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 [서평]
독일에 부치는 편지-이수갑 선생님께
이휘현 KBS PD(2005-01-08 10:07:37)
누군가가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느낌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저의 언어들은 낭만으로 뒤엉켜버릴 것 같습니다. 12년 전에 읽었던 전혜린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여전한 잔영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쓸쓸한 추억으로 간직된 한 시절의 열정의 대상이 훌쩍 떠나버린 나라여서 그럴 것입니다. 혹은, 짙은 어둠이어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제 이십대의 끝자락에 잠시나마 망명처로 진지하게 고려했던 나라가 바로 그 곳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독일이라는 유럽국가는 저에게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의 첫머리가 장식하는 우중충한 잿빛 하늘로 수놓인 낭만의 메타포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이 나라 한반도 땅으로 배달된 두툼한 편지 꾸러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꾸려진 그 편지글의 겉봉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지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발신인의 이름은 ‘어수갑’이라는, 저에게는 다소 생경한 세 글자였습니다. 바로 선생님의 성함이었지요. 저는 곧장 그 베를린발(發) 편지꾸러미를 개봉했습니다. 그리고 그 꾸러미 속의 글들은 낭만의 소회로 얼룩진 내 마음속의 독일 풍경을 지난했던 한국현대사의 도면 위에 그려진 지극한 현실의 풍경으로 바꾸어놓았지요. 그것은 실로 뿌듯한 독서의 체험이라 할 만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 남단에 짙게 드리운 분단 이데올로기의 그늘 밑자락에는 몇 가지의 언어로 갈무리 될 만한 치명적인 주홍글씨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자면 아마도 간첩, 공작원, 반체제인사 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서운 화인(火印)들은 대부분 실재하는 것이 아닌 명목으로만 존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만일 저에게 감히 패러디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얼마 전 타계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을 이렇게 인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가 나를 간첩이라고 불러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시민에 불과했다// 네가 나에게로 와서 간첩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에게로 가서 고초를 당했다…”
패러디라는 것이 웃음을 주요 기제로 삼는 것이기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수도 있겠습니다만,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꽃 패러디’는 그냥 쉬이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동안 이 곳 한반도 남단에서는 어수갑이라는 이름 뒤에 ‘간첩’ 혹은 ‘공작원’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1989년 한반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임수경 방북 사건의 배후조종자로서 말입니다. 말 그대로 조국이 선생님을 간첩이라고 불러준 탓에 선생님이 대학 교수의 꿈을 안고 떠났던 독일 땅은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의 유형지(流刑地)가 되어버렸던 셈이지요. 허나 선생님이 이 책을 통해 전하는 당시의 정황을 보면 얼마나 어이없습니까.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독일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가는 임수경과 단 네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 그 혐의가 곧 선생님을 꼬박 십 년 동안 ‘간첩’이라는 굴레 밑에 가두어 버렸던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글 이 곳 저 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어떤 상처의 편린들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묻어두려 한다 해도, 그 상처들은 끊임없이 도드라지고 또 도드라지기 마련이지요. 그 해 1989년을 선생님은 “붕괴와 무(無)”의 시대였다고 회고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졸지에 간첩이 되었고, 그로 인해 선생님의 서울 집 또한 쑥대밭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더군다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는 아버지의 임종이 있었으나 그 자리를 지켜드리지도 못한 죄스러움이 또한 가슴 한 복판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상처는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지요. 그렇게 궁지에 몰렸을 때 선생님을 외면해 버린 동지들에 대한 원망이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상처로 남았을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습니다. 특히, 아래에 인용하는 문장들을 보면서 말입니다.
“공안 당국이 내게 씌운 ‘훈장’이야 참아낼 수 있었지만 과거에 ‘동지’인 줄 알았던 주변 사람들이 피하는 것은 정말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절대 내가 먼저 누구에게 연락하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땐 정말 사람들이 싫었습니다. 당연히 외로웠습니다.……”(254쪽)
<베를린에서…>를 읽어내는 묘미는 어쩌면, 한 운동가의 회고 속에 스며들어 있는 한 실존인의 지독한 자의식과 상처들이 오롯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선생님의 책에서는 그 지독한 상처와 패배 그리고 자의식 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따스함이 느껴진다고 말입니다.
“내 생의 화두는 사랑이다.”(19쪽)라고 선생님께서 머리말에 공언하셨던 것처럼, 기본적으로 선생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 한 번의 대면도 없었던 제가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지난날들과 화해하고 싶습니다. 이젠 저도 그럴 나이가 되었습니다.”(324쪽)라는 화해의 제스쳐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그저 ‘따뜻한 책’으로 선생님의 글들에 대한 감상을 갈무리 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또한 선생님의 글이 저의 맘속에서 공명을 일으키는 정치성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선생님의 회고가 이 책 속에서 단순히 과거완료형으로 그쳐버리고 말았다면, 저는 1990년대 이후 흔히 볼 수 있었던 감상적 후일담으로부터 이 책의 정체를 따로 떼어내지는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선생님께서 유신과 80년 광주, 그리고 임수경 방북 사건과 같은 일련의 굵직한 한국현대사의 질곡을 헤쳐 나오면서 갖추게 된 정치적 ‘균형 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에서 도드라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라디칼하되 결코 엑스트렘(extrem)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극단적인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를 망치는 것입니다.……(146쪽)
어쨌거나 오른손은 왼손으로만 씻을 수 있고, 왼손은 오른손이 있어야 제 몫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각각의 고유한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며 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유독 사람 사는 사회에서만 이런 평범한 진리가 지켜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157쪽)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선생님의 정치적 태도는 수정주의나 개량주의로 비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진정성을 믿습니다. 이는 정치적 온건성을 하나의 균형감각으로 이해하는 저의 정치적 편향 때문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선생님이 이 사회를 그리고 이념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짙은 휴머니즘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책읽기에 대한 흥미를 잊고 살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의 절박함은 언제나 저에게 각박한 정서를 건네주었을 따름이었지요. 이 책은 그런 저에게 오랜만에 ‘책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선생님의 가슴 따뜻한 글들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