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길을 나섰다. 수건, 칫솔 따위를 챙겨 넣으면서 가벼운 흥분에 가슴이 뛰었다. 문화저널의 ‘명품’ 백제기행을 60여차례나 지켜보면서도 한번도 따라나서지 못했던 터라 무언가를 ‘처음’ 대한다는 기분 때문이리라. 작심하고 행장을 단단히 꾸려 떠나는 본격 여행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단체여행에서 익명의 대열에 몸을 숨기고 술렁술렁 다니는 여행의 맛 또한 남다른 법이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가족을 떨구고 혼자가 아닌가. 여행길에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어 안내를 맡아줄 이를 따라 적당히 게으름 피워도 어딘가를 갈 수 있다는 것은 그 편안한 느낌이 꼭 나른한 가을 오후의 햇살을 쬐는 것 같다.예정을 조금 넘긴 2시 12분, 출발하면서 일행을 세어보니 아이들까지 더하여 스물 다섯. 단촐한 출발이다. ‘고참’ 백제기행 매니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많이 빠졌다고 한다. 동행인들이 서로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는 의례적 절차때 보니 나만 ‘초행’이지 대부분 관록이 붙은 기행 매니아들이다. 군산에서 진안에서 정읍에서 남원에서 이사람들을 한달음에 뛰어오게 하는 매력은 무엇일까. 수원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정조와 화성(華城)이다. 정조는 권력투쟁의 와중에 희생된 자신의 생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명분으로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론세력의 영향력이 깊이 뿌리를 내린 한양을 떠나 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했다. 집권 18년째인 1794년 축성공사를 시작, 2년만에 준공된 화성은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의 이론을 설계의 기본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체제공의 주관 아래 이룩되었는데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도 치밀하고 우아한 면모를 갖춘 성곽으로 꼽힌다고 한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돌과 벽돌을 섞어 쓰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물 뿐만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하여 적은 경비와 노력으로 2년반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석재나 목재를 나르고 흙을 옮기는 인부들 모두를 강제 사역동원이 아닌 노임을 주는 지방민을 썼다는 기록에서는 정조를 정점으로 하는 당시 개혁지향세력의 면모를 새삼 확인하게 해준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축성이라 할 수 있는 수원성곽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새 도읍지로서 그 원래의 용도를 찾지 못했다. 화성을 지은 뒤 백년후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정조의 개혁이 뿌리를 내려 정조와 함께 했던 개혁주체세력의 구상이 현실화되었더라면 우리의 근대화 전략도 달라졌을 터이고 민족의 근현대사도 크게 방향을 달리 했을 것이라는 가정에 생각이 미치자 화성을 이루고 있는 돌 하나하나에 ‘못다 이룬 꿈’들이 서려 있는 것만 같아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꿈은 스러졌지만 성은 남아 옛 선인들과 오늘의 우리를 말없이 이어주고 있지 않은가.전주의 풍남문처럼 영동시장 한복판에 위치한 남문 팔달문에서 출발한 우리는 서남암문(西南暗門 :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하거나 군수품을 조달하는데 필요한 문)→서남각루(角樓: 성의 모퉁이에 지은 누대)→서장대(西將臺 : 팔달산 정상의 높은 위치에 있어 수원성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서북각루→화서문→북포루를 거쳐 북문인 장안문(長安門)까지 두시간 여를 내처 걸었다. 도시 한복판에 이렇게 긴 시간을 걸을 수 있는 옛 유적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장안문 근처에서는 성의 외곽을 따라 수목과 잔디가 어우러진 가운데 벤취에 앉아 늦여름의 정취를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문화유산 수원 화성은 이렇게 사람들 가까이 있었다. 군데군데 별 생각없이 시멘트로 땜질하여 눈에 거슬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산과 성,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것 하나만으로도 수원은 살고 싶어지는 고장이다. 수원의 밤풍경을 내려다보며 장안문에 올라서니 어디선가 갈비냄새가 밀려온다. 여행객의 주린 배를 자극하는 이 냄새에도 ‘문화’가 있다. 수원시는 수원의 명물인 ‘수원갈비’와 금난새 씨가 지휘자로 있는 수원시향을 하나의 문화상품으로 엮어 2만원의 티켓으로 판매했다. ‘고상한’ 연주회와 마늘냄새 나는 갈비를 묶는다는 것 자체가 불협화음일 것 같은데도 정작 수원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갈비와 음악 감상의 결합, 얼마나 열린 발상인가. 지난 민선시장 시절에 수원시가 정력적으로 밀어부친 사업 중에 하나가 아름다운 화장실 갖기 운동이었다. 공공시설의 화장실부터 바꾸자는 이 운동의 결과인지 화성 안에 있는 공중 화장실은 깨끗할 뿐만 아니라 화장지까지(!) 제대로 걸려 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음식점 ‘선농단 설렁탕’집의 화장실 역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수원을 알리는 각종 팜플릿과 2002년 월드컵 유치 홍보책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국물만 덜렁 담아논 그릇에 사리 따로 양념 따로 내준 이 집의 음식맛도 일품이었지만 나는 이 집의 화장실과 주인에게서 감동을 받았다. 전형적인 ‘공무원 감각’으로 만든 전주시의 월드컵 홍보책자(“전주는 ‘접근성’이 뛰어납니다.” 잠시 생각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되지만 전혀 감동이 없는 이런 문구 투성이 책자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까?)에 비해 수원의 장점을 잘 정리된 카피와 사진, 고품위의 인쇄로 마무리한 금색 표지의 홍보책자가 눈에 들어와 주인에게 한 부 구할 수 없겠냐고 물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선농단 주인장은 명함을 주시면 꼭 구해서 부쳐드리겠다고 친절하게 대꾸하더니 곧바로 ‘혹 못구할 수도 있으니 들고 계신 그 책자를 그냥 가져가시면 어떠냐’고 한다. 수원을 다녀온 1주일 뒤 필자는 이 주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때 가져가신 책자가 더 필요하시면 부쳐드리겠노라고, 우리 집 음식이 전주분들의 입맛에 맞았는지 모르겠는데 다음에 수원에 오실 때 다시 들러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전화를 끊고 나는 그 고장의 인상을 결정짓는 것은 멋있는 건물도, 입맛을 다시게 하는 음식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생각을 새삼 다지게 되었다. 수원을 찾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쯤 이 집에 들러 설렁탕의 맛과 수원사람의 향기를 함께 느껴보시길! (☎ 0331-247-6644)밤의 도로를 내달려 강화도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40분. 전등사 앞에서 술 한잔 어떠냐는 유혹을 물리치고 스스르 잠이 들었다. 에어컨에서 내뿜는 공기가 벌써 차갑다.강화(江華)의 아침 공기는 참 좋다. 육지와 바로 연결되어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어선지 몰라도 섬에 와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포대를 돌며 바다를 눈앞에 두기 전까지는.‘강화’하면 고려의 항몽수도,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외세와의 지난한 항쟁의 역사가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이곳은 서울을 지키는 수도 방위의 전초지이자 천연의 요새라는 지정학적 특성이 섬의 운명을 결정지은 곳이다. 그러나 어떤 곳이든 각자의 특별한 사연이 깃들면서 저마다 독특한 변주를 내게 마련인 법. 내게 강화는 문학이다. 학교시절 즐겨 읽던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후기였던가. 강화 북쪽 건너편 땅이 지금은 갈 수 없는 개풍군. 그곳이 고향땅인 박완서 선생은 자신의 오빠이자 엄마의 아들을 앗아간 전쟁의 상흔을 그린 이 작품에서 어머니의 평생을 사로잡은 ‘참척’의 신산을 지켜보는 고통을 고백한 뒤 강화의 언덕에 서서 하염없이 바다 건너편을 바라보는 심경을 적은 바 있다. 그 글을 읽고난 뒤 강화는 내게 지울 수 없는 분단의 상처를 안고 사는 전쟁세대 그 자체와 같은 이미지로 오래 박혀 있었다. 아침 식전에 오른 전등사(傳燈寺)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오니 1천 6백년이 넘는 고찰이다. 조선 철종때 중건된 대웅전은 단층 팔작집인데 지붕을 중시한 조선건축을 반영하여 지붕이 화려하여 겉보기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내 주저앉을 것 같지만 무게를 분산시키는 여러 공포 구조 때문에 안전하다고 한다. 대웅전 지붕을 꼼꼼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네 추녀 끝에 벌거벗은 여자가 지붕을 지고 있는 형상으로 웅크리고 있는 조각이 눈에 띈다. 이 절을 중수할 당시 절을 맡아 짓는 도편수가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자의 배신을 증오하여 깍아 넣었다고 전해오는데 자비를 기원하는 절 맨위에 증오의 표상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역설은 또 무엇인가. 전등사는 입구의 수목에서 본 건물까지 그 명성만큼 화려하지도 아늑하지도 않은 작고 평범한 절이다.전등사를 떠나 광성보와 고려궁지→강화산성→갑곶돈대로, 역사와 건축을 교차하면서 꼼꼼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 박영민 선생을 따라 역사의 흔적들을 돌아보는 동안 곳곳에 설치된 매표소에 짜증이 났다. 역사적 의미를 떠나 본다면 별로 돌아볼 것도 없는 유적지, 그것도 한참 사후에 적당히 복원된 ‘터’ 관리를 핑계로 관광객들을 옭아매는 이런 문화정책은 좀 고쳐야 될 것 같다. 그만그만한 유적지라면 여러 곳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관람표로 다 돌아볼 수 있게 하거나 아니면 과감히 무료화 해야 한다. 광성보에서 본 사정거리 7백미터 홍이포, 3백미터 소포는 백여년이 지난 후손들인 우리들에게 시대를 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쓸쓸함을 던져 주었다.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국 함대에 맞서 겨우 7백미터를 나가는 재래식 포(그것도 고정식)로 저항하다가 자유자재로 쏴대는 함포사격에 처참하게 도륙당했을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쓰러지는 모습들이 그 재래식 포위로 오버랩된다. 갑곶돈대 역사관에 걸려있던 모조품 帥자 대형깃발(당시 미군이 강탈, 현재 미국 해군박물관에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을 올려다보는 심정도 그러했다. 가능했던 내부 개혁의 기회를 살려내지 못한 대가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내주어야 했던 근세 1백년 우리 역사의 물줄기에서 정조 개혁의 의지, 수원 화성과 이 초라한 3백미터 짜리 소포가 만난다. 그 둘을 동시에 바라보는 우리들이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또한 개혁으로 사느냐, 수구로 무너지느냐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갈림길이 아닐까. 술렁술렁 나섰던 기행에서 또 다시 무거운 역사의 무게를 느끼는 ‘고단함’을 싣고 버스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달린다. 이름도 괴상한 리베, 베가본걖?모텔천국의 경기도를 거쳐 다시 다닥다닥 연립주택과 공단이 연이어지는 인천으로, 화성과 평택을 지나 간조로 드러난 끝없는 뻘이 인상적인 아산만 방조제의 오후 풍광에서 잠깐 숨을 돌린 뒤, 공주, 논산을 거치는 동안 이윽고 어두워진 고속도로.저 깜깜한 어둠속에 <호남제일문>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친 우리가 오늘의 역사를 사는 곳, 전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