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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3 | [문화저널]
<제65회 백제기행>고창 도솔산 일대와 부안 유천 도요지를 찾아서
배숙자(2005-01-25 15:49:17)

<제65회 백제기행>고창 도솔산 일대와 부안 유천 도요지를 찾아서


배숙자


선운사와 나의 첫 만남은 언제였던가. 어느 해 가을 전북대학교 영문학과 동아리 모임에 참관인 자격으로 동행했던 때였지 싶다. 그때 선운사 앞 고목 위에서 아빠 품에 안겨있던 서너 살배기 둘째가 이제는 수염이 제법 거뭇한 중학생이 되었다. 강산이 적어도 한번은 변했겠다. 사소한 ‘사건’에도 박장대소하던, 도솔암 산행길에 우리 꼬마를 서로 안고 업어주던, 그 아름다운 처녀 총각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 산, 그 하늘, 그 나무, 그 절은 여기 이렇게 고즈넉히 우리를 반기는데.나고 스러지는 것이 무릇 생명체만의 일이랴. 동학농민혁명 백주년기념사업을 띄우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친 남편이 신새벽 잠마저 설치던 무렵의 어느 핸가, 모 잡지사에서 우리 부부의 생활을 동행 취재하겠다는 뜬금없는 제안이 왔었다.


 답사 장소는 우리 의사에 맡긴다기에 우리는 전봉준장군 고택으로부터 시작하여, 갑오년 전적지를 거쳐, 선운사에서 마감하기로 했다. 그때 도솔암 뒤 널따란 바위에서 남편과 함께 바라보던 선운산의 모습이라니! 서울서 온 기자와 꼬박 하루를 보내며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기념으로 그 잡지도 보관해 두었는데 구제금융 위기가 닥치기도 전이건만 그 잡지는 폐간되고 말았다. 웃지 못할 해프닝!사실 전북에 사는 사람으로 이름조차 그윽하고 향기로운 선운사에 한 두번 다녀온 적 없는 이 있으리요. 나 역시 그랬다. 그래도 따라나섰다. 아침부터 밤까지 숨가쁘게 이어지는 일상의 먼지를 떨어버리고도 싶었다. 운해 속의 산사에서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여유로움을 호사하고 싶기도 했다. 비록 더부살이처럼 엉거주춤하긴 했지만 나의 백제기행 이력도 십 년이 넘었다. 여행은 언제 어떤 사람과 떠나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 마음 맞는 이끼리의 오붓한 여행과는 다르게 전문가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학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 백제기행의 매력이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도시인의 호사 취미 여타 기행과의 차별성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백제기행은 결코 진지함을 잃어서는 안된다!) 


정말이지 좬문화저널좭이라는 문화 지킴이가 있다는 것은 전북의 자부심이자 온 나라의 자랑이기도 하다. 아니 이번 미국인 케어니씨의 동참으로 그 명성이 태평양을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그이를 데려올 때에는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중의 역사가 숨쉬고 있었고, 그 숨결을 오늘에 되새기려는 숨은 일꾼들이 있음을 보고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길옆의 붉은 황토밭이 사라지고 우람한 산세에 둘러 싸이는가 했더니 어느새 저만치 주차장 뒤로 동백나무 숲이 보일락말락하고 동백장 호텔도 선연했다. 낙조를 보고 와서 짐을 풀기로 하고 우리는 먼저 선운사로 향하였다. 꽃놀이하기에는 아직 일러서일까,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개울 건너의 송악을 잠시 바라보았다. 얼핏 담쟁이 같아 보이는데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식물로 높이가 15미터나 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소가 즐겨 먹기도 하여 소밥나무로 불리기도 한단다. 낙조를 놓치기 싫은 일행은 부도밭을 일별하고 스쳐갔다. 여기에선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는 추사 글씨가 새겨진 비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저 세한도가 좋고 부작난도가 좋아 카드에 인쇄된 그것들을 책상 앞에 붙여놓기도 했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까막눈 수준인 내가 보기에 그 글씨가 추사체라니 어쩐지 생소했다. 그렇지만 멋있었다. 대웅전 뒤로 병풍처럼 두른 동백숲을 바라만 보았을 뿐 새색시 입술 같다는 붉은 꽃잎을 가까이 볼 여유는 없었다. 얘기에 취한 우리가 걸음이 느린 탓이었다. 그런데 안 보아도 서운할 게 없었다는 후문이다. 제대로 피어난 게 없더라는 것이다. 차가운 날씨에 새색시 입술이 얼었나? 정녕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때맞춰 보기란 이렇게도 힘든 일이던가. 사월 말경에 만개한다니 그때 와서 꽃향과 복분자술에 흠씬 취해나 볼까.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걖겚陋孤?목이 쉬어’ 남은 동백꽃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며 절집을 나오다가 계숙씨와 우리는 너무 추워 뜨거운 커피를 뽑았다. (그런데 절 안마당의 자판기는 절집 밖으로 치워야 마땅하지 않을까?) 계절이 바뀌면 바뀌는 대로 선운사에서 낙조대를 바라고 오르는 산길은 언제나 운치가 있다. 철이 일러 개나리 진달래는 없는 것일까. 산불을 막기 위해 길옆의 나무 가지들을 베어내서 꽃을 볼 수 없을 뿐 이미 꽃은 피었다는 것이, 박 시인의 설명이다. 그의 말이 옳았음을 산 위에서 만난 진달래가 증명해주었다. 진흥굴과 장사송을 지나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섶에 노란 상사초꽃도 피어 있었다. 


숨이 조금 차다싶을 즈음 도솔암이 나타나 그곳 내원궁의 지장보살을 보고, 용문굴을 향해 오르다 바로 칠송대 깎아지른 벼랑에 새겨진 커다란 불상을 우러렀다. 아하, 그 배꼽! 우람하고 씩씩한 얼굴 표정은 지방 호족들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반영되기 시작하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 기형일 정도로 손이 큰 까닭은 중생들의 아픔을 고루 만지려는 부처님 자비의 상징.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으로는 이 암각 석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아우르는 전설, 미륵세상을 꿈꾸며 후천개벽을 도모하던 민초들의 소망이 어려있는 전설을 보듬어야만 비로소 제대로 보는 것이다.고창을 찾는 사람들은 흔히 신재효, 김소희로 이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흥취를 먼저 떠올린다. 또한 백여년 전 동학농민군의 숨결로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무장에서 기포하여 백산으로 진격하던 그들의 뜨거운 함성이 들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던 동학 접주 손화중 장군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전설처럼 떠돌던 도솔암 마애석불에 숨겨진 검단 선사의 비결을 꺼냈던 것이다. 벼락살과 함께 봉했다는 그 신비스런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당시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그후로 서서히 민중 세상이 열려온 것인가? 우리들 기행팀은 그 마애석불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용문굴을 지나 낙조대 쪽으로 능선에 오르니 저 아래로 딴 세상이 열렸다. 후천개벽의 새 세상인가.


 능선을 따라 낙조대로 향했다. 하늘과 바다가 한가지로 붉게 물들어 마치 태양이 바다 속으로 출렁 가라앉는 듯 하는 황홀한 일몰을 기대했던 우리는 실망하였다. 반갑잖은 구름이 해를 잔뜩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해를 붙들어매 두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제 딤플도 약효가 없을 만큼 추워 못 견디겠으니 어서 해가 지게 해 주십사고. 수화기에서는 박 시인의 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유명한 버들치들은 이즈음 어떻게 지내는지?숙소인 동백장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복분의 의미를 새기며 복분자술도 한잔씩 했다. 저녁에는 백제기행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여야만 하는’ 뒤풀이가 있었다. 내일 답사할 지석묘군에 대한 강의를 듣고 ‘적’이라는 개량악기의 독특한 연주를 들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전의 것들과는 사뭇 달라 당황스럽기도 했다.다음날은 고인돌부터 보러갔다. 전에도 본 것이지만 느낌이 새로웠다. 발굴 초기에는 주민들의 화장실로도 사용되고 있었다는 고인돌. 하긴 앞마당이고 뒤뜰이고 정지고 집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지천으로 널려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2킬로미터에 걸친 야산에 널려있는 크고 작은 고인돌은 442기에 이른다. 가장 큰 것은 무려 300톤에 달한다니 그 큰돌을 그 옛날 사람들이 어찌 날랐을까. 남방식과 북방식이 있지만 어떤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고, 또 여기에 부락이 공존했는지 아니면 단지 묘지일 뿐이었는지 확실한 것은 없다는 윤 교수님의 설명이다. 현재 이곳과 화순지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단다. 전 세계에 걸쳐 6만여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그중 3만여기가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수께끼였다. 지금 여기 있는 저 고인돌이 산 넘고 물 건너 저 머나먼 나라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실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 옛날 신석기 시대에도 다른 지역, 다른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과 교류가 있었다는 말인가? 바다로 침몰했다는 전설의 아틀란티스를 믿는다면, 그때엔 모든 대륙이 이어져 있어 험난한 해로를 통하지 않고도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일까? 인류의 뿌리는 결국 하나였다는 말인가? 강가를 따라 고인돌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시사적이지 않은가. 단지 무덤만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허약하게 만들지 않는가. 굳이 강가에, 그것도 강물의 흐름과 평행으로 조성한 사연이 무엇일까? 물론 지금은 강줄기가 변하여 이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곳 상갑리 고인돌 중 상당수는 숱한 풍상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다.


 우리는 전형적인 고인돌의 온전한 모습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타고 잠시 달린 후 어느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길을 5분여 걸어 들어간 어느 집안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서 와있었다. 그런데 아니, 저 분이 누구신가, 바로 마에다 감독님이 아니신가! 97년도 여름 ‘천년의 세월을 건너 만나는 백제문화의 원류’라는 제목을 들고 백제기행이 일본을 찾았을 때, 열강 하시던 바로 그 열정적 노인,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몰염치한 행위를 반성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양심적 일본인, 종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백만인의 신세타령’이라는 기록영화를 위해 자료를 모으고 있는 열성파, 바로 그분이셨다. 그날은 일본인 답사팀을 이끌고 계셨다. 서로들 일정이 다른 까닭에 반가운 악수만으로 헤어졌다. 그런데 이 고인돌은 정말 잘 생겼다. 조상의 고향이 아일랜드인 케어니씨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일랜드의 신혼부부들은 고인돌 속에서 첫날밤을 지내는 풍습을 따랐다고 한다. 조상의 음덕을 입어 딸, 아들 많이 낳고 탈없이 해로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었지 싶다. 더불어 고립 속에서 서로에 대한 서로의 존재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주문이었을까. 그래서인지 이혼율이 60퍼센트에 달하는 미국과 달리 아일랜드의 이혼율은 아직 우리와 같은 수준이라고 한다. ‘잘 늙은’ 고인돌 하나를 거기에 두고 우리는 모양성으로 향했다. 계유년, 그러니까 조선조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석축성으로, 유일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어온 읍성이자 산성이란다. 동, 북, 서 세 개의 성문, 튼튼한 옹성 그리고 해자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충시설을 갖추고, 갈재 너머 한양으로 가는 행인을 보호하고, 법성포를 통해 이 근역의 풍부한 물산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막아내었다. 


성의 정면과 옹성을 보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야무지다는 것이었다.흔히 저승문이 열린다는 윤사월 초엿새와 스무엿샛날에는 인근 부녀자들이 소복단장하고 성밟기 놀이를 벌인다. 돌을 머리에 이고 한바퀴를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를 돌면 무병장수, 세바퀴를 돌면 극락 승천한다는 전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민속적 불심과 애향의지가 숨어있다. 전란으로 황폐해진 성을 개축하였으니 성토를 다져줄 필요가 있었고 또 그것을 위한 동기유발이 필요했을 것이다. 모양성 바로 아래 동리 신재효의 생가인 열두칸 줄행랑채가 초가지붕을 얹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당대 내로라하는 명창들의 소리 한 대목이 들려올 것만 같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라!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무엇과 바꾸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려볼 것인가? 근처의 개미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부안 유천 도요지로 향했다. 도요지쪽 동산에도 고인돌 하나가 서 있다. 고려청자 파편이라도 주워 나오면 문화재 도굴이 되니 멀리서 관망만 하라는 말씀. 격포 채석강 입구에서 버스가 갑자기 매표소로 들어갔다. 예정에 없던 터라 어디를 가는 걸까 의아했는데 목표지는 수성당. 고기잡이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각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초록빛 바닷물이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텅 빈 채 서있는 잿빛 시멘트 군 초소는 차라리 외면해 버렸다. 이어 말도 많은 새만금. 현장의 홍보관은 규모도 거창했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홍보 직원의 간단한 설명도 들었다. 


그래도 새만금이란 말에서는 시화호의 냄새가 났다. 아무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덕분에 애꿎은 쭈꾸미만 동이 났다.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 뒤켠에서는 나지막한 기타 반주에 마치 하프소리와도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해져 각양각색의 노래가 이어지는데 그 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에서 내 생각이 맴돌았다. 우리 아직 피지 못한 동백꽃을 그곳 선운사에 남겨 두고 왔지만, 그러나 우리는 동백꽃보다 붉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았지요. 그들의 숨결을 느꼈지요. 그래서 급기야 우리도 그 아름답고 붉은 꽃이 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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