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8.7 | [문화저널]
<제 61회 백제기행>기와 천년, 너와 만년의 삶이 거기 있었다 _ 옛집기행 ③ (강원도 강릉 삼척일대 ‘너와집과 굴피집을 찾아서’)
은경 광장서림 대표 (2005-01-25 15:42:24)
한낮의 대관령 고개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한참을 차로 달려 도착한 곳은 ‘참소리 박물관’. 숲속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을 거라는 기행 식구들의 생각을 뒤엎고 박물관은 아파트주택사이에 창고 같은 어색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곳엔 아주 오래된 축음기에서 현대 음향기까지 소리의 시작부터 소리의 변화, 발전과정이 고스란히 전시돼 있었다. 또 아주 오래된 골동품이지만 전시기기들은 살아있는 소리를 갖고 있었고 에디슨이 최초로 만든 축음기와 최초의 텔레비전도 일행의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멀티폰 오퍼레이팅사가 만든 멀티폰은 세계에 두 대 밖에 없는데 그 중 한 대가 개인 소장으로 이 박물관에 있었다. 처음 들어서면 아름다운 가구 전시장에 온 듯하지만 제각기 소리를 갖고 있었으며 답사 일원 중에 가장 나이기 어린 민지가 앙증맞은 의자에 앉으니 해맑은 웃음이 엉덩이로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소리 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소리들 어느 것 하나도 우리의 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없어 아쉬웠다. 오죽헌으로 이동하는 중에 건축이야기를 들려주실 경동대 최영철 교수님이 합류했다. 대나무가 까맣다 해서 오죽헌이라 했던가. 까만 대나무가 있다 해서 오죽헌이라 했던가. 넓은 광장문을 지나 한참이나 걸어 계단을 오르면, 시서예(詩書禮)가 보인다. 자녀 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대사회까지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고 있는 신사임당의 탄생지. 구국 애족의 대선각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콘크리트 건물로 변해있어 옛집의 정취는 사라진 모습이 아쉬웠다. 그러나 사회 개방화 속에서 이 어지러운 현세에 드러나는 모습보다 안으로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깊음이 묻어나는 이미지를 우리네 여성들은 조금은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교훈을 되새길 수 있었다. 강릉하면 바다가 떠오르지만 선교장 앞길 맞은 편에는 바다가 아닌 푸른 들녘이 해저무는 바람을 맞으며 물결치는 광경이 펼쳐진다. 조선 후기 양반집으로 으뜸가는 아흔아홉칸짜리 집인 선교장은 18세기 초에 살기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8대째 이어져 내려오며 후손이 살고 있다고 한다. 행랑채를 들어서면 동별당과 서별당이 ‘ㄱ'자형과 ’ㅂ'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왼쪽으로는 사랑채인 열화당이 있다. 후원은 나무가 울창한 산속이고 전체적으로 꾸밈은 없으나 간결한 옛 양반집의 당당한 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곳이다. 또한 후손의 돌봄이 있어 그런지 훈훈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엄마, 이집은 명당인가봐”. 집앞이 넓고 훤하다는 이유로 명당자리 운운하는 딸아이의 말을 듣고보니 풍수지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집앞이 넓게 트이고, 행랑채 앞 가꾸어놓은 채소밭이랑, 조금 떨어진 곳에 파놓은 연못을 보면서 딸아이와 같은 생각을 해봤다. 연못가에는 활쾌정이란 정자가 고고히 서있고 연못 속에는 꽃이 피기는 아직 일러 연잎만 가득했다. 어슴프레 한 저녁시간과 맞아 떨어져 정자는 꽤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차타는 시간과 답사하는 시간이 거의 같아 우리는 지쳐 있었다. 배도 고프고, 솜씨 좋은 맛에 길들여진 전라도 사람들은 어딜가나 좀 티를 낸다. 여정을 함께한 창원정판사 송창의 사장님이 집에서 담아온 김치가 없었던들 강릉의 순두부백반은 정말 맛없는 식사꺼리였음에 분명하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숙소로 이동했다. 밤이 깊어졌을 때쯤 우리는 그리 크지도 않은 방에 촘촘히 모여앉아 경동대 최영철 교수님의 ‘영동지방의 주거’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다. 주거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형태나 구조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평면상으로 홑집과 겹집, 벽체의 구성재료, 또는 시공에 따라 귀틀집, 판자집, 토벽집 등으로 구분되며 지붕의 형태로 우진각, 맞배, 팔작, 모임, 지붕 등으로 구분된다. 또 지붕의 재료에 따라 초가집, 새집, 너와집, 굴피집, 겨릅집, 청석집, 기와집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된다. 특히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볼 때, 영동지방의 주거는 지역적 특성이 아주 강하게 나타난다. 너와집, 굴피집으로 알려져 있는 영동지방의 주거를 말함이다. 여행을 할 때 이론을 알고 그 사물을 본다면 그 느낌이 감칠맛 날 때가 있다. 교수님의 강의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명당이란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터를 명당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획일적인 주거문화 형태에서 그 사람의 향기가 우러나는 집의 문화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이어진 순서는 최동현 교수님의 우리소리 배우기 시간이었다. 그 재미있는 소리이야기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있던 우리들은 첫째날의 일정이 마감되는 순간 갑자기 엄습해온 피로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5시에 일어나 어제 하루내 익숙해진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이른 새벽 바다로 가는 길. 모래시계로 유명해진 정동진역 가는 길에 얼마 전 침몰됐다는 북한의 잠수함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북한의 잠수함이 고체덩어리로 해안가에 있었다. 정동진역이 알려지기 전에는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간이역으로 몇몇 사람만이 간간이 이곳을 찾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이 한번쯤은 연인과 함께 찾아오는 관광코스가 돼 버려서 이른 아침인데도 우리보다 먼저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로 북적였다. 열차가 달려와 또 많은 사람들을 내려놓고 간다. 잔잔하기만한 바다는 말이 없는데, 사람들만이 그 바다를 말하곤 할 것이다.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딸아이와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서듯 죽서루로 향했다. 매표소 앞에서는 관리인인 듯한 아줌마가 어둠을 걷어내듯 입구를 비질하고 있었다. 계단에 오르니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널찍한 마당에 이끼 낀 바둑판 바닥이 정교하게 깔려 있었고 이슬을 머금은 하얀 무궁화꽃이 아침 단장을 하고 운백의 아름다움을 피워내고 있었다. 죽서루. 고려 충렬왕 때 학자인 이승휴 선생이 벼슬에 뜻이 없어 두타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창건한 누각이다. 조선 태종 3년(1403) 삼척부사 김화손이 중건하였으며 누각 동쪽에 죽장사라는 절과 병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었던 곳이라하여 죽서루라 불린다. 루에 오르니 앞에는 탁 트인 오십천강이 흐르고 옆에는 자연석들이 그대로 어우러져 있었다. 주택가에 인접해 있었는데도 깊은 산속에 와 있는 듯한 멋과 여유가 느껴졌다. 누각에서 시나 시조를 읊고 풍류와 사색에 잠겼다는 옛선조들과 비교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무엇을 향하여 쫓기며 가는지 참말 아쉬울 때가 있다. 더디가도 길은 가건만…. 나는 이 누각에서 작설차 한잔 했으면 하고 생각했다. 님도 좋고 벗도 좋고, 오십천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어깨에 맨 짐을 내려놓은 채 맘 풀어 놓고 여보게 차나 한잔 하시게, 라고 하고 싶었다. 산좋고 물좋은 태백산 줄기 산마을 가는 길은 구불구불 깊은 계곡 옆에 있었다. 차창으로 내려다 보이는 절벽은 아찔하고 하늘은 넓게 트였다. 야트막한 산 밭에는 보라색, 하얀색 도라지 꽃이 한창이다. 삼척 땅 대이리로 접어든다. 대이리는 화전민 촌이었다. 통방아가 있고 약초도 캐고…. 아주 전형적인 산골이다. 너와집 가는 길목에 지난해 10월, 동굴의 침묵을 깨고 모습을 드러낸 환선굴은 어느 부족이 살아도 될만큼 넓었다. 종유석과 석순, 가는 물줄기부터 콰하고 떨어지는 폭포수까지 모두가 잘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보는이들의 넋을 뺀다. 이전에는 발길이 쉽게 닿지 않은 오지마을이었을 것이다. 저녘나절 집집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면 풍경이 그림 같았을 그런 산마을이다. 그러나 환선굴을 개발해놓은 덕분에 눅눅한 흙길이 아닌 포장된 도로에서 몇걸음 떨어진 곳에 너와집이 있었다. 시인 박남준 선생님이 손에 편지를 들고 앞장서신다. 눅진한 마당에 손님이 와도 짖지 않는 개가 있고 방문 열고 앉아계시는 주인 할아버지 이종옥(82)님은 박남준 선생님이 들고 온 봉지를 받아들고 맘껏 구경하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부엌과 소외양간이 겸해있는 낯선 구조이다 워낙 추운 산간지방이라 사람과 소가 식생활을 함께 했나보다. 지붕을 보자. 나무가 흔한 곳이기 때문에 통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지붕을 덮은 너와지붕은 추위에 강하고 여름에는 습기를 먹어 시원하단다. 굴피집은 나무껍질을 벗겨서 지붕을 씌운다. 또 하나, 너와집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방안의 코굴. 벽난로를 겸하는 이것은 인공의 불빛이 아닌 자연의 불빛으로 방안을 환하게 비추는데 쓰인다고 한다. 코처럼 생겼다 해서 코굴이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거기에 불을 지피면 방안을 적당히 밝혀주면서 연기는 부엌으로 빠져나간단다. 옛분들은 어찌 그리 지혜로웠을까. 너와집은 이종옥 할아버지께서 혼자사시고 이웃한 굴피집은 현재 문화재보호라는 사정으로 원형을 보존한 채 먹거리 손님을 받고 있다. 지금은 단 두채 밖에 남아있지 않은 굴피집과 너와집. 자연과 사람이 같이 숨쉬고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왔던 집. 자연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져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받고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 함부로 허물고 끝없이 학대하고 있다. 기와천년, 너와 만년이라 했던가. 집의 형태만 보존할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체취 까지도 함께 남겨 놓아야 할 것이다. 여행은 되돌아옴이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떠나고 또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여유일 것이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집을 나서 달이 뜨면 집에 오는 딸아이와 모처럼 팔짱끼고 손을 잡고 긴 시간을 넉넉하게 나눈 시간이 즐거웠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