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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 | [문화저널]
<제56회 백제기행>한반도 중추에 꽃핀 백제문화를 찾아 (공주ㆍ부여 편)
강미경 전북대 치과대학 조교 (2005-01-25 15:25:14)
공주와 부여는 이번이 두 번째의 방문이었다. 첫 번째 나의 방문은 초등학교 시절의 수학 여행길이었다. 금강 줄기 돌아가는 시골 초등학교의 낡은 교사에서 전해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백제 문화의 모든 것이 모여 있다는 옛 도읍, 부여와 공주. 충격들이 뇌리에 각인 되었고, 그 후 어느새 나에게 친근하게 자리잡았다. 9월 27일 토요일 우진문화공간 앞. 바쁘게 서둘러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가 조금 못미쳐서였다. 여름을 지나 이제 막 가을에 접어든 9월의 하늘은 여전히 다사로운 햇살을 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내린 비에 제법 가을 냄새가 묻어나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카메라의 조리개를 조절하며 담소하는 이들은 대학생인 듯 했다. 아빠의 양손을 잡고 제법 의젓하게 서 있는 꼬마들. 밤색이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중년의 아주머니, 양갈래로 땋아 내린 긴 머리가 여간 똘똘해 보이지 않는 여자아이는 아빠의 손에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저마다 서로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들. 백제 기행에 처음으로 끼어든 나에게는 대부분이 낯선 얼굴들이었다. 우리들을 태운 버스는 고속도로를 따라 부여로 향했다. 고속도로 양 옆으로 펼쳐지는 황금들녘의 풍성함이 넉넉함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가을이었다. 차안에서 자기 소개를 하며, 한시간 반 남짓 달려 도달한 곳은 공주였다. 처음 답사지인 대통사지로 가는 길은 이정표도 제대로 없어 여러번 버스를 되돌려야 했다. 어렵게 찾아간 대통사지는 공주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 성왕때 창건되었다는 대통사는 이제 그 모습이 간곳없고 빽빽이 들어찬 주택들 사이에 당간 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 옛날의 위엄이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함께 발견된 백제때의 석조 한쌍과 연화문와당은 공주 박물관으로 옮겨지고, 절터임을 알려주는 당간 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란다. 홀로 남아 우둑서있는 당간 지주에서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묻어났다. 다음 답사지는 공산성이었다. 공산성은 생각보다 작았다. 백제는 금강 때문에 두 번째 도읍지로 공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토성과 석성이 섞여 있는 공산성은 삼면이 금강과 접해 있고 남쪽만이 넓은 들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다가는 급경사로 이어지는 토성을 올라서니 금강을 등지고 남쪽으로 추정 왕궁터가 눈에 들어찼다. 초석없이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세워 건물을 증축했다는 왕궁터에는 희미하기는 하나 잘 가꾸어진 잔디 사이로 기둥 구멍이 있었다. 물을 저장했을 것이라는 연못은 마치 질그릇을 확대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쌍수정과 추정 왕궁터, 연못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은 조용하기만 했다. 취리산 제ㆍ라 회맹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였다. 취라산은 백제의 제경이 이루어진 곳으로서, 백제 멸망 직후 부여인들의 원성을 무마시키고 신라의 백제 지역에 대한 욕망을 억제시키고자 당나라에서 회맹을 유도하여 이곳에서 동맹서약이 이루어진 곳으로 전해지는 지역이라한다. 이 동맹의식은 웅진도독 부여륭과 신라 문왕간의 동등한 입장으로 이루어졌단다. 비록 망하기는 했으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백제의 내재된 힘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버스를 돌려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부여유스호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장을 풀고, 한반도의 중추에 꽃핀 백제의 문화에 대하여 윤덕향 교수님의 간단한 강의를 들었다. “한강의 언저리에서 태어나 한강수를 어미젖 삼아 성장한 백제는, 그 후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릅니다. 백제 문화는 이웃하고 있는 신라나 고구려와는 사뭇 다른 문화를 이룩하였는데, 그들의 세련되고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문화는 실로 수준 높은 경지에 이르러 주변 국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멋은 정리되지 않은 듯한 그래서 미처 완성되지 않은 듯한 것으로 인식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중후하고 단아한 백제 문화는 기본적인 규칙을 준수하면서, 신라와의 정치적인 통합 이후에도 지역적 특색이 가미된 문화로 발달하였습니다.” 윤 선생님의 강연에 이어 도립국악원 대금연주가인 최명호 선생님의 대금연주가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휘감기는 대금의 소리가 고즈넉한 부여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에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미명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맞이한 부여는 뽀오얀 안개에 싸여 태고의 신비를 더하고 있는 듯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로 신라와 통합되기 직전 123년간 백제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다는 부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직 채 안개도 가시기 전인 오전 7시 45분. 우리를 태운 버스는 부소산성을 향했다. 부소산은 해발 100미터의 낮은 산이지만 북쪽으로는 백마강이, 남쪽으로는 들판이 전개되어 불안하던 공주시대부터 새 도읍지로 선정하였던 곳이라 한다. 부소산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니 군량미를 보관하던 군창터와 이를 지키던 군대 움막이 나타났다. 또다시 한참을 걷다보니 누각이 나타났다. 누각에 올라서니 부여 시내와 백마강의 희미한 물줄기가 수줍은 새악시의 모습처럼 뿌연 안개에 싸여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부소산성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자로잰 듯이 있다는 왕궁터와 정림사지, 그리고 궁남지의 모습이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이어지는 답사지의 모습들을 하나의 시선으로 붙들고 싶었는데……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부소산 산책길을 따라 더 내려가는 길은 고란사와 낙화암으로 이어졌다. 고란사 가는 길에는 청설모의 이른 아침 나들이가 분주했다. 혀가 파래서 청설모란 이름이 붙었다고 9살난 재식이와 영식이가 일러주었는데, 얼핏 보아서는 다람쥐와 비슷했다. 서둘러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쳤을때는 이미 9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구불구불한 시골 들녘의 한 장소에서 멈추었다. 농가도 몇채 보이지 않는 야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천정대와 호암사에 이르는 길이란다. 흔한 시골의 야산처럼 잡목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걷다보니 잘 일구어진 밭들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삼국유사에서 그 존재를 추정해 볼 수 있는 호암사지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호암사에는 정자암이란 바위가 있었고, 나라의 제상을 선출하기 위해서 후보자의 이름을 바위에 써놓으면 제상으로 적합한 사람의 이름에 도장이 찍혔다고 한다. 나라의 정사가 이루어졌을 정도로 그 비중이 막대했던 호암사. 그러나 그 옛날의 호사스럽던 영화는 온데 간데 없고, 안내판 하나 없이 이젠 범인 소유의 밭으로 변해 콩이며 고구마들이 수확의 손길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야산 정상부의 오른편으로 우거진 소나무 사이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안내판에는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제 49호 <천청대>’라고 쓰여 있었다. 호암사지 밑으로 산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호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한평 남짓 되는 이 절은 꿈의 계시를 받아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는 간략한 소개비와 함께 백마강을 바라보며 절벽사이에 아슬하게 위치해 있었다. 자그마하다 못해 조그맣기까지 한 절에서 풍기는 향내가 근방에 자욱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과연 그곳은 명당이더라. 또다시 버스 돌리기를 몇 번해서 이른 곳은 부소산과 백마강을 바라보며 위치하고 있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였다. 충청남도 지정기념물 33호로 지정된 왕흥사지가 있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노오란 은행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한집의 모퉁이에 자리 잡은 감나무에는 이제 막 붉은 기운을 나타내는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모퉁이를 지나 감나무 옆으로 드러난 텃밭에 멈추어 섰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이곳이란다, 왕흥사지가. 윤덕향 교수님이 몇 년전에 왔을 때만 하더라도 주춧돌의 흔적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 비친 왕흥사지는 그저 평범한 집 뒤의 텃밭이었다. 미처 사람의 손이 미치지 못한 곳에서는 사람의 키를 넘어설만한 잡풀만이 우거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설친 잠과 빠듯한 답사 일정 탓인지 한참을 자고 일어났을 때 버스는 이미 백제대교를 건너 자온대에 도착했다. 수북정 바로 아래에 위치한 자온대는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하기 위해 행차할 때 먼저 예불을 드리던 돌로서 임금의 예불행차 이전에 그 돌이 스스로 따뜻해져 환석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웠다 한다. 강쪽으로 향한 바위면에는 우암 송시열의 ‘자온대’란 대서가 써있다고 하나 바위절벽이 보호대로 둘러쳐져 있어서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수북정 아래 선착장에서는 몇몇 유람색들이 이제 막 승선을 서두르고, 백마강은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성흥산은 가파른 산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숨을 골라가며 올라가는 길 옆에는 체련공원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중턱에 이르니 성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성흥산은 석산처럼 보였다. 이 석산의 형태를 활용하여 축조된 성흥산성은 돌로 쌓은 석축성으로 겉보기에도 견고해 보였다. 성흥산의 바위절벽에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는 가던 길을 되집어 내려오는 길에 대조사에 들렀다. 좁다란 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니 널따란 절의 앞마당이 나왔다. 마침 스님께서 예불을 드리는 중이었다. 조용한 산사에 찾아든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아랑곳하지 않는 스님의 앞에는 커다란 여래입상(?)이 인자한 웃음으로 서 있었다. 아담한 산사에 울려퍼지는 목탁과 예불소리가 하루의 기운을 다해가고 있는 가을날의 햇살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지막 답사지는 궁남지였다. 이 궁남지는 신라의 안압지의 모델이 되었으리라 추측된단다. 무왕 35년에 궁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물을 20여리 밖에서 끌어들여, 연못 서쪽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신선이 산다는 방장산을 모방하였다 한다. 공주와 부여는 참으로 조그마한 도시였다. 답사 일정 탓인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백제 문화의 미비함 탓인지, 그저 저도 아니라면 패망해버린 역사 탓인지, 몇해전에 친구랑 둘이서 다녀온 경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답사를 마치고 전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밀려드는 감정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길에서 마주한 백제는 폐허 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폐허의 맛은 백제사에 대한 강한 애착과 미련을 던져 주었다. 어쩌면 그것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아 영식이와 재식이 그리고 지현이에게 물려주어야 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과제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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