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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4 | [문화저널]
<제 48회 백제기행>
유혜숙 코끼리 유치원 원장 (2005-01-25 15:18:28)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이 작은 들꽃 말만 들어도 설레이는 ‘섬진강변의 들꽃기행’이라는 타이틀에 이끌려 우리끼리 의견을 모으고 전화를 했을때는 이미 손잡고 나설 자리가 없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이왕 내친김에 다른 곳으로 떠나 볼까했으나 ‘섬진강변의 들꽃’으로 흔들어진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고 급기야 우리는 가장 한국인다운 정서로(?) 문화저널에서 일하시는 Y씨에게 줄을 대어보고 그래도 어렵다 해 겨우겨우 승낙을 받아승용차를 타고 따라붙기로 작정을 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날. 진짜 일행은 한 사람도 나타나기 전인 출발 장소인 전주공전의 벤취에 6명 전원이 진을 치고 앉았다. 각자가 싸가지고 온 소풍가방(?)을 내려보고 시계보랴 버스쪽 눈치보랴 마음이 바쁘다. 약속된 출발 시간이 되었을 때 인솔자에게 혹 빈자리가 있을지... 슬쩍 얘길 꺼내보지만 전날 저녁까지 다시 확인했으나 한 사람도 불참자가 없었다는 답을 듣고 일단 포기, 승용차에 올라 따라붙을 준비를 한다. 그 뒤 몇분쯤 뒤였을까. 웬걸. 어젯밤 과음으로 그리고 오늘 피치못할 결혼식 참석으로 무더기 결석생이 생겼다는 ‘희소식’...우와~ 그럼 그렇지. 특공대 작전에 성공하여 전원 무사히 구출이라도된 듯 우린 정신없이 기쁜 마음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버스에 오른다. 룰루랄라. 차창밖으로 보이는 먼 산의 진달래며 시골집 담장의 개나리, 그리고 희끗희끗 노릇노릇 발그레한 들꽃들. 여유롭게 풀 뜯는 소... 그 정도는 전주시내만 벗어나면 언제라도 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들꽃기행에 대한 기대 속에 그지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어느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우린 눈을 크게 뜬다. 얼마쯤 가다가 문화저널 편집장이며 총각같은 원도연 씨의 사회로 일행들의 각자 소개가 시작되었는데 설예원, 예수병원, 코끼리 유치원, 순창의 백조, 정판사 식구 등등. 온 나라가 다 벚꽃 구경하러 나갈때에 잔조롬히 들꽃보러 나온 사람들인만큼 차안의 분위기는 다분히 가족적이고 눈만 마주쳐도 웬지 더 정겹기만 했다. 중&#8228;고등학교때 소풍가는 기분이 되어 간식준비하며 밤새 설레였다는 듯 코끼리 최 성생의 이야기로 차안에 웃음이 번지고 최선생의 가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삶은 달걀이며 방울토마토, 과자 등은 장난이 아니었다나. 그 간식을 압수(!)해다가 이리저리 맘대로 인심쓰고 다니시는 정판사님 덕에 웃고, 쌍둥이 조카(?) 둘을 데리고 왔다는 NO총각 최경수님의 “최선생 가방속에 또 뭐 있어?”라는 장난어린 관심에 웃으며 한시간 남짓 갔을까. 임실군 진메마을 어귀에 내렸을 때 일행 중 누군가가 김용택 시인이 마중나와 있다고 한다. 어디 어디...? 김용택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길안내하러 나온 듯한 머리모양과 체구가 코미디언 송해 닮았지만 송해보다는 좀 예쁘게 생긴 젊은 아저씨가 한 분 서서 웃고 있다. 설마... 설마가 사람잡았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만나고 싶어했던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 님’이시란다. 아하 그랬구나 참 작은 분이셨구나. 고추에 비하면 재래종 고추이고(실례!) 꽃에 비한다면 또끼풀을 닮아 있는 그분을 보며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동네강변과 식물도감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풀에 의미를 부여해준『섬진강』시가 생각났다. 어딘가에 그윽한 시심과 끈적이는 ‘우리’에 대한 애착이 숨어있겠거니... 부지런히 모습을 훔친다. 김 시인의 뒤를 따라 그가 자랑해 마지않는 진메마을을 향해 푸석하고 우둘투둘 멋없는 흙자갈길을 걸을 때, 어딘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들꽃에 대한 기대로 발걸음이 가볍다. 그렇게 30분쯤 걷다가 강이 보이는 편편한 들판에 멈춰서고 40명쯤 되는 우리일행이 오손도손 자리잡고 앉았다. 한때 시인의 출퇴근길로 진메마을에서 천담분교까지 매일 강길 십리를 걸으며, 그가 보았던 세세한 변화와 경이와 시원한 전라도 사투리에 실어 강연을 시작했다. 작은 돌멩이 구르는 소리 하나에도 근원을 생각한다는 시인은 우리들 생명의 근원인 어머에게도 남다른 애정을 가진 듯, 어머니 얘기를 더욱 신명나게 이어간다. 제대로 학교 한번 다녀 본 적이 없는 분이 임실 일중리 가는 차를 정확히 타고 오시고, 장독대 돌멩이 하나 옮길때에도 손 없는 날을 찾고,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버릴 때에도 땅 속의 미물들이 다칠까 마음쓰시며, 학명은 모르나 130여가지 풀이름까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자연과 더불어 사신 당신의 어머니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져 내릴 때 듣는 우리들 마음 또한 어느새 어머니에 닿아있다. ‘마을 앞산만 바라보고도 가슴뛰게 감동하며 천년을 살수 있겠다’는 시인은 ‘국내 어느 봄나들이보다도 우리 동네 감나무 위로 오는 봄이 제일 아름답다.’ 고 이야기한다. 우리 것에 대해 무심하고 무지하며 모르고 사는 우리들을 깨우치기에 충분한 말씀. 늘 보는 것에 대해 감동할 줄 아는 마음을 소중하게 배운다. ‘물괴기 잡는 얘기만 헐래도 하루 죙일이고 헐 얘기가 너무너무 많아서 클났다.’고 소리내어 웃는 시인의 말씀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래를 잘구로 겁나게 따 담으며 왔었다.’는 그길의 나머지를 걷는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부르고 손잡으며, 중간 어디쯤에서 하 - 웃으며 모두 모여 단체사진을 한 장 박아둔다. 서로 다른 모양의 잎과 꽃색이 다른 민들레를 보면서 달래를 보았고 꺾으면 노란 진이 나오는 얘기똥풀, 흰색으로 흐드러지듯 핀 이팝나무(쌀밥과 같다고 해서)와 조팝나무, 현호색, 싸리나무, 꽃다지, 개불알꽃... 우린 수없이 묻고 확인하고 되물으며 길을 걸었다. 아! 들꽃은 정녕 이름모를 꽃이어서 아름다운게 아니었다. 그 작은 꽃 하나하나에 꼭 어울리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신기하고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누구의 손엔가 『쉽게 찾는 우리 꽃』이라는 작은 책이 들려있음을 보았고 공부하러 작정하고 준비해 온 그가 우리 일행 중 젤 자랑스럽게 느껴져 다시 한번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니 웃는 얼굴이 들꽃같다. 20분쯤 걸어서 당도한 마을. 임진왜란 때 나주와 남원 방면으로 이 땅을 유린하던 왜군에게 쫓기던 농민들이 깊고 깊은 산중으로 피신을 와서 이룬 마을로 마을 앞산이 그 크기와 높이에 비해 유난히 길어서 진뫼마을→진메마을이라 불리었다지. 누가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산골이나 농촌 어디를 가든 그 지형의 특징을 딴 마을 이름들이 많은 걸 볼 수 있는데 그 이름들 또한 부르기 쉽고 생긴 모양대로여서 일부러 외울 것도 없고 가르칠 것도 없었으며 사람들이 살아가며 스스로 눈에 발에 몸에 마음에 익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물 위에 있으니 물우리마을, 새로 생긴 마을이니 새말, 해가 마을 한가운데 뜨니 일중리, 비묻어오는 골짜기는 우골이요 삼이 잘되어 삼밭골, 절이 있던 곳은 절골, 밭이 평평하면 평밭, 벌이 잘 붙으면 벌통바위, 자라가 많이 올라오면 자라바위, 쏘가리가 앉으면 쏘가리방죽, 다슬기가 많으면 다슬기 방죽, 논도 생긴 모양대로 해서 장구배미, 자라배미... 이런 식으로 끝도 한도 없는 이름들이 재미스럽기만 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시골마을 이었지만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한 김 시인의 마을이어서인가. 몇 채 안되는 마을 바로 앞으로 섬진또랑(섬진강이라고 하기에는 좀...)이 흐르고 그 또랑 가에 층혼을 이룬 바위들이 여기저기 잇대어 펼쳐놓여져 있었고 물건너로 이 마을의 이름을 결정지워준 긴 산이 마을 앞쪽을 한폭의 동양화같은 풍경으로 연출해 내고 있는 셈이다. ‘여름밤엔 아무데나 둔너버리면 잠을 잘 수 있다.’는 벼락바위에 모두 앉았을 때 진메마을 앞 강변과 강물을 지켜주는 신이 된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옛날 도군이었다는 홀애비 서춘 할아버지가 백년쯤 전에 뱃마당가에 심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하루종일 깐닥깐닥 헐꺼싱게 밥이나 먹고 합시다.”는 말씀에 고기굽는 냄새 속에 고픈 배를 고민하던 우리들은 모두 박수를치고 좋아한다. “클났네. 나는 얼매나 배고프겄어 으하하...” 마음을 비운 시인의 거칠 것 없는 웃음소리. 불판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삼겹살을 구워내고 막 담궈온 김치와 풋고추와 상치를 곁들이니 진수성찬이 따로없다. 주최측의 총각기자가 막걸리병을 권할 때는 사양하던 우리도 어느새 분위기에 취해서 슬그머니 두병씩이나 산을 병풍삼고 흐르는 소리는 권주가 삼아 분위기있게 한 잔씩 걸치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더라. 진메마을 누군네의 뒷간을 구경삼아 모두 한 번씩 거쳐서 차에 오르고 시골길을 십여 분쯤 가니 물우리 마을에 이르른다. 시인이 근무한다는 덕치국민학교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기좋게 내려다 보이는 마을 어귀 정자에 빙 둘러앉아 ‘이짜그 저짜그’ 가리키는 대로 고개 돌려가며 착하게 선생님 말씀을 공부한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격인 느티나무, 마을 앞에 저수지가 있다면 그건 그 마을에 불이 잘 난다는 표시, 마을의 젤 허한 곳에서는 소나무를 심어 그 기를 강하게 한다는 등등... 새로운 배움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막걸리 기운과 곤한 식곤증에 졸기도 하더니 개량 한복을 잘 챙겨입으신 최명호 님의 대금연주로 모두 정신이 난다. 끊일 듯 끊일 듯 이어지면서 애를 태우는 노래를 서용석류 대금산조라나. 어찌 클라리넷이나 오보에 소리에 비하겠는가.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연주가 끝났을 때 누군가가 즉석에서 물을 끓여 청하는대로 후하게 타준 커피 맛은 그 자리에 앉아 평생을 커피만 마시고 있으래도 좋겠다 싶은 꼭 그만큼이었다. ‘창원의 정판사님’이 아닌 창원 정판사의 송사장님 내외였다. 땀도 가시고 졸음도 가시고 충만한 마음으로 되돌아 걸어 차에 오른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신 자두맛 사탕을 배급주고 입에 오물거리며 왜들 안오나 했더니 도중에 월파정에 들러 온단다. 되돌아오는 길 어디에 그런게 있었나. 다시 차를 움직여 골짜기로 더 깊숙히 들어갔는가 했더니 회문산어귀 안정리란다. 임실, 순창, 정읍의 경계선인 회문산. 아침부터 훈련 해온대로 감동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서인지 산등성이 군데군데 희끗거리는 이팝나무 한두그루. 분홍빛으로 흐드러진 산복숭아 몇 그루가 참으로 아름답다. 더구나 회문산은 이태 씨의 『남부군』과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태백산맥』에서 익혀온 터라 입구에서부터 제법 울창해 뵈는 어디선가 제복을 입은 빨치산이라도 나옴직하고, 한 조국을 두고 상반된 이데올로기로 피흘리며 고뇌했던 그들 생각에 잠시나마 가슴이 뻐근해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이른바 해방구였다는 이곳 지형을 보매 더욱 그럼직하다. 산골짜기로 줄줄 흐르는 물가 바위에 모두 걸터앉고 맞은 편 높고 큰 바위에 솟아 앉아 우리를 향해 연설하는 김 시인이 마치 빨치산 위원장쯤 되보인다며 웃는다. 그저 심심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 시인의 진솔한 고백에 이어 좋은 문학은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는 것이라 힘주어 말하더니 무엇이나 정확하게 알고 잘 쓰는 시인이 김용택이라는 자찬은 빼놓지 않는다. 자랑도 할만하면 해야지요. 이야기는 어느덧 회문산 일대에서 영화찍은 이야기까지 갔는데 연신 싱글벙글 철없는 중고생같은 표정이 되어 안성기, 박중훈같은 배우들하고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행복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1박 2일의 일정과는 달리 당일코스는 겨우 마음이 열리는가 싶으면 끝날 무렵이 된다. 어느새. 한 번 이름을 들으면 평생 잊혀지지 않을거라 장담하는 문효녀 씨가 우리를 대표해 노랫말이 그리도 잘 어울리는 장소에서 산노래 ‘한계령’을 회문산에 선사하고 우리의 하루를 이끌어 주신 김용택 시인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진강변 어딘가에 흐드러진 들꽃을 볼 수 있겠거니 했던 우리들의 기대는 사라져 입을 모아 아쉬움을 애기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우리 산하에 피어있는 작은 들꽃에 눈돌릴 줄 알게 되었고 늘 보는 진달래며 개나리가 겨우내 어찌 지내다 때가 된 걸 알고 저리도 예쁘게 피었을까 감동하는 마음 그것이다. 그래 지금 당장 서점에 들러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그리고 우리 꽃에 관한 책을 사 들고 들어가리라. 하찮아 뵈는 세상의 모든 것에 감동하며 유명시인이 되어서도 마을을 지키며 죽는 날까지 욕심없이 살아갈 시인의 마음을 닮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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