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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7 | [문화저널]
<제55회 백제기행>‘일본편’ 천년 세월을 넘어 만나는 백제 문화의 원류
조광한 (2005-01-25 15:24:29)
7월20일 새벽 4시 전주 우진문화공간 앞, 설친 잠을 뒤로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김포공항에 도착, 출국 수속을 마치고 12시50분경 도착한 곳은 오사카. 60여 년 전 이 땅에 강제로 끌려왔던 수많은 한국인들, 임진왜란때 끌려왔던 선조들, 백제멸망의 아픔을 뒤로한 채 멀어져 가는 조국을 바라보며 뱃전을 움켜줬던 선조들이 이 땅에 첫발을 내딛던 심정은 어땠을까 헤아려 본다. 일본 속의 백제기행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만남인지라 그 만남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지 몰라 약간의 설레임과 호기심 속에서 백제기행의 일정을 추수려 보았다. 오사카는 4세기부터 ‘나니와’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일본의 수도가 되었으며 특히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상업도시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오사카성(大板城)!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았다는 이곳은 역사 유적지로서의 고풍스러운 맛은 없고 관광객들만 붐볐다. 이곳에서 우리일행은 초밥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사천왕사(四天王寺)로 향했다. 현재 오사카의 약 3분의1은 백제야(百濟野)라고 불리웠다 한다. 그 중심에 바로 서기 593년 쇼오토쿠태자(聖德太子)가 세웠다는 사천왕사가 있는데 그 가람배치가 백제 부여의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나 정림사지와 흡사하다. 성덕태자가 사천왕사를 세울 다시 선진국인 백제로부터 학자, 예술인, 건축기술자들이 대거 들어와 일본 고대문화의 황금기인 아스카(飛鳥)문화를 형성한다. 오사카에 있는 미야꼬호텔에서 짐을 풀고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마에다겐지(前田憲二)씨의 “일본열도 속의 백제문화”란 주제로 강연이 있었다. 그는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정열과 멋을 지닌 젊은이(?)였다. 내가 만난 최초의 일본인이기도 한 그는 처음부터 끝나는 날까지 우리와 함께 움직이면서 강연과 안내에 성실한 모습을 보여줘 처음에 가졌던 일본인이라는 선입견을 쉬 가시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찬란한 오사카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일본에서의 첫 밤을 보내고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라로 향했다. 일본인들은 신라를 ‘시라기’ 고구려를 ‘고구리’ 또는 ‘고마’ 백제를 ‘구다라’라고 읽는다. 일본 최초의 수도 나라, 백제가 멸망하자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대거 망명 정착하여 살면서 빼앗긴 나라(國)를 그리워한 나머지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 나라시의 유래이며 현재 ‘奈艮’이라고 쓰는 것은 단지 취음하기 위한 차자(借字)에 불과하다. 일본인이라면 그 누구나가 ‘日本人의 마음의 고향은 飛鳥(아스카)다’라고 말하는 곳, 우리 일행은 비조 제일의 전망대라고 하는 해발 148미터의 낮은 언덕인 감강의 언덕(아마가시오카)에 서 있다. 이 곳에서 내려다본 비조시의 전경은 이국적 풍경이 아닌 마치 우리 나라의 어느 시골마을을 내려다보는 듯한 친근감이 든다. 마에다 감독이나 이노우에 교수의 말은 백제의 古都공주와 똑같다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오히려 부여와 흡사한 것 같았다. 한편 백제에서는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던 의자왕 조카 귀실복신(鬼室福信)이 부여풍을 백제왕으로 추대하여 더욱 가열한 투쟁을 전개한다. 아울러 중대형은 663년 다시 27000여명의 증원병을 백제로 파견한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나-당 연합군과 백촌강(白村江)에서 대접전이 벌어져 크게 패하고 최후의 거점인 주류성(州柔城)이 함락되어 멸망하게 된다. 이 때의 상황을 일본서기 천지2년(663)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제 주류성을 잃었구나.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들의 묘소를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일본에서는 백제의 멸망에 이토록 애통해했는가? 또 선조들의 무덤이 어찌 백제 땅에 있다고 하는가? 도읍을 구주로 옮기면서까지 백제를 구원하려 했던 제명과 중대형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망국의 한을 머금은 핏빛노을을 뒤로하고 수많은 백제 유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아스카 촌의 주변 도로 겨에 낮은 언덕 위에 거석을 쌓아올린 이시부다이라 불리는 석무대 고분을 찾았다. 천년의 세월 속에 신비를 머금고 있는 석무대. 비조천(川)의 상류에서 땡볕 더위 속에 찾아온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 거대한 중압감. 천장을 덮고 있는 큰 돌 하나만 해도 길이가 13m, 폭 18m로서 무게는 77톤이 되는데 사용된 돌은 총39개이며 무게는 2300톤이나 된다니 이처럼 크고 무거운 돌을 당시의 토목 기술로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불가사의하다. 막강한 부와 권력이 아니면 축조가 불가능한 이 석무대 고분의 피장자는 백제계의 호족으로 앞서 밝혔던 소아마자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우리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다카마쓰 고분으로 이동했다. 아스카문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다카마쓰 고분은 아스카촌 국도 변에서 동남쪽으로 약500미터 떨어진 히노쿠마라는 조그마한 야산의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히노쿠마는 일찍부터 한반도에서 우리 선조들이 건너와 집단정착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우리 나라 경주에 잇는 신라왕릉처럼 대형고분의 밀집되어있다. 지금은 대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지만 20여년전 발견 당시만해도 도릉위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높이 서있어 고송(高松), 즉 다카마쓰 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곳을 올라올 때 인위적인지 자생적인지는 몰라도 길 숲에 만발한 무궁화 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피장자인 선조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당신은 구인가? 무슨 사연으로 낯선 이국 땅에 와서 이렇게 쓸쓸히 묻혀있는가? 천년의 세월을 넘어 이곳에 온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무거운 발길을 어미아지신사(於美阿志神社)로 돌렸다. 일본인의 의식을 하나로 엮어주는 다분히 일본적인 믿음의 산실인 神社! 신사는 입구의 도리이로 불리는 문으로 특징 지워진다. 도리이(鳥居), 새가 사는 집! 일행중 하나가 갑자기 ‘고도리’를 얘기해 한바탕 웃음꽃이 터졌다. 어미아지 신사에 모시는 神은 아지사주(阿知使主)이다. 이 아지사주는 응신(應神)천황때 한반도로부터 일족 17개 마을의 백성을 데리고 온 고대의 가장 유력한 도래인이었다. 이어 동대사! 목조건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것이며 그 건물 안에 모신 불상 역시 금동주조불상으로는 세계 최대 것이 되므로 일본이 자랑하는 대사원이다. 부근에 늘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며 사슴을 방목하여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동대사는 그간 두 번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서기 1195년에 다시 완공하였다고 한다. 일본이 자랑하는 대표적 문화재인 이곳 동대사에도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스며 있음은 예외가 아니다. 일본이 8C중반에 들어서자 일본국내는 가뭄과 대지진, 전염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게되고, 설상가상으로 聖武천왕은 내란에 정변까지 겪게된다. 이러자 성무는 일본 전국에 불력으로 풍년을 기원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한 절을 짓게 하여 이를 총괄하는 절인 동대사와 大佛을 건립할 계획을 세운다. 이 때 동대사 창건의 주역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백제인들이었다. 동대사와 대불의 조성의 기본계획을 세운 대승정 낭변(浪弁)은 백제계 승려로 아려져 있으며 이 사업을 추진한 사람인 행기(行基)는 고대 일본 불교계에서 너무나 유명한 존재인데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전한다. 동대사 안에는 가라쿠나(辛國)신사가 있다. 동대사의 터줏대감을 모시는 곳인데 가라쿠니는 한국(韓國)이라고도 쓴다. 원래는 이 지역에 살던 한국인들의 조상신주를 모신 사당이었던 것이 동대사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바뀌었다 한다. 그러나 동대사와 비교해 너무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잇는 한국 신사! 세인들의 발길이 끊긴지 이미 오래였지만 오늘처럼 간간히 한국사람들이 찾아온단다. 글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본에서 보내는 두 번째 밤은 나라에 잇는 후지다 호텔이었다. 이름과는 달리 시설은 비교적 잘되어 있었다. 둘째날마져 그냥 잠만 잔다는게 왠지 허망하여 몇몇 일행과 함께 적당한 술집을 찾아 헤매다 결국은 찾지 못하고 천변공원에 자리잡고 캔맥주를 마시며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만에 가지는 편안함인가! 나라의 여행을 마친 우리일행은 차 속에서 논의 끝에 일정에 없었던 京都(교토)에 있는 광륭사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집행부의 탁월한 선택(?), 광륭사를 찾아가는 길에 하얀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은 조총련계 여학생들의 모습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마에다 감독 얘기로는 수년전 온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옴진리교 가스살포 사건 때 북한에서 그랬다는 유언비어로 인해 지하철이나 시가지에서 여학생들이 치마 저고리를 찢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학생들이 20~30명씩 무리지어 다녀야 했으며 그런 속에서도 오히려 더 당당하게 치마 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 그리고 재일교포 지문날인 사건과 더불어 우리민족의 수난사가 과거의 일만이 아님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광륭사 영보전(靈寶殿)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 국보 제 1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 나라 국립 중앙 박물관의 국보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너무나 흡사하여 가히 쌍둥이 보살이라 할만하다. 천년 신비의 비밀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미륵보살은 되돌아 나오는 우리의 옷자락을 자꾸만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광륭사로 이동하는 차 속에서 누군가가 목조미륵불을 본 것 한가지만 가지고도 본전은 뽑은 것 같다고 한 말에 웃지도 않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정취를 동시에 흠뻑 맛볼 수 있는 법륭사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성덕태자는 고구려 중 혜자와 백제의 중 혜총을 스승으로 삼아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그 보급을 위해 607년(623년 설도 있음)자기집 앞에 큰 사원을 건립하도록 하여 약초사라 하였는데 670년 불에 타고 그 후에 재건한 것이 바로 이 법륭사이다. 법륭사 금당벽화! 고구려 중 담징이 그렸다는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는 일본전래의 불화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예술품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실물을 보지 못했다. 1949년 1월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지금은 지하창고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담징의 영혼의 손끝으로 빚어낸 금당벽화를 보지 못하고 1968년에 모사된 가짜를 보고 서있는 것이다. 해체 수리중 발견되었다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썼다는 목판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망향의 회한을 지니고 소리죽여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금당에 안치되었다가 1941년 금당옆 대보장전(大寶藏殿)으로 옮겨진 백제관음상은 210센치미터의 청아한 높이와 우아한 자태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는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그 은은한 미소와 늘씬하고 부드럽고 유려한 선(線)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발하게 한다. 또한 일본문화의 진수는 어느것 하나 백제의 숨결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어 일본에 있는 백제계통의 사원과 관련하여 주목받는 사원은 약사사를 둘러보았다. 무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한 탓인지 모두들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京都(도쿄) 로얄 호텔에 짐을 풀고 도산(挑山 : 모모야마)학원대학 서용달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 온지 55년이나 되었다는데 우리말이 매우 유창하였다.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받고있는 각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한 지식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무관심과 분단된 조국이 주는 또 하나의 아픔이 진하게 베어 나옴을 느꼈다. 다음날 35도의 찜통더위 속에서 우리는 왕인 박사 묘를 찾아 헤매었다. 안내를 맡은 마에다 감독도 이곳은 처음길이라 한다. 물어물어 언덕길을 한참 돌아 올라갔더니만 원위치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잘못 찾아 온 것이란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이동해야 한다나! 그러나 짜증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60이 넘은 마에다 감독은 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있지 않은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중간지점인 히라가타(枚方)의 주택가 골목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왕인 박사묘소에 도착하였다. 일본문학의 시조로 추앙 받는다는 인물의 묘소치고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여기서도 일본의 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묘소입구에 만발한 무궁화꽃과 우리말로 “어서 오십시오”라고 씌어있는 작은 나무팻말의 글귀가 반갑기만 하다. 현재까지 우리문헌에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지난 1987년 전남 영암 동구림리에 남아있는 왕인 박사 관련설화가 있어 현지에 왕인 묘가 조성되어있다. 일본에서는 1984년 11월 3일 제1회 왕인 박사 축제를 시작으로 매년 그 뜻을 기리는 행사를 치루고 있다고 한다. 묘소 옆에서 박남준 시인의 구성진 쑥대머리 한 곡과 마에다 감독이 부른 이스라엘 민요가 한데 어울러져 잠든 영혼과 왠지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 마음을 달래주었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가는 중간지점에 히라카타(枚方)가 나온다. 해발 30미터의 히라카타 구릉에 위치한 백제사적은 160평방미터의 절터에 남문, 중문, 동, 서 양탑, 금당, 강당 등의 자취가 남아있다. 백제사가 있는 이곳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선광의 후손인 경복때 이곳에 정착하면서 백제의 들(百濟野)로 불리기 시작한다. 백제사의 창건은 경복때로 750년쯤 된다. 경복은 앞서 얘기한 동대사 대불 주조때 금을 헌납한 사람이다. 백제사는 11~12세기경에 불에 타 과거의 영화를 뒤로한 채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잡초에 뒤덮여 있는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특별사적이란 말이 무색하리 만치....(오사카의 특별사적은 오사카성과 백제사적 단 두 곳뿐이다.)백제의 혼과 손때가 이 땅 일본 곳곳에 묻어있건만 그 빛이 바래가고 있으며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찾아오는 우리들의 발길을 착잡하게만 한다. 안타까운 이야기 하나 더하자. 長野縣 松代町 千曲川東巖 지역의 大室고분군! 이곳에는 무려 502기의 고구려계통의 적석총(積石塚)이 있는데 그 발견 경위가 이채롭다. 지금으로부터 약56년전쯤 강제 연행된 조선인들이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달해 만약을 대비 일본천황과 고위관리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반공호를 파다가 발견하였는데 조사결과 5C말 - 6C초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죽은 고구려 선조들의 넋이 불렀을까? 그런데 그 일대는 그대로 방치되어 인근 포도밭의 지주대나 밭의 계단을 만들기 위해 돌을 마구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100여기 이상이 없어지고 그나마 제대로 형태를 갖춘 것은 7 -8개 정도뿐이며 그것조차도 훼손되는 것은 시간문제라하니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들의 자화상인걸...... 백제왕 氏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성무천왕의 칙령에 의해 세워졌다는 백제왕 신사는 입구 도리이의 현판부터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백제국왕 우두천왕 (百濟國王 牛頭天王)> 비운의 백제왕족 경복은 조국 부여에 있던 종묘를 이곳에 세운 것이다. 원래는 사천왕사 옆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현재 위치로 옮겨져 왔다 한다. 또 이곳에 사는 일본인들은 감각적으로 자신들의 선조가 백제인 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단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신사 입구 돌 울타리(?)에 세워진 돌 하나하나에 그들의 이름과 신사개축 헌금 내력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교토 제일의 전망대! 청수사로 향하는 언덕진 골목길은 토산품 가게가 즐비하다. 우리 나라 건축물처럼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짜 맞췄다는 청수무대에서 내려다보니 교토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본 사람들은 과거 예술인들의 공연장인 이곳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단다. (경치가 너무 좋은 나머지 감격한 상태에서)절 안에 신사가 있는 점이 조금 특이하였으며 좋은 사람 만나게 해준다는 신사라 그런지 많은 청춘남녀로 붐비었다. 한국인들도 많은걸로 보아 정해진 관광코스인 듯하다. 그들이 재미로 하는 신사참배가 일제시대 강요당한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지만은 괜히 심사가 꼬여 일행과 떨어져 먼저 내려오는데 약수터에 여학생들이 모여 호들갑을 떤다. 이곳에 세 개의 약수가 있는데 첫째 물은 건강을, 둘째 물은 머리가 맑아진다는, 마지막 셋째 물은 연애가 잘 이뤄진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욕심많게 세 번 다 마시면 효험이 없단다. 어느 약수터가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가는 상상에 맡기고 항전신사로 달려가 보자. 고마다는 원래 백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애써 지워버리고 싶은 한국의 냄새를 의식하여 音만 살려둔채 뜻은 절구를 의미하는 항전(抗全)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신사 내에는 필총(筆塚)이 있는데 이 신사를 만들 때 사용한 붓을 모아서 만든 붓무덤이 이채로웠다. 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중간이 마치 여성의 젖가슴 모양으로 불거져나와 이 나무아래에서 빌면 젖이 잘나온다 하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심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떠밀려 우리동포가 가장 많이 산다는 학교(鶴橋)를 지나 오후 3시 35분 발 고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4박5일의 짧고도 긴 여정 속에서 우리가 둘러본 일본 속의 백제유적지 기행은 그야말로 수박겉핥기식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뭔가를 배우려 간다는 생각보다는 가슴에 느끼는 그 무엇을 담아오자는 생각이 컸던지라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그 의미가 새로웠다. 편견을 버리고 왔나 아니면 오히려 더 두터운 편견의 벽만 쌓고 돌아왔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담아온 소중한 것이 있다. 새로운 것을 알게되는 즐거움은 차지하고서라도,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바로 내가 담아온 소중한 그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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