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11 | [문화저널]
<제63회 백제기행>서울의 궁궐을 찾아서 _ 아름다운의 극치, 왕도의 꿈을 찾아 떠나다.
장춘실 진안 주천중 교사
(2005-01-25 15:47:28)
그 날 기린로 문화저널 앞 도로는 제법 북적거렸다. 작은 배낭을 맨 꼬마들의 재잘거림과 급히 뛰어오는 사람들의 몸놀림사이로 아직도 무얼 덜 챙겼는지 오르락 내르락 하는 문화저널 식구들은 정신없어 하는데, 김주간의 핸드폰은 다급하게 울어댔다.
98년 11월 21일, 토요일 낮2시 아름다움의 극치, 왕도의 꿈을 찾아 우리는 떠났다. 오백년 조선왕조의 심장을 향해서.
사실 ‘서울의 궁궐, 꼼꼼히 읽기’는 문화저널이 자존심을 걸고 준비한 98년의 마지막 백제기행이었다. “ 전문가가 안내하는 백제기행이라서” “ 요번에 참가하면 3년 개근상을 준다길래” “오랜 외국생활 탓에 몰랐던 우리 것을 아는 늦재미에 흠뻑” “보통 사람 못 들어간다는 창덕궁의 비원을 보려고” “한해의 마침표를 잘 좀 찍어 보려고”
가빴던 숨을 고르고 서로 나누는 인사에는 이번 여행에 거는 기대와 설레임이 절절했다. 그랬다! 꿈을 찾아 나선 이들은 오십여 명의 대가족이었으나 목표는 딱 하나, 정확히 알고 내눈으로 확인하고 마음 깊이 느껴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1박2일을 투자한 욕심꾼들이었다. 주말의 고속도로는 간혹 막히기도 했지만 지루한 줄을 몰랐다. 나눠준 자료를 꼼꼼히 읽고 백제기행 최고의 길라잡이 윤교수님의 강의를 듣는 새 차는 몽촌토성에 도착했다.
어둠에 덮히는 토성은 내 눈에 퍽 낭만적으로 보였다. 높지막한 언덕을 그대로 이용한 곡선의 성벽과 그 아래 나무기둥을 깎아 세운 목책,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 사이로 난 길은 적을 방어했던 성이 아니라 연인들의 산책길로 맞춤해 보였다. 설명을 들으니 이런 정도의 토성도 적과의 싸움에서는 방어선 구실을 톡톡히 해낸단다. 지형적으로 높은 언덕이라서 적을 내려다 보며 싸울 수도 잇고, 목책 또한 2-3미터로 말이 뛰어 넘을 수 없다고 한다. 여섯차례에 걸친 조사로 문헌 자료가 빈약한 초기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몽촌토성.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진과 남하를 꾀했을 삼국의 대결과 한성 백제시대의 옛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상상해 본다. 세발토기와 굽다리 접시를 들고 저녁 준비를 하는 옛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어둠속의 토성을 걸어보지 못한 아쉬움은 깔끔한 저녁식사로 얼마간 메워졌다. 백제기행 역사에 그런 고급스러운 곳에서 밥을 먹기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어뻔 분께서 서울 나들이를 한 답사팀을 위해 마련하신 자리라니 대접하는 이의 도타운 정을 헤아려 문화저널의 타락(?)을 용서 할 수밖에
식사 후 인사동에서의 한시간은 참으로 오붓했다. 저저금 흩어져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눈호사를 하며 길떠난 여유를 마음껏 누렸다. 우리 몇은 <귀천>에서 차 한잔 마시려던 계획이 어긋나 버렸다.
“야, 서울 사람들 의리 있구나.”
좁은 찻집이 꽉 차 잇어 들어서다 문간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시인의 아내는 곱게 늙어 가시고 낯빛도 편안해 보여 마음이 놓였다. 지상의 소풍 끝내고 하늘에서 놀고 계신 시인은 그러시겟지. ‘그래 술 대신 차라도 많이 마시거라. 요놈들.’
킴스 호텔에서의 밤시간은 재미나고 유익했다. 문화저널은 계속 우리를 감동시켰다. 무궁화 세 개짜리 호텔이라니! 오호 애재라. 그동안 개근하다 이번에 빠진 답사객은 참말이지 분하게 되었다. 순대국밥 아니면 짱둥어탕, 최고로 먹어본 게 죽도의 어죽이었을텐데... 어쨌거나 대우가 최고여서 야간 학습도 즐거웠다.
조경학 전공의 김재식 교수는 시작부터 웃음을 선물했다. 당신의 콧수염으로 조경의 진수를 보여주더니 슬라이드까지 사용해 재미난 강의로 졸음을 쫒아주었다.
조경의 미학적 측면에서 다음날 답사할 장소를 중심으로 특별과외를 받았다.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알려면 먼저 한국미를 전통을 이해해야한다. 완벽, 정교함, 화려함과 권위, 작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스럼과 단순함, 솔직하고 치기어린 미완의 솜씨에서 발견하는 무기교의 기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미술은 민중의 생활과 분리되지 않은 탓에 질박하고 돈후한 맛과 순진하고 구수한 아름다움이 두드러진다는 점과, 될 수 있으면 인공적인 것을 피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한국인의 사상이 배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전통경관의 구조적 특징이라는 여백의 공간, 자연과 환경과의 조화, 연속적 공간 체계와 위RP성, 선험적 공간형식과 연역적 사고, 배치의 불규칙적인 질서, 내부공간적 외부공간(마당) 및 외부 공간적 내부공간(ㅌ 마루), 대칭적 비대칭, 공간의 인간적 척도, 공간구조의 태극 음양원리 등을 꼽았다. 우리는 슬라이드 화면을 통해 다음날 찾게 될 답사 장소와 비교하며 심화학습을 받았다. 유난히 마당의 역할과 가치를 강조한 강의 덕에 아파트를 벗어나 내집 한번 지어 보겠다는 평생 소원을 지닌 이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한가지는 똑똑히 알았을 것이다. - 마당에 잔디 심으면 안된다누만-햇빛과 달의 정기를 잔디가 뺏어 간다는 말씀에 귀가 확 트인 탓이다. 도 하나의 흥미있는 발견은 조경학자는 대상이 얼마나 미적으로 아름다운가를 말하고, 인류학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힘주어 설명했다는 점이다.
간밤에 마신 홍주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산 산책마저 성공한 새벽 귀신들은 아침빕도 잘 먹더라. 네 살배기 이사야도 씩씩 용감하더라.
입장료 깎았다는 말에 혹해서 한복까지 떨쳐입은 극성파들을 앞세우고 드디어 창덕궁으로 입궐했다. 살작 내린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고궁은 고즈넉했다. 돈화문에서 인정전에 이세조가 후원을 넓혔고 임난때 불탄 것을 선조 40년에 중건, 다시 인조반정시 소실된 대부분의 전각들은 인조 25년 복구 완료 되었다. 역대 대왕이 정사를 살핀 인정전과 그 주위의 무랑, 대조전, 낙선재 등 창덕궁 내 13동 후원(비원)에28동 모두 41동이 남아있다. 창덕궁은 나의 눈에도 가슴에도 충분히 훌륭했다. 건물의 배치와 여백의 공간 확보, 화려한 듯 기품있는 앉음새는 왕실의 위엄과 권위가 고스란히 살려있어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과 사회적 규범이 그대로 살아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임을 알 수 있었다. 오봉산 일월도도 선명한 인전 앞 뜰에는 두 줄의 품계석이 나란히 남아 오백년 역사를 오롯이 증거 하고 잇었다. 그 옛날 이 자리에 줄지어 선 벼슬살이들은 오직 국사와 백성만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몇단계 앞선 품계석을 탐내었을까?
재촉하는 안내자를 따라 대조전을 거쳐 낙선재로 건너갔다. 아흔아홉 칸의 사대부집의 전형이라는 낙선재는 최근까지 왕실의 후손이 거쳐했던 곳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한 눈에 아름다운 집, 품격을 갖춘 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붕의 기왓골은 유려하고 추녀와 기둥, 방과 마루의 어울림은 옛 건축에 대한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냈다. 둥근 창에는 초겨울의 햇살이 머물고 담 너머 소나무와 굳이 음양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그저 기품 있고 뛰어나게 아름다운 집이 거기 있었다.
한국 최고의 정원으로 꼽는 창덕궁 후원은 잿빛의 도심속에 순금으로 간직되어 있었다. 영화당, 춘당대, 부용정, 어수문, 주합루, 제월풍관, 서향각, 희우정, 소요정같은 수많은 전각과 정자와 문무를 품은 정원에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눈으로 가슴으로 실컷 보고 느끼는 것이었다. 전각과 정자는 아담하고 작았다. 요란하거나 사치 한 것도 아니다. 비례와 균형,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도록 자리 잡은 것이다. 집도 나무도 꼭 있어야 할 자리에만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은 숨차게 빽빽하지 않았고 손이 간 흔적도 그리 없었다. 자연스러웠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정겨웠다. 특히 주합루 쪽에서 내려다 본 부용정은 나의 표현력 없음이 서글펐다. 이내 자욱한 봄날 저녁 글 있던 규장각 서사는 피곤한 눈을 들어 부용정 연못을 내려다 보았으리라. 어쩌나 연잎에 빗방울 듣는 날에는 아예 책을 접고 하염없이 보기만 했으리라. 참으로 정겹고 아늑한 풍경이었다. 부용정 난간에 기대어 눈쌓인 주합루쪽을 건너다 보며 찻물 끓는 소리를 듣는 일은 그 얼마나 그윽하고 운치가 있었을까. 차라리 입을 다물고 못 속의 작은 섬에 졸리운 듯 누운 소나무나 보리라.
창경궁, 경복궁을 돌아 보면서 왕의 침전에는 용마루가 없다는 것, 궁궐의 추녀 위에 올려 놓은 장식 토우들이 현장법사 일행일 것이라는 재미난 사실들을 알았다. 장대석을 사용해 쌓은 계단과 정원의 축대, 굴뚝의 아담한 처리와 마감은 한국건축의 또하나의 미감이라 말한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석 비슷한 돌들을 마름모꼴이나 삼각형으로 쌓고 시멘트로 이어 바른 것은 일본식이라니 그동안의 무지가 부끄럽기만 했다. 흘러내린 산자락에 키를 맞춘 꽃담과 담쟁이 잎새에 가린 작은 totans에 드러난 선조들의 미의식을 읽으며 우리 답사팀은 종묘를 찾았다.
현재와 과거,
삶과 죽음을 잇는 영원의 공간 종묘, 사직의 존폐로 표현된 조선왕조는 유학을 통치 기반으로 삼았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tlsdnl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하는 곳으로 왕가의 사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사직은 국토의 신인 사(社)와 오곡의 신인 직(직)에게 국태민안을 비는 장소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의 건설은 정치이념상 유교적 의례와 통치질서 국가기강의 완성과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태조는 한양천도 후 궁궐의 위치를 정한 뒤 도성안 동쪽에 종묘 서편에 사직을 정하였다. 오늘날 정전과 영녕전을 합쳐 종묘라 부르며 정전에는 49위 신위를 19신실에 모시었고 영녕전에는 모두 34신위를 16신실에 모셨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두 곳 모두에서 제외 되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절대 권력자들이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정문인 신문을 들어서자 동서 109미터 남북69미터나 되는 넓은 월대가 공중에 뜬 것처럼 펼쳐있고 월대의 가운데는 신실로 통하는 신로가 나 있으며 그 끝에 기단이 설치 되어 있었다. 정전은 엄숙하였다. 궁궐보다 낮은 맞배 지붕에 주칠의 기둥들은 신성과 경건함이 배어나고 단순한 구성, 반복과 대칭수법, 기품있는 공간처리의 세련됨은 내면의 상징성 마저 보여준다. 중국 일본관느 또다른 한국인의 특별한 효사상이 집약된 표상이었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산자와 죽은 자의 영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신성한 장소로써 종묘는 그 건축미와 가치가 인정돼 1995년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우리의 문화유산이 세계인류 전체를 위해 보존하고 보호할 보편적 가치로 인정 받은 것이다.
종묘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보는 이에게 특별한 감동을 줄 것 같았다. 건축학도는 단순함과 힘찬 구조에서 유학자는 그 정신의 신령스러움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지 않았을까 싶었다. 몇 달전 국립미술관에서 배병우님이; 찍은 종묘사진을 보았을때 대단히 아름다운 건물이라 느꼈다. 그리고 직접 나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어둠속의 종묘, 눈내린날의 종묘를 훗날 다시 와 보리라 생각하며 절제와 단순함으로 오히려 엄숙한 정전을 여러번 돌아 보았다.
반가운 분들의 환대를 받은 점심 후의 국립민속박물관 관람도 너무나 알찼다. 이종철 관장님께서 직접 안내를 해 주셨고 영사실에서 도움 말씀도 자상했다. 소탈한 웃음으로 끔까지 참여하신 고향의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이 돼 주셨다. 훗날 아이들은 기억 할 것이다. 자랑스러움과 기쁜 추억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로 세계10위권에 드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오백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서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을 비롯 수많은 궁궐과 문루 등 유형 무형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오늘 서운은 매연과 소음으로 찌들고 무지막한 개발 논리에 밀려 유적과 문화ㅣ재가 파괴되고 있지만 겨레의 젖줄인 한강과 함께 온전히 후손에게 물려 줄 국토의 심장이다. 문화저널이 98년도 마지막 기행을 서울로 잡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어제에서 오늘을, 오늘에서 내일을 읽어 낼 수 잇다면 우리들의 서울을 어떤식으로 가꾸고 지켜가야 할지 분명해 진다. “내가 원하는 나라는 강대국도 아니요, 부자 나라도 아니다 오직 문화의 힘이 강한 나라, 문화대국 문화민족이다”라고 쓴 백범일지의 한 구절을 생각해 본다.
기우는 초겨울의 해를 따라 우리의 기행도 마무리에 들어갔다. 모처럼 눈앞이 시원하고 가슴 뜨거웠던 감동과 설레임을 오래 간직하리라 전생의 내집이라 그런지 낯익은 길이라며 능청을 부리던 희영씨는 그날밤 달빛쏟아지는 창덕궁의 월대나 부용정이 보이는 후원을 스란치마 끌며 걷는 꿈을 꾸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