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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 | [문화저널]
<제 64회 백제기행>‘99 다시 가고 싶은 백제기행 하나 낮게 물결치는 겨울산과 그 안에 감춰진 신비의 세계 전남 운주사와 선암사의 아름다운 여정
강영란 군산 옥구중 교사 (2005-01-25 15:48:33)
“ 비가 온다는데 어떡하지?” “혼자라도 다녀올께. 비오는날의 겨울산사(山寺)도 좋을 듯 싶은데” 떠나기 전날 밤, 혼자라도 다녀와야겟다는 장선생과의 통화를 끝내고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비가 오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교통사고 휴유증으로 옆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듯싶어 모처럼의 남도 기행을 그냥 접어 버리려니 못내 아쉬웠다. 날은 밝았다. 작년 가을 해거름에 보았던 선암사의 고즈넉한 저녁예불을 잊지 못해, 운주사의 코 낮은 부처들을 잊지 못해 빗방울 후둑이는 전군가도를 달려 낯선 일행들이 있느 버스에 오르면서 까지도 나의 기행참여가 걱정스러웠다. 버스는 움직였고 빗방울은 계속 뿌렸다. 허나, 선택이 옳았음을 느끼는 시간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아서였다. 평소 가슴 답답할때면 자주 들었던 김영동님의 <산행><영가> 그리고 대금연주는 나를, 우리들을 씻어 내렸고 버스에 올라있음을 다행이라 여기게끔 하였다. 해질녘에 도착한 선암사에도 겨울비는 내린다. 우의까지 준비해주는 문화저널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워하며 호암대사와 관음보실의 전설이 깃든 승선교를 지나 경내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덧칠해진 대개의 절집과는 다르게 고풍스런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잇는 선암사의 정취에 마음 푸근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태고종의 본산으로서 불교의식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오고 있으며 절집 또한 옛 모습 그대로여서 영상매체를 다루는 사람들과 일반인들에 인기가 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재정적 뒷받침이 어려워 지금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다는 얘기는 푸근함과는 다른 씁쓸함이 스친다. 아담한 자태의 대웅전과 그 앞의 삼층 석탑, 그리고 조선후기의 특성을 간직한 화산대사사리탑도 있으련만, 하고많은 장소 중에서 하필 해우소(변소)에 모이란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게 아름다운 뒷간 앞에서 달라져버린 우리들의 화장실 문화를 새삼 생각해본다. 제 몸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요술단추하나로 요란하게 쓸어 보내놓고 문화인인양 살아가는 우리들, 기실은 우리 입에 다시 들어올 강물에 돈 들여 버린 것을. 아파트에서와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해우소의 냄새를 이곳에 느끼며 자꾸만 대웅전 쪽을 기웃거린다. 일행에서 빠져나와 대웅전의 부처님 앞에 합창한다. 저녁예불 준비가 한창이어서 조금은 미안하고 밖의 일행이 걱정되어 마음은 바쁘다. 불전에 엎드려서 법고 소리 듣자니 가슴이 찡해 온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소리, 모든중생, 날짐승, 물짐승, 지하에있는 모든 이까지 부처님의 큰 뜻으로 구제하려 한다는 소리 소리들, 소리는 라래로 아래로 흐르는데 위만 쳐다보고 싶어하는 내 한 몸 부지하기에 급급해서 주변 돌아보지 못하는 맘 죄스러워 그냥 합장만 할 뿐이다. 겨울비 내리는 날 선암사의 저녁예불은 가슴속에 큰 소리로 자리한다. 송광사로 넘어 오던 중 해는 졌고, 밤이 되어 숙소에는 소리 한 판 어우러진다.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예쁜 처자들이 우리 소리까지 애집도록 잘 하니 그저 대견스럽고 예쁠뿐이다. 임진택님의 귀한 장단에 추임새도 함께여서 더욱 좋은 자리다. 예불소리하면 손꼽히는 손광사의 새벽예불에 참여하기 위해 어떤이는 소곤소곤 얘기로 새벽을 기다리고, 어떤이느 s명상에 잠겨 새벽을 기다린다. 새벽 3시30분, 터벅터벅, 더듬더듬, 랜턴 하나에 열 두명이 의지해 송광사로 향한다. 날이 개어서 우의로 무장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다. 하늘에 분명 해는 있건만 모습 잠시 바꾸니 버젓이 있는 길도 더듬거린다. 보이는 것만 그저 볼 줄 아는 우리들의 모습 생각게 한다. 보이는 것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잇으면 좋으련만,,, 조계산의 새벽기운 단전에 흠뻑 담아보려 깊은 숨 들여 마시며 하늘 향해 보던 중 아! 더 이상 할 말을 잃는다. 잎새 떨군 겨울 나무 가지가지에 열려있는 주먹만한 별떨기들 비워야 채워진다는걸 말해주는 겨울나무 가지에 별들은 밤마다 놀러 왓었던걸 우리만 모르고 살았나보다. 비울 줄 아는, 털어버릴 줄 아는 나무에 밤마다 찾아와 주는 별떨기 앞에서 조금은 낯설고, 조금은 서먹했던 우리들. 팔짱을 끼었고, 끼었던 팔에 힘이 생긴다. 경내에 도착하니 장엄한 불경 소리에 숨이 멈춘다. 염치 불구하고 삐걱문소리 내면서 대웅전에 무릎 꿇었고, 그 경건함에 저절로 손 모아진다. 죽비소리에 맞춰 108배 하며, 지금 갖는 이 청정한 맘 변함 없기를 다짐해 본다. 대웅전을 나서는데 무릎이 휘청인다. 휘청거림도 기쁨으로 다가온다. 싸아 밀려드는 새벽 기운 흠씬 들이마시며 숙소로 다시 향한다. 새벽 예불에 너무 혼을 바친 탓인지 모두들 깜박 잠이 들어서 승보사찰이라고, 조계종의 근본 도량이라고 하는 송광사 답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장흥의 보림사로 향한다. 봄날씨 같은 따사로운 햇살이 창밖에 가득하다. 통일 신라말 9산 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도량 보림사 가는 길은 그야말로 진경산수화 몇 폭이 이어진 경관이다. 이번 기행의 이름처럼 물결치는 겨울 산 그대로이다. 잎사귀로 무성히 장식했을 땐 볼 수 없는 가난한 아름다움이라 할까. 국내에서 제작연대가 가장 빠른 목조사천왕상. 팔뚝 뒤편에 조상기를 새긴 국보117호 무쇠 비로자나 부처님, 통일신라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국보 제44호의 삼층석탑, 보조 선사 체징의 탑비, 묘탑 부도 등을 눈에 익힌 뒤, 화순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밤잠을 자지 못해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 새 쌍봉사에 도착이다. 현존 유일의 삼층 목탑인 대웅전을 화재로 잃어버리고 1986년 복원 완료하였으나 화재 이전의 모습과 달라져버린 현재의 대웅전을 보면서, 절 뒤편에 자리한 철감선사 부도의 자잘한 흠집을 보면서 문화재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 무관심에 또 한번 탄식한다. 특히 철감선사 도윤의 부도는 일제 이후 도군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무참히 쓰러뜨린 것을 재건해 놓은 것이란다. 국보 제57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부도는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목조건축양식을 본 떠 당시 건축기술의 한 단면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전남대 박물관 황호균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당내 최고 조각가의 신묘한 역작임에 틀림없다. 탑신은 간 데 없으나, 왼발을 땅에 박고 오른 발을 살짝 들어 전진하려는 역동적인 자세의 철감선사 탑비 역시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이것저것 더 보고 싶으나 운주사의 신비함을 잊지 못해 마음이 바쁘다.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는 모습이었으나 그 어떤것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운주사는 역시 설레임을 안겨준다. 완벽한 조형미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눈에 다가오는 불상과 탑들은 우리들의 발길을 그냥 멈추게 한다. 어디 다녀오나 하고 금방이라도 인사르 f해 올 듯 싶은 소박한 불상들, 부처의 위엄이라고는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크고 작은 불상들 앞에서 악수라도 하면서 속내의 설움도 얘기하고 싶고, 추운날 어떻게 지냈나 안부라도 묻고 싶어진다. 산도 들도 아닌 그곳에 여기저기 우뚝 우뚝 세워 놓은 자연스런 탑들. 돌을 떼어내어 전혀 다듬지 않은 채로 더러는 여럿이 더러느 s홀로 세워진 소박한 부처와 탑들. 그 어느 한 많은 이들이 정과 망치를 두들겨 대다가 미완의 모습으로 남기게 되었을까?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신비감만 안겨 줄 뿐 기록 한 줄 남기지 않은 그들은 과연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이 거대한 불사를 하였을까? 천불신앙은 참회신앙이라는데 무엇을 그리도 참회하여야만 했을까? 고려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 그야말로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운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처가 있으니 바로 거대한 와불이다. <와불님 뵈러 가는 길> 표시를 다라 산자락 올라가니 와불이 결코 아닌 와불(좌불, 입불의 미완성인 듯)이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다. 백톤은 족히 나갈 무게의 불상을 무슨 수로 일으켜 세우려고 비탈진 그곳에 조각했을까? 와불에서 칠성바위 쪽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돌을 떼어낸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계곡 왼편 산 허리께쯤에 위치한 일곱 개의 바위 또한 운주사의 신비를 더해주는 불적이다. 칠층석탑의 옥개석이라고도 하나 황선생은 북두칠성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듯한 모습이며 그 크기와 배치 각도는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가 흡사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칠성바위가 왜 운주사에 천불천탑과 함께 있어야만 했을까? 운주사의 모든 것은 그냥 고개만 갸우뚱거리게 할뿐이며 다만, “하늘의 북두칠성 앞에는 북극성이 있고, 일곱별 국자로 혼자 밝은 북극성을 드러나게 한 지혜가 돋보인다. 길을 찾는 지남철은 하늘에 있기 전에 사람의 마음에 있었던 것을 알겠다”는 이철수님의 글을 또 한번 떠 올리며 뉘엿거리는 겨울 해의 재촉을 받아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린다. 신비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리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기행기간동안 내내 친하게 지냈던 사야와 헤어지기 싫은 다설 살배기 미륵이란 녀석은 애꿎은 외투만 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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