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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 | [교사일기]
친구같은 만남이 좋다.
백명종 서울 개일초등학교 교사(2003-04-07 14:19:05)
저녁 7시. "지금 학원 가는 중..." 학교에서 간만에 일찍 돌아와서 단 꿈을 꾸고 있을 때 문자 메시지가 하나 왔다. 며칠 후면 공개 수업일이라 지도안을 짜고 자료를 찾느라 날밤을 샌 몹시 곤함 때문인지 비몽사몽 설핏 잠결에 확인한 내용이었다. "샘! 저 xx인데염..핸폰 다시 가입했어염" 며칠 전에는 이런 메시지가 왔었다. 전화를 해 봤더니 그냥 핸드폰이 생겨서 심심해서 한 번 해 본 것이란 싱거운 말을 한다. 하하. 그래 아무렴 심심해서 하건 아니건 그게 무슨 문제가 될 수 있으랴? 난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오우, xx. 반갑다야. 정말 오래간만인데? 근데 요새 잘 지내지? 다른 친구들은? 중간고사는 잘 나왔어? 야, 중학생이 무슨 핸드폰이냐? 음..저 번에 사 준 시계 있지? 고맙다야. 정말 예쁘던데..정말 딱 맘에 들더라야. 잘 쓸께. 여튼 잘 지내고 그래 담에 한 번 보자" 나도 틀에 박힌 인사를 했다. 3년.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벌써 어줍잖은 선생님 생활을 한지 3년째가 되었다. 처음엔 몹시도 부끄럽고 또 당황스럽고 어색했지만 얼마되지 않은 시간동안 '선생님'이란 호칭은 자연스러워졌고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일부가 되고 생활이 되어 버린 교직이지만 내 자신이 '선생님'이라는 생각을 하면 한없이 작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기계처럼 '선생님'하고 부를 때는 당연한 듯이 받아 들이다가도 스스로에게 '선생님?'이라는 자문을 하면 부끄러워지는 것일까? 다시 저녁 10시 30분.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xx인데요. 밤 늦게 죄송해요. 근데요 저 숙제가 있어서 전화했거든요. 다른게 아니라 우리 선생님(중학교)이 선생님, 가족,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생각하는지 알아 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그거 물어 볼려고 전화했는데..선생님, 몇 가지만 얘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음. 그거? 곰탱이라고 적어 가라" "샘, 장난치지 말고요. 선생님이 그러시는데요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대요" 순간 잠시 멈칫한다. "그러니까 곰탱이 푸우(그 아이가 좋아했던 캐릭터)라고 적어가라니깐. 그리고 곰탱이 푸우하면 연상되는 그런 것들 적어 가" 또 나는 쉽게 대답해 버렸다. 순진한 그 아이는 그거조차 받아 적는 모양이다. 하하. 이런!!! 실은 내가 아는 그 아이는 마음이 따뜻하고 정말 귀엽고 예쁜 친구이다. 볼 살이 통통해서 정말 '푸우'를 어림하게 하는 깜찍한 친구이다. 작년 6학년 때 반 회장을 하면서 '제가 하죠.'라는 말을 선뜻 나서서 하는 아이였고, 내가 작년 무릎 수술을 받고 병원 누워 있을 때에도 가장 먼저 면회를 왔던 친구이기도 하다. 가끔 '아줌마'라고 놀려도 기 죽지 않고, 오히려 나를 깎아 내리며 쉽게 대면하는 것도 있었지만 겨울에 춥게 다닐까봐 주는 거라며 목도리 선물을 하는 아이.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 접는 조그만 종이에 나에 대한 한마디씩을 적어 '그동안 샘께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것'이라며 느즈막히 건네 주던 아이. 그렇게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마음을 가진 아이.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서글서글하게 다가갈 수 있는 아이였다. 예전에 그 아이가 이메일을 보내 왔을 때 난 솔직한 속내를 농담처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너를 만난 건 나에게 행운이었던 것 같다"라고. 얼마 전에 스승의 날을 보냈다. 연일 방송에서는 교육방송 특집을 만들어 보내며 요란을 떨어댔다. 뉴스에서는 스승의 날 서울의 40% 정도의 학교가 재량 휴일을 보낸다며 말도 많은 모양이었다. 나를 아는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너네 학교는 이 번에 안 쉬었냐?" "요번에 많이 받았겠네?" 나는 "그래"하고 슬렁 받아 넘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순간 혼동스럽다. 그냥 해 보는 겉치레 말일 뿐인데 심약한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걷다가도 전철을 타다가도 수업을 하다가도 아이들을 보다가도 문득 문득 그 말의 예리한 적나라한 물음에 놀란다. 그 때마다 차라리 이런 스승의 날이 없었다면? 차라리 그 날 하루 쉬었으면? 좀 더 맘 편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모르겠다. 어차피 또 연례 행사처럼 그렇게 스쳐갈 것인데.... '참 스승'이 되라. 나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난 참 스승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사람들이 정의하는 참 스승. 공부 잘 가르치고 아이들 마음을 이해해 주며, 바른 길로 인도하고, 속된 것에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그런 사람. 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그런 모습이다. 나는 스스로는 잘 가르치려고 하고 있고, 아이들과 늘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한 번도 나쁜 아이가 되라고 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많은 정성을 쏟고 또 그 정성이 헛되지 않음을 늘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게 누구나 그리고 늘 나의 마음 같지 않고 또 아이들의 변화가 바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지라 지금 상태의 나의 모습은 도저히 일반 사람들이 얘기하는 참 스승의 모습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다. 더더욱 나를 궁색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아이들이 바르고 훌륭한 아이로 자랐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다.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는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볼썽사나운 자리가 되고 말았다. 많은 일반사람들에게는 내가 있는 '선생님'의 자리가 전혀 탐탁지 않은 자리인 것이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나는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호수같은 그 아이 말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날,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얘길 들어보면 자신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건 내가 바라던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다. 난 또 부끄러워진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심심해서 함 해 봤어요" 그래 심심해서 했든지 아니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난 그저 반가울 따름이었다. 왜 전화를 했냐고 묻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난 가르쳤고, 분명한 건 그 아이와 내가 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일 뿐 그 아이와 나 사이에는 반드시 일반 사람들의 '참 스승'에 대한 정의나, 혹은 한 번 스치고 지나가는 연례 행사가 큰 의미를 지닌 것만은 아니었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알듯 말듯한 온기. 난 그것이 좋았다. 간혹 함부로 재단되어지고 회자되는 말들의 현혹함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선생'과 '제자' 사이의 대화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편하게 이유 없이 전화하고 또 받아 주고...장난도 치고 받고 또 간혼 실없이 웃기도 하고. 그런 편한 만남. 나는 지금 헨델의 '라르고'를 듣고 있다. 피아노를 하는 아내가 좋아하는 곡인데 들을수록 나는 그 따스함에 흠뻑 젖어든다. 우리네 삶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따스하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라르고'를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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