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7.1 | [문화저널]
<제 52회 백제기행>장엄한 일출과 신라문화 속의 백제 (경주편)
최명순 완산여상교사 (2005-01-25 15:21:44)
금당벽에 솔거의 벽화가 있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 황룡사터에는, 건물과 탑 그리고 불상의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뿐이었지만 그 규모는 엄청나게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층 목탑은 백제의 아비지가 만들었다는데 백제문화가 신라에 파급만족감과 더불어 상대국의 문화도 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들의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경주는 꼭 갔다 와야될 숙제처럼 방학 때마다 들먹거렸다. 양귀자 씨의 ‘천마총 가는 길’을 읽고 난 뒤엔 더욱 그랬다. 왜 그랬을까. 반나절이면 닿을 수 있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아득한 곳 어디 엔가 감추어진 낯선 곳으로 경주가 생각되었던 것은, 꽁꽁 언 겨울밤 12시(1월 24일)에 출발하여 새벽 6시 도착→석굴암→불국사→경주 박물관→황룡사터→분황사→대왕암→감은사, 그리고 다음날(1월 26일) 월성 첨성대→대릉원→김유신 묘→남산→전주로 이어지는 답사길은 짧은 시간에 많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것이었다. 1받 3일 경주를 둘러보고 감히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마는 인솔해 주신 윤덕향 선생님의 안내와 설명은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유물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면서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밤 12시에 떠나는 여행길을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신청자가 많이 관광버스 좌석이 두어 개나 부족 할만큼 기대와 열기로 가득 찬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한 뒤, 잠을 자기도 하고 옆사람과 두런두런 얘기도 하다가 새벽 6시에 토암사에 도착했다. 그렇게 맵고 거센 바람과 추위는 요 근래 처음이었다. 멈추어 있는 버스가 흔들거릴 정도였으니,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로 일치됐다는 석굴암은 유리문 속에 갇혀 있어서 답답해 보이기는 했으나 거대한 본존불은 돌덩어리라기 보다는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7시경, 붉고 둥근 해가 서서히 동해바다 위로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에 모두들 넋을 잃다가 산허리는 돌아 내려와 불국사로 향했다.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는 불국사는 다보탑, 석가탑과 함께 계단 위의 다리, 불상 등 그 시대 불교문화의 영향과 번성을 느끼게 했다. 경주 박물관은 정면에 들어서면 시주로 바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에밀레, 에밀레”로 들렸다는 성덕대왕의 신종이 먼저 눈에 뜨였다. 세 개의 전시실과 함께 불상, 석탑, 석등, 비석 등 각 종 유물들이 뜰에 늘어서 있어서 신라문화를 밀도 있게 압축해서 볼 수 있다. 오후에 찾아간 황룡사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불타 없어지고 흙바람만 이는 황량한 들판이었다. 금당벽에 솔거의 벽화가 있었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 황룡사터에는, 건물과 탑 그리고 불사의 자리를 알려주는 초석뿐이었지만 그 규모는 엄청나게 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층목탑은 백제의 아비지가 만들었다는데 백제문화가 신라에 파급들였던 그들의 여유로움을 엿볼 수 있다. 황룡사터 맞은 편에 있었다는 분황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돌을 전돌처럼 깍아 쌓은 모전석탑이 경내에 있었다. 황룡사터, 분황사를 거쳐 대왕암에 이르는 길은 한적하고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산을 넘어가는 빛 때문인지 60년대 우리네 농촌같은 들판 풍경이었다. 대왕암이라 불리는 동해 가운데 바위섬은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죽어서 용이 되어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의지가 담긴 곳으로 화장하여 이곳에 매장했거나 뿌렸다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이 완성시킨 절이 감은사인데,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 구멍을 내놓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똑같은 삼층 석탑이 남아있는데 엄숙함과 안정감이 통일신라 삼층 석탑의 기본형이라 한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보문단지 휘황한 불빛을 지나서 유스호스텔에 도착, 저녁식사 후 주최측의 배려로 판소리 한 대목을 듣고, 만 하루의 어제 오늘이 굉장히 긴 시간이었던 듯 나른한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첨성대에서 대릉원에 이르기까지 얕으막한 언덕과 낙엽 쌓인 넓은 길, 잘 보존되고 다듬어진 도심 속의 공원들은 옛 궁성과 영화를 지금도 간직한 듯 풍요로웠다. 동양 최고이며 과학적인 구조와 여러 상징을 안고 있다고 교과서에서 익히 배웠던 첨성대, 그리고 232기의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무덤이라기 보다는 작은 산들 같았다. 봉분들의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이 특이했고 신라인의 그림솜씨를 알 수 있는 말다래가 발견된 천마총은 그 당시 무덤 속의 모습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원래 예정에는 없었으나 서둘러 움직인 덕분에 김유신묘에 갈 수 있었다. 빙 둘러 새겨진 12지신상 중 자기의 띠를 찾아 앉아서 나이도 헤아려 보고, 사진도 찍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지금 밟고 있는 흙이 그 시절 신라인이 만지고 거닐던 그 흙일 것같다는 생각이 들고, 고분 속에서 무어라 소리가 나는 듯 환청이 일기도 했다. 마지막 코스인 남산,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르는 영산으로 신앙시되어 많은 절과 탑이 서고 불상이 만들어졌던 곳으로 가는 길목, 계곡마다 그들을 만날 수 있고 큰 바위에 새겨진 부처를 쉽게 볼 수 있었다. 1박 3일동안 돌아다니면서 참 잘 가꾸어진 유적지가 경주이구나 생각되었다. 겨우 세끼니 걱정않고 교과서나 공책만으로 학교 다니는 것도 다행인 줄 알다가 세계명작 전집, 위인전집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친구방을 보고 느끼는 당혹감이랄까. 굳건히 둘러친 담장안에 장미, 국화, 사루비아가 핀 화단이 그 곳이라면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가 조촐하게 어우러진 꽃밭이 이곳 전라도란 느낌은 나의 편견이고 무지할 때문이었을까. 3일동안 내내 세심한 배려와 친절로 이끌어 준 주최측, 함께간 모든 분들의 한 가족같은 살뜰함과 부지런히 가서 빠짐없이 보려는 열정들, 그리고 윤덕향 선생님의 겸손한 말투 속에 감추어진 해박한, 간단명료한 설명들은 나와 딸애의 여행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해주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