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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2 | [문화저널]
<제41회 백제기행>월출산 자락의 절집들 _ 월출산
윤희숙 주부 (2005-01-25 15:11:43)
푸르른 산죽이 하얀 눈에 덮인 채 나의 남도답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대학 3학년 때 제주도로 정해진 졸업여행을 포기하고 두 명의 친구와 보길도를 향해 길을 나섰다. 광주를 거쳐 차창밖으로 지나치는 나주며 영암, 영산포, 해남, 강진은 이정표만으로 일별한채 무려 5시간 이상을 달려 목적지의 관문인 완도항에 도착했다. 보길도행 배편과 배삯을 알아본 후 우리는 주춤하고 말았다. 배삯이 예상의 두배가 넘었고 그 날의 마지막 배는 이미 보길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심각한 고민 끝에 칼자루를 들었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된다는 심정으로 행로를 바꾸었다. 완도에서 배편으로 10여분이면 갈 수 있는 신지도라는 섬이 수정된 목적지였다. 신지도는 금빛 모래가 깔린 모래밭이 2킬로미터에 이르며 모래를 밟으면 우는 소리가 난다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때가 5월초가 아니었다면 해수욕장인들 어떨까. 우리는 마치 돈키호테가 된 기분이었다. 사전 준비없이 떠난 첫 남도답사는 완전히 실패하였다. 하지만 차창으로 일별했던 그 지명들이 우리의 가슴을 얼마나 설레게하는 곳들인지를 곧 깨달았다. 그건 아마 곽재구의 다산 초당 가는 길을 통해서 였을거다. 첫 답사의 실패를 곱씹으며, 이후 그곳들을 여러차례 찾아가곤 했다. 그것의 대부분은 백제기행을 통해서 였다. 일 년만에 참가하는 백제기행은 그 목적지가 영암 월출산이라는 점에서 나를 설레게 했다. 남도답사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매력을 갖추었지만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남도답사 증후군을 퍼뜨려 전국토에 답사열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남도답사길은 여느 답사보다 참가자들이 많다. 항상 선착순 ○○명만을 고집하려는 문화저널도 이 경우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부지게 짐을 꾸려와 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주최자의 처분만을 바라는 무자격 참가자(미리 기행참가신청을 하지 않고 무작정 출발장소에 나와 떼를 쓰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이번 기행에도 나타났다. 예정에 없던 승용차를 대동하고도 여럿은 버스바닥에 앉거나 통로에 서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월출산 자락의 절집들 이란 주제를 가진 이번 답사길에서는 월출산도갑사와 무위사, 월남사지, 마애불, 왕인박사 유적지 등을 거치기로 했다. 도갑사와 무위사는 월출산을 사이에 두고 있어 산행에도 안성맞춤이다. 2시 반쯤 전주를 출발했다. 입춘을 맞은 토요일 오후, 차창밖으로 펼처진 들판에서 파란 새싹들과 아지랑이가 뭉게 뭉게 피어오를 것만 같다. 날씨는 화창했따. 끝없이 이어지는 나주의 배밭을 지나니 마치 돌병풍 둘러친 듯 서있는 월출산이 나타났다. 고려 명종때 시인 김극기는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이고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에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라고 예찬했고, 택리지에는 돌 끝이 뾰족 뾰족하여 날아 움직이는 듯하다고 쓰여 있다. 이처럼 월출산은 헤아릴 수 없는 돌 봉우리들이 높고 뾰족뾰족 둘러서 있어 작은 금강산이라고 불릴만큼 풍광이 빼어나다. 일행은 6시무렵, 월출산 기슭 군서면 구림리에 있는 월남사지에 도착했다.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절이다. 백제후예인 견휜이 백제의 부흥을 꾀하며 치열하게 전투를 한 곳에 백제인들을 추모하고 그들의 정신을 집결시키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월남사지의 유물들은 고려 때 만들었지만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월남사는 현존하는 탑의 크기나 사적지의 규모로 보아 대단히 큰 절이었을 것이다. 고려청자 파편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 청자 조각들은 절 벽에 붙이는 타이루의 역할을 했다. 그 귀한 고려청자로 벽을 장식했을 정도로 전성기 때 월남사는 대단히 크고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월출산의 빼어난 풍광을 살려 자연과 조화를 이뤄 지은 아름다운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의 월남사는 3층석탑과 석비. 주변 민가의 기둥을 받치고 토방을 이루는 과거의 주춧돌만이 그 옛날의 영화를 퇴색된 채로 보여주고 있다. 7.4미터 높이의 육중한 월남사 3층 석탑은 고려의 모전석탑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술적인 면에서는 떨어지나 미륵사지나 정림사지 석탑과 같은 백제 초기 석탑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이 석탑과 월남사지에서 출토된 백제 와당은 영암지역에 백제문화가 지속된 것을 보여주는 예다. 이 석탑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예쁜 아내를 둔 석공이 이탑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탑을 완성시킬 때까지 이 부부는 서로 만나지 말아야 했다. 석공은 아내에게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집을 나섰다. 탑을 만드는 작업이 길어지자. 예쁜 아내는 임그리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남편을 찾아 나섰다. 머뭇거리는 남편에게 다가선 아내는 딱딱한 돌로 굳어져 버렸고 공들여 쌓던 탑도 한 순간에 무너졌다. 다시 좋은 돌을 골라 탑을 쌓았지만 거듭 탑은 무너졌다. 석공은 돌로 변한 아내를 가져다 탑을 다시 쌓았고 비로소 탑은 완성됐다 어디서 많이 들은 듯한 뻔한 내용이지만 정사보다 야사를 선호하는 민중의 정서엔 이 전설이 더없이 정겨울 것이다. 월남사지석비는 절의 창건주인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고려 고종때 세워졌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대석높이만 2.6미터에 전체가 3.58미터인 거대한 이 석비는 비문은 당시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었다는데 이 또한 확인할 길이 없다. 비석의 비문은 거의 마멸&#46124;지만 귀부의 조각만은 형태가 뚜렷하다. 여의주를 물고 네 발의 발톱을 세운 거북의 형상이 특이하다. 혹시 용이 아니냐라는 의문에 한 분이 용은 9가지가 있는데 비석에 조각되는 것은 대개 짐 지기를 좋아하는 용일 거다라고 답해 주신다.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던 돌을 주워다 지은 허름한 농가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그 옛날 법당과 기타 건물의 일부분이었을 반듯한 주추석과 장대석들이 격에 맞지 않게 허름한 농가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미 대여섯채 민가가 터를 잡은 월남사지와 주변의 성터는 아무런 복원계획도 없이 문명의 손길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는 것 같다. 어둑어둑 해질무렵 숙소인 경포대 산장을 찾았다. 비린 것 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는 빈약한 저녁상을 시장기 하나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송화섭 교수의 영암과 한국의 고대 문화란 주제강연이 있었다. 송교수는 영암은 선사시대부터 마한시대. 백제.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는 동안 서남해안 유역 가운데 영산강 문화권의 중심을 이루었고,. 선사시대의 주거유적지와 고인돌 문화, 마한 시대의 옹관문화, 백제 왕인박사 출생 이야기 통일 신라 도선국사. 조선시대 구림 대동계등 굵직한 역사의 맥을 이어온 곳이다고 설명했다. 여행 나온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고 강연을 들은 후 민요를 연구하는 김성식씨에게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진안 장원질 소리와 민요 각시방을 배웠다. 일명 섬마타령이라 불리는 장원질 소리는 마지막 김메기를 마친 일꾼들이 백중절에 놀면서 부르는 노래인데. 이때 지주들은 술과 음식을 내 놓아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했다고 한다. 각시방은 요즘 전통 혼례식장에서 축하노래로 자주 불리워지는데 혼례마당의 풍경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가사가 아주 재미있다. 한 소절씩 더듬더듬 따라했지만 처음엔 쉽지 않았다. 메기는 소리와 받는 소리를 번갈아 가며 겨우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배웠다한들 들에서 노동요로 부르는 소리를 언제까지 잊지 않고 부를 수 있을까.주무대인 농촌에서조차 듣기 힘든 소리를. 민요배우기와 함께 참가자들의 자기 소개가 있었다.엄마. 아빠와 함께 온 박한그루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다섯 살박이 아이. 백제 기행을 엄마로부터 국민학교 졸업선물로 받고 무주에서 온 모녀, 아이들과 가족을 두고 혼자길을 나선 주부, 다정해 보이는 중년부부 그리고 개학을 앞둔 교사들 갖가지 사연을 갖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번 기행에 모였다. 특히 각 분야에 전문지식을 가진 기행 참가자들은 곳곳에서 보조강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 답살를 윤택하게 해준다. 매번 기행에 참가하는 단골 손님들의 정겨운 얼굴을 대하는 것은 백제 기행의 잔재미이기도 하다. 내일은 산행이 있으니 일찍 주무시라는 진행자의 부탁에도 밤새 술자리는 이어졌고, 그 자리는 훌륭한 장외교실이 된다. 열띤 토론 덕분에 잠을 설친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튿날 아침, 곱게 빻은 쌀가루 같은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일부는 산행을 포기하고 무위사로 향했고 30 여명의 산행 참가자들은 무위사를 뒤로 미루어야 했다. 난 눈내리는 월출산쪽을 택했다. 두류산악모임 회원인 조연씨가 우리의 길잡이를 맡으셨다. 정상까지 이르는 길은 푸르른 산죽이 하얀 눈에 덮인 채 양쪽으로 펼쳐진 아주 낭만적인 코스였다. 짙푸른 잎이 무성한 동백나무에선 금방이라도 빨간 꽃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눈을 높이 들어 오른쪽을 보면 뾰족뾰족한 기암괴석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는게 보였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누군가 뒤에서 천왕봉쪽의 한 바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한번 유심히 보라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구정봉쪽을 향해 솟은 그 바위는 남근 모양은 처음이라며 많은 분들이 극찬을 했다. 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가다 베틀굴에 다다랐다. 깊이가 10미터인 이 굴은 난리때 여인네들이 이곳에 와 베를 짰다는 유래에서 베틀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음수를 지닌 음굴로 그 모양이 여근을 닮았고 천왕봉의 남근석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월출산의 제2봉인 구정봉에 다다르자 갑자기 진눈깨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구정봉은 9마리의 용이 오만과 만용을 부리다 모두 벼락을 맞아 죽고 그 자리에 9개의 웅덩이가 생긴 곳이다. 구정봉 20여미터 아래 암벽에 국보 제144호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을 보기 위해 궂은 날씨에도 산행을 감행했는데 결국 산의 변덕스런 기후탓으로 마애불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차게 내리치는 눈발에 모자도 없이 산을 타던 몇몇의 여자분들의 머리에 설화가 피어있었고. 그 아름다운 모습에서 살아있는 보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그 보살들 덕인지 악천후에서 우리 일행은 별사고 없이 서로 도와가며 무사히 도갑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오다보니 맨먼저 만난 곳이 도갑사 도선수미비. 고승 도선과 수미를 추모하기 위해 장장17년이란 세월동안 공을 들인 비석이다. 1500자가 음각으로 비문에 새겨진 도선수미비는 거대한 몸집을 가지 거북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 조각돼 있다. 비신 측면에 조각된 구룡문이 화려하기 그지 없다. 하나의 비에 두 스님을 추모한 것이 특이하다. 1653년에 제작돼 34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다. 17년의 공력이 헛된 것은 아닌가보다. 익산 미륵사지 동탑을 자신의 위업을 위해 무리하게 복원한 현대인의 욕심이 치졸하기 그지없다. 그 동탑은 단 몇 년도 견디지 못하고 균열이 생겼다 한다. 도선수미비를 지나 대웅전에 이르는 길 중간에 최근에 대리석으로 만든 아치형의 다리가 있다. 그 다리 오른편에 미륵전이 있다.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불상은 광배와 불상을 함께 조각한 마애불적인 기법으로 고려시대 불상을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미륵전 안 왼쪽 벽에 감색 바탕에 금빛으로 여러 신중의 군상을 그려 놓은 벽화가 독특한 분위기로 눈길을 사로 잡는다. 이전에 봐온 탱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가지는데 이 독창적인 불화를 보고 유홍준 교수는 마치 임옥상이가 납품한 것 같다 며 극찬을 했다한다. 불상과 불화보다 허름한 미륵전의 모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키 낮은 흙돌담과 돌담 위에 얹은 기와 미륵전을 병풍처럼 감싸안은 대밭, 절 뒤편에 놓인 약수터, 약수터 옆 담장 사이에 뚫린 샛길, 그리고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흰 고무신,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산행전에 헤어진 일행과 도갑사에서 합류했다. 그들은 눈내리는 무위사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아니, 아니 눈이 내리는게 아니고 그냥 하늘에 멈춰있었다고 흥분한 채 그때의 감동을 전해주었다. 오는 길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참빗을 만드는 곳에도 들렀다며 새가 촘촘한 참빗을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우리의 산행이 얼마나 좋았는지를 말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영암 죽정리와 군서면에는 장승의 초기 형태인 장생이라는 석비가 있다. 국장생과 황장생이라는 이름의 이장생은 동서남북 4곳에 설치되어 절 주변의 방위나 경계를 표시하거나 잡귀를 막는 기능을 한다.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는 장승과는 기능면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이 장생은 십장생에서 이름을 본뜬 것 같고 도갑사와 통도사에서만 볼수 있는 흔치 않은 것이다. 군서면에서 점심을 하고 왕인 유적지를 찾았다. 왕인은 우리의 우수한 문화와 학문을 일본에 전파하여 큰 칭송을 받은 인물이지만 이곳 영암이 그의 출생지라는 설 말고는 확인할 내용이 별로 없다. 넓은 턴에 자리 잡은 호사스런 유적지는 건물에 비해 내용들은 빈약하기 그지없는 다른 곳의 유물관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동학 전적지에 있는 황토현 기념관을 보는 것 같았다. 이번 기행에서는 무위사와 월출산마애석불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힘겨운 산행을 한 탓인지 기분은 상쾌했다. 다시 긴 시간을 달려 전주로 돌아온 일행은 여행으로 생긴 피로와 헤어지는 아쉬움을 뜨거운 콩나물국밥으로 달래며 다음 답사를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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