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2 | [문화저널]
<제46회 백제기행><백두산 안갑니다. 가거라 삼팔선아> 휴전선 일대 해방 50주년 기념기행
김선경 전북 청년 문학회 사무국장
(2005-01-25 15:16:45)
통일은 어디에 있는가?
백제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일기를 썼다. 다 쓰고 나니 세벽 세 시가 지나 있었고, 만년필을 쥐었던 가운데 손가락 마디가 쏘옥 들어가 있었다. 에이포 용지로 여섯장 분량의일기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할말이 많이 있었다. 아니 이제부터 정말로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려는 판국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감상의내보임도 없이, 이를테면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해서 0.9평, 0.75평짜리 독방과 징벌방을 보고, 자리를 옮겨 사형장으로 향했다.” 하는 식으로 사실적인 기록만 했는데도 그렇게 많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했던 것이어서, 나는 자질구레한 감상의기록은 포기했었다. 그만큼 먼 길이었고, 돌이키기 벅찬 길이었다. 그런데 덜컥 기행문이 맡겨져서 나는 지금 몹시도 곤혹스럽다. 그 길을 다시 되짚어가는 일은 결코 유쾌한 일이 못 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일기를 들쳐본다. 일기 첫머리에는 되나케나 그려놓은지도가 있다. 색연필로 삐툴째툴 그려진 지도에 파란색 점이 전주를 출발해 서울을 거쳐 철원까지 갔다가, 종이가 모자라 뒷장으로 넘어가 있다. 뒷장을 넘기니 인제, 백담사, 진부령 하는 지명들이 나오고 끄트머리에 몇 개의 해수욕장 이름들이 박혀 있고 그 위에 고성 통일전망대가 있다. 그리고 다시 빨간 색연필이 홍천을 거쳐 여주로 대전으로 넘어와 다시 빨간 색연필이 홍천을 거쳐 여주로 대전으로 넘어와 다시 전주에서 멈춰 서 있다. 휴전선을 횡단한 긴 여행이었다.
도대체 왜 갔던가? 하고 나는 다시 되물어본다. 무엇을 보기 위해 갔던가 하고.
대답은 의외로 쉽게 나온다. 나는 북한땅을 보고 싶었고, 동해도 보고 싶었고, 김하기 씨가 말하는 통일과 문학의관계도 배우고 싶었고, 비무장지대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진실로 내가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캐묻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2박3일이라는 짧은 일정에 나는 참으로 많은 기대와 욕심을 가졌던 것이다. 과연 그 기대와 욕심에 어긋나지 않게 2박3일의 일정은 욕심 사납게도 빡빡했다.
첫날 서대문 형무소에 도착했다. 서대문구 현저동 1번지.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 다른 이름들도 많고 많지만, 결국엔 서대문 형무소라는 이름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은 곳. 옥사의 내부는 먼지를 잔뜩 뒤집ㅈ어 쓴 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고적하다. 옥방을 보면서 문득 빛에 대한 열망을 느꼈다. 빛이있고 없고의 차이, 그것은 곧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의차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감방이라도 빛이 들어오는 감방은 웬지 살 맛이 날 것 같기도 햇다. 물론 살았던 사람은 똑같이 죽을 맛이었겠지만.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옥사는 이층으로 돼 있다. 목조로 된 복도는 금방이라도 우리를 삼킬 듯이 군데군데 이빨이 빠진 채였는데, 사형장으로 꺾이는 모퉁이에 서있는 키 큰 포플러 나무와 끝이 반질반질한 쇠뭉치 레바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박혀 있다는 것말 말해 두자. 하도 붙잡고 울어서 통곡의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포플러 나무와, 하도 많이 뒤로 젖혀서 반질반질해진 형장의 레버(사형시킬 때 사형수의 목이 매달리도록 바닥을 내리는 수동식 장치)가 거부와 운명의이중주처럼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거기에서 600명의 목숨이 사라져 갔다. 흔히 ‘형장의 이슬’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곳에 가면 그 표현의 리얼리티를 얼마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형무소 마당에서 출소(?)기념사진을 한방 박은 우리들은 곧장 통일로를 달려서, 일산 신도시를 빠져나가 자유로를 탔다. 제법 너른 평야와 갈대밭, 그리고 한강 줄기가 계속 우리를 따라온다. 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있다. 처음으로 북한땅을 보는 곳이다.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었고 북한식 하얀 집들이 망원경 속에 비쳤다. 이 망원대는 전망대 곳곳에 설치 돼 있는데,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1분~2분 가량 북한땅을 볼 수 있다. 이른바 통일 전망대라고 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이 망원대가 설치돼 있어서, 마치 통일은 망원경 속에서나 있는 듯한착각이 들게 한다. 두 번째까지는 봐 줄 만하지만, 세 번째부터는 욕 나오게 만드는 것이 이 오백원짜리 망원경이다.
다시 자유로 따라 도착한 곳은 임진각.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곳이다. 자유의 다리를 건너 판문점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던 계획은 좌절됐다. 연도연 편집장은 어떻게든 해볼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양이지만 아무 애도 통하지 않는 곳이 이곳이었다. 옆에 있던 미군들이 탄 버스만 통과가됐다. 왜 우리 땅에 우리가 못 들어가냐고 뒤에서 누군가 궁시렁댔다. 맞는 말이다. 왜 우리가 우리 땅에 들어가는데 돈 내고 들어가고, 북한 땅을 보기만 하는데도 돈을 내야 하고, 시간이 늦었다고 해서 들어갈 수조차 없는지....
나는 자유의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달리 할 일이없어서. 이런 곳을 배경으로 웃으며 사진을 찍는 일이 영 내키지않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하게 폼을 잡기도 그렇고, 그냥 일별하고 떠나가는 뭔가 아쉽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런 곳에 와서 기껏 사진이나 찍다니. 그것도 뭐가 좋다고 히죽거리며,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쩌면 이런 복잡한 감정은 통일은 대하는 나의 태도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웃자니 그렇고, 울자니 그렇고. 항상 저만치에 통일을 두고 가끔씩 심각한 척도 해보지만, 결국은 남의일로 치부하고 마는.
임진각에서 철원 고석정으로 가는 길은 기억에 없다. 배는 고프고 밖은 깜깜하고 정신없이 잤다. 그린장 회관에 도착해 매운 메기탕을 먹고, 저녁에는 이완옥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원래는김하기 씨의강연이 계획돼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잘난 하기오빠는, 술먹고경찰서에 돌을 던지다 잡혀서 괘씸죄로 구류를 살고 있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버스 안에서 들었다. 김하기 씨의 불참은 이번 기행의 크나큰 ‘구멍’이었다. 배 키를 잡을 선장을 잃어버린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원도연 펹딥장이 그 구멍을 메꾸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지만, 기행의 흐름은 많이 바뀌고 말았다. 통일을 생각하는 분단기행이 분단감상이나 환경기행의성격으로 바뀌어버린 것이, 나는 지금도 몹시 아쉽다.
김하기 선장을 대신한 이ㅣ완옥 교수의 강연은,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매력적이었다. 슬라이드를 동원한 열띤 강연의결론은 “인간이 노력하면 생태계는 복원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인간이 노력하면”이 항상 문제다. 인간은 결코 그런 일에 노력을 바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교수는 다수 인간의 비인간적 파괴에 호로 맞서는 강인한 인간정신을 우리에게 심어주었다. 비무장지대의 아름다운숲과 물과 고기떼들, 새떼들. 기행 내내 “오리류, 두루미류, 꿩류.......” 운운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 순전히 이 교수님의 열띤 강연과 자상한 설명 덕택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새류”에 관한한 전문가가 되어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에는 철의 삼각지 진적관에 들러 “50년 4개월 1일”을 가리키고 있는 분단시계를 보고, 연천 태풍전망대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버스가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우리는 하릴없이 철원평야를 헤맸다. 덕분에 숱한 청둥오리와 기러기, 학두루미와 재두루미 등의 철새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슬라이드 강연을 통해 보여진 재두루미의 우아한 자태는 실제로 보니 더욱 기품 있어 보여서 많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셔터를 눌러대도 그다지 놀라는 것같지 않았는데, 돌아와서 내일신문을 보니, 무분별한 관광객들 때문에 머지 않아 철원평야에도 철새떼가 사라질 것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철원평야를 실컷 달려서 월정리 역사에 도착했다. 아주 단아하고 소박해 보이는 역이다. 바로 옆에 군부대가 있고, 말로만 듣던 분단 방벽이 길게 늘어서있다. 조잡하게 그려진 기차가 있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싀어 있다. 달리고 싶은데 왜 방벽은 쌓아 놓았누? 찌그러진 기차 안에 들어가 기념사진을 찍고 전망대에 올라가 500원짜리 망원경으로 북한 땅을 보T다. 예전에는 기찻길이었을 흙길을 따라 G.O.P로 가는 전봇대가 길게 늘어서 있다. 하늘에는 역시 독수리 한 마리가 미동도 없는 날개를 펴고 유유히 비상하고 있다. 여기 사는 독수리는 왠지 생각이 깊을 것 같다.
백마고지 전시관은 훌륭한 반공 전시관이다. ‘피아’간에 열흘 낮밤을 피로 물들이며 싸우다가 마침내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전시관. 낮은 봉우리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명예를 걸고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목이 메일 것 같았다. 도데체 누구를 위한 명예였을까? 경상도 억양을 가진 군인은 열심히 ‘적을 사살한’ 아군의 용맹과 지혜를 이야기했지만 나는 다만 불쌍하다는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백마고지 전시관에서는 북한 땅이 매우 가깝게 보였다. 여기에는 다행히(?) 망원경이 없어서 육안으로 대승산이며 삼각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우 날아서 북으로 가는 청둥오리들도 자꾸 사진을 찍지 말라는 군인과 자꾸 사진을 찍으려는 우리들.
우리는 닷 옛 철원에 있는 로동당사로 갔다. 로동당사는 생각했던 것만큼 웅장히지도 거창하지도 않았다. 뼈다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뼈다귀를 구경하고, 로동당사 앞마당에서 맨손으로 김밥을 먹었다. 바로 옆에는 예전에 로동당사 휴게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가 지금은 뜯긴 가계가 있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여간 짠 게 아니라는 말들이 많았다. 컵라면을 샀는데 젓가락 하나도 써비스 안해 준다고. 따뜻한 물도 잘 안 준다고. 옛 철원시가지가 깡그리 사라졌듯이 사람에 대한 인정이나 배려도 깡그리 사라진 모양이다.
오후에는 연천에 있는 태풍 전망대로 갔다. 버스가 태풍전망대로 향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서정두 씨는 흥분한 기색이 완연하다. 태풍 전망대에서 군생활 3년을 보냇다는 것이다. 그럴 법도 한 것이 태풍전망대는 너무나도 오지였고, 몇 굽이를 넘고 넘어 오르고 올라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깝깝한 곳이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가본 곳 중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그곳엔 별도의 철조망이 없이 임진강 가운데가 경계가 된다고 했다. 참 시시했다. 저쪽이 북이고 이쪽이 남이라니. 자주 오르내리기도 한다더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휴전선이라면거창하고 인간의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높고 차갑고 가시투성이고 험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나는 이토록 가까운 북하노가의 거리에 오히려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것이라니. 이렇게 단순한 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니. 나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리적인 분단은 상상에 의해 부풀려지고 키워져온 분단보다 훨씬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렇지 않은가? 저렇게 나눠졌고 이쪽이 남이고 저쪽은 북쪽이다. 저쪽에는 ‘월북환영’이라는 입간판이 서있고 이쪽에는 ‘귀순자대환영’이라는 전광판이 설치돼 있다. 거기다가 서로 대환영한단다. 다만 한가지, 당신의 체제와 당신의 사상을 버리고 투항한다면.
북한을 ‘몇미터 앞에다 두고’ 나는 복잡한 심사에 빠졌다. 통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번 기행을 통해 한반도 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아마도 김하기 씨가 동참했더라면 분명히 통일의 상에 대한 한번쯤 토론할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다들 자기 방식대로 통일을 생각한다. 열심히 북한을 보고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지, 빨리 남한에 투항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무런 말이 없어 나는 답답했다. 분명한 것은 아무런 말이 없어 나는 답답했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의 체제를 인정하기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 통일은 서로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투항과 흡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사람들은 투항과 흡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통일을 투항이나 흡수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리하여 통일이 아직도 요원한 것 같아서 나는 불안했다. 저 아래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을 보면서, 왜 사람은 강을 닮지 못하는 건지 한스러워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날은 금방 저물었다. 피안에 이르른다는 도피안사에 들러 국보로 지정된 철불을 보고 삼배를 올렸다. 절마당에서 ‘우리마당’식구들이 사물을 쳤고, 우리는 높아졌다 사그라지는 사물 소리에 각자의 기원을 실었다. 지주스님도 흥을 아는지, 거 참 잘한다. 한소리 하신다.
아침 일찍 화천으로 출발했다. 평화의 댐으로 가는 아흔아홉 고갯길은 아찔했다. 응달진 빙판길을 달릴 때면 버스가 끼기끼끼기익, 요상망측한 소리를 냈다. 아래 계곡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치 고적했다. 아무런 인적도 없었다. 우리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평화의 댐이 나타났다. 정말이지 기가 막히는 댐이었다. 그 기막힘을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광치령이니, 미시령이니, 진부령이니 하는고개들을 넘어 설악산 국립공원 안으로 접어들었고, 순자붕어(?)가 살고 있다는 백담사를 스쳐 지나 고성으로 향했다. 드디어 동해가 푸른 얼굴을 잠깐씩 내비친다. 몇 개의 해수욕장을 지났다. 집집마다 ‘앵미리’를 꿰어서 말리는 중이다. 고성 통일전망대에 가기 위해서는10여분짜리 애국영화를 봐야 한다. 그리고 강원도 감자구이도 사먹어야 하고, 아직 덜 말라 살이 통통한 오징어도 구워 먹어야 한다. 아, 통일도 철저한 상품일 뿐이다. 이곳에도 여전히 500원짜리 망원경이 있고, 즉석 사진을 찍어 파는 아저씨가 있다. 그 찍사아저씨와 옥신각신 했다. 자기는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더러는 찍지 말라고 해서. 그런 모든 것들 때문인지 해금강을 봐도 별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북한땅도 결국은 상품처럼 생각됐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철책선도, 무장공비들의 사진도, 감자구이도, 오징어도 모두가 통일이라는 연극무대에 꾸며진 소품들 같았다. 우리는 거기에 엑스트란가?
그렇다, 엑스트라다 라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통일을 생각하며 이곳에 왔지만 정작 통일을 어디에도 없었다. 통일까지도 상품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막연하나마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통일에의 꿈이나 의지가 오히려 더 희미해진 것도 이번 기행을 통해 얻은 불행한 결과였다. 분단을 가슴 아프게 느끼지는 않더라도, 그 어떤 정당성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야 50년 4개월 동안 분단을 유지해온 명분이 서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분단조차도 팔아먹기 좋은 상품으로 포장돼 있었다. 통일이 된다면 상품가치가 없어지니까 이들은 이 상태를 영원히 지속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것은 단편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그 단편적인 생각이 큰 좌절을 안겨다 주었다. 분단이네 통일이네 하는 것들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
인화된 사진을 보니 나는 자유의 다리를 배경으로, 월정리 역을 배경으로, 백마고지를 배경으로, 로동당사를 배경으로,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엉거주춤 비식비식 웃고만 있다. 하기는 웃지 않으면 어쩌랴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꼭 이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을까?
전비하지 않는 자에게 통일은 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너무도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엉거주춤 웃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 다시 내게 분단길을 나설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고 통일을 망원경 속에서 찾지는 않을 것이다. 길고 긴 분단기행을 통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 통일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분단기행은 별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바랐던 대로 북한땅을 봤고,동해도 봤고, 비무장지대에 생태계에 대해서도 들었지만, 통일과 문학에 대해서, 통일을 위해 내가 해야 될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준비가 부족했던 탓이다. 또 그것은 꼭이 휴전선앞에 서서 북한땅을 바라보아야 얻어지는 것은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통일을 찾아야 할까? 이것이 이번 백제기행이 내게 남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