미적인 감각이라고는 거의 없는 내게 부도의 조형미를 설명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그리 흥미롭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사자석등을 보고서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조그만 사자(내가 볼때는 강인하게 생긴 두꺼비 같아 보였다.)가 커다란 석등을 무겁게 떠받드는 형상을 한 것이 위태로워 보였다. 금세 등위에 있는 석등을 무겁다고 하면서 밀쳐낼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사자는 지난 세월보다 앞으로 더 많은 세월을 잘 견뎌 나갈 것이라 믿는다.
의림지에 도착하니 뱃놀이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삼국시대의 저수지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건재한 모습이었다. 그 뿐 아니라 의림지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도 우리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소나무들은 등줄기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어느 일행 중 한분이 “이렇게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것은 우리나라 토종 소나무가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중국풍의 그림 속에 이렇게 늘어진 소나무들을 본 듯 하기도 하다. 이런 붉은 소나무들의 모습은 다음 답사지인 영월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단종의 무덤인 장릉에 들어 선 것은 저녁 여섯시가 넘어서였다. 관광객들이 여전히 북적대며 날씨 좋은 봄날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높은 언덕위에 위치한 무덤가로 내쳐 올라갔다.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역시 붉은 기운이 감도는 소나무 숲이 빼곡한 자그마한 산이 장릉과 마주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 소나무 숲은 보면서 한겨울 눈덮인 날 찾아와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단종의 생애는 여기저기서 많이 회자된다. 영월이라는 땅에 붙은 수식어 중 가장대표적인 말도 아마 ‘단종 유배지’일 것이다. 나 역시 현재 문제시되는 동강 댐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단종 유배지로서 영월을 알고 잇었다. 장릉 주변에 있는 음식점들과 토산품점, 그리고 숙박업소 등의 규모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단종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이곳을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느낌은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곱시가 넘은 늦은 시각에도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청령포 나룻터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에는 높은 산이 삼면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어 천연적으로 형성된 감옥과 같은 유배지. 어린 단종은 외로움과 공포와 싸우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 하였을 것이다. 단종의 슬픔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숙소로 발길을 돌렷다. 꽤 늦은 저녁이었다.
밤에 숙소에서의 아쟁공연 또한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전주에서 먼길을 달려와 우리에게 공연을 해준 이는 생각보다 나이 어려 보였다. 가슴을 찢어놓은 아쟁 소리에 반해 그 악기를 연주하게 되었다는 그 분은 말할때의 장난기 어린 얼굴과 달리 연주에 들어서자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한 채 혼신을 다해 아쟁연주를 하였다. 연주를 잘 한 건지 아닌지 도저히 분간을 못하는 나로서는 아쟁 연주를 직접 보며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동강으로 향했다. 텔레비전에서 동강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꼭 한번 오고 싶었던 곳이었다. 텔레비전의 위력이 크다는 것을 그 곳에서도 실감하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동강의 유명세를 알고 사람들이 모여 든 것 같았다. 동강댐이 설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손과 발에 의해 동강이 허물어 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자연에게 있어서 사람의 발길처럼 무서운 것이 어디 있을까.
어라연을 찾아가는 한 시간 동안 동강의 풍경을 마음껏 구경 할 수 있었다. 강 문화가 없는 제주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도는 그 옛날 유배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유배당한 이들의 문화와 더불어 예로부터 중앙정부의 탈취와 식민지 주민들과 같은 굴욕적 삶을 살아왔던 제주인들. 그것에 맞서 기나긴 세월을 저항과 울분으로 살아왔던 제주인들에게 바다는 울음을 삼키며 바라보아야 하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또 제주인의 삶을 지탱해 주는 자원이기도 했으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면이 바다로 막힌 탓에 한라산으로 들어가야 했던 저항 민중들은 산 곳곳에서 피울음을 울며 쓰러져 갔다. 그러한 탓에 지난 역사를 생각하며 제주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분노와 슬픔이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강을 보고 있노라니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고요하고 풍요로운 생각이 든다. 물론 비가 많이 와 강물이 넘쳐 흐르는 살벌한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옛날 정선 아리랑의 슬프고도 가혹한 그 강물이 실감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강물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더 가혹했지 싶기도 하다.
동강을 보며 제주 바다를 생각했듯 제주에 와서는 바다를 보며 동강을 생각할 것이다. 양옆에 높다란 협곡을 끼고 옥빛으로 흐르는 동강. 한잔 술에 얼굴이 벌개지는 내가 3박 4일동안 텐트를 쳐놓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라연 바위 위에서 ‘동강댐 설치 반대’ 구호를 외치면서 환경파괴로 인한 암울한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 자본의 힘에 농락 당한다는 동강 지역 주민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함께 느꼈다.
동강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한 우리들은 단양 온달산성 바로 밑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창문으로 온달산성의 한 귀퉁이를 올려다 볼 수 있었다. 그 옛날 북방민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힌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펴 한강 이남까지 진출했을때 쌓았다던 온달산성은 내게 고구려 유적이 갖는 호전성과 강인함을 유감없이 보여 줄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점심을 먹고 일행들과 헤어져야했다. 제주로 떠나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나머지 일정을 모두 포기 해야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에게 아쉬운 작별을 고한 뒤 답사를 취재하러 온 전주 MBC차량을 얻어타고 남편과 나는 청주 비행장으로 향했다. 근래에 내게 없었던 아쉬운 작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