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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 | [문화저널]
<옛 사진으로 보는 삶과 역사>사방팔방으로 선정을 널리펴라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2005-01-08 10:03:20)
이제 반년 정도만 기다리면 50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도청이 새로운 장소를 마련해서 이사를 할 것이다. 현 위치에 ‘도청’이란 건물이 들어서게 된 것은 지금의 건물은 아니지만 일제시대인 1921년에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2층 건물이 처음이었으니까 전라북도 도제(道制)가 시행된 지 40년만의 일이다. 지금 건물이야 한국전쟁 때 무기고 폭발로 인해 무너져 버린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니까. 딱 53년 동안 전라북도를 총괄하던 행정관서가 그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건물로만 친다면 현재 도청건물은 한국전쟁 직후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때, 말 그대로 힘들게 지은 건물이다. 건축학적으로는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도청이 세워진 그 공간이 가지는 역사성은 물론 그 보다 훨씬 더 이전의 일로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굳이 4,800평이라는 넓은 땅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화생존의 법칙이 아니라 해도 우리 지역에서 차지하는 현 도청부지의 문화적 가치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세상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넘들 쉽게 하는 말로 지배자 중심으로 볼 것이냐 아님 민초들 중심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도청사가 있는 그곳은 적어도 고려시대 이래 치소(治所)로서 대민행정(對民行政)의 중심지였다. 그 중심지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했느냐에 의해 백성들의 복과 화가 달려 있던 곳이다. 해방 이후 도청 광장이 민의(民意)를 전달하는 대동(大同)의 공간이었던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그 역사적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길이 별로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 자리에 서 있었음에도 우리에게 남겨진 사진은 고작해야 전라감영의 정문에 해당하는 포정루(사진 1)와 전라감사의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사진 2) 정도일 뿐이다. 사진 1은 현재 도청 동쪽 출입구 쪽에서 도청본관과 중부경찰서 방향을 찍은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정면 3칸 측면 3칸 정도의 누각이 바로 포정루이고, 좌측에 있는 2층 누각은 풍남문이다. 포정루의 위치는 현 도청건물과 중부경찰서 사이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세워진 도청(사진 3)의 출입문이 위치해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그 자리에 홍보탑이 서 있다. 전주성의 정문인 풍남문을 통해 들어오면 바로 포정루 앞을 지나 객사에 이르기까지 일직선의 도로가 중심 도로인 셈이다. 이 사진에서 우리가 오버랩할 수 있는 것은 포정루 앞 도로 건너편에 서 있는 비석들이다. 전주에서 비석들 하면 떠오르는 곳은 다가공원이다. 다가공원 광장 산자락 밑에 일렬로 늘어섰던 비석들, 예전에는 천변의 뚝을 따라 길게 늘어 서 있었던 비석의 원 위치가 바로 포정루 앞이었던 것이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여러 곳에 흩어진 것을 다가공원으로 모아 놓은 것은 1954년 4월의 일이다.(사진 4) 이 비석들은 관찰사, 별장 등의 선정비들이다. 지도 1을 보면 이 선정비들에는 각각의 비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선정비들과 마주한 포정루에는 신문고를 매달아 놓았었다. 억울한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어 임금의 선덕을 기리라는 의미에서 또한 도내 수령들의 포폄(수령의 인사고과)을 사언절구로 요약해서 걸어 놓기도 했다. 백성들이 이 문을 지날 때에는 관리들의 선정(善政)을 바라는 것이었지만, 감영에서 이 문을 나갈 때에는 모든 길로 통한다는 팔달(八達)이란 편액이 붙어 있었다. 즉 모든 백성과 관리들이 이문을 지나 사방팔방으로 선정을 널리 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전주의 중심도로인 팔달로 역시 사통팔달이라는 보편적 의미와 함께 전라감영의 출입문이었던 이 포정루(팔달문)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사진 2는 ‘임금의 덕을 베풀어 백성을 교화한다(宣上德 而化下民)’는 선화당의 모습이다. 세간에 전라감영의 복원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핵심적인 시각정보를 가지고 있다. 정면 7칸 규모로 약 78평에 달하는 큰 건물이 전주성 내에서만 따지자면 임금의 궐패(闕牌)가 모셔져 있는 객사 다음으로 큰 건물인 셈이다. 몇 차례의 화재 끝에 사진 속에 있는 건물이 세워 진 것은 1804년으로 관찰사 정민시가 중건한 것이다. 1921년 11월 그 기능을 도청 건물로 물려준 선화당은 해방 이후까지도 역사의 질곡을 그대로 담아내 보여 주다가 1951년 도청 무기고 폭발에 의한 화재로 없어져 버렸다. 없어진지 50여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남은 것이라곤 달랑 이 사진뿐이라는 점은 쉬 납득하기 어려우며, 얼마나 발품을 팔면 찾을 수 있을까하는 마음뿐이다. 전라감영 복원 문제가 뜨겁다. 완전 복원 주장부터 시작해서 무슨 복원이냐 새로운 집객력을 갖춘 문화시설을 두어야 한다는 등…. 동상이몽이긴 하지만 복원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는 도출된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위치정보나 시각 정보에 대한 고민들 없이 도청사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우를 범하고 있다. 전라감영은 건물 복원뿐만 아니라 그 공간이 가지고 있던 역사 문화적 콘텐츠를 새로운 시각으로 부여할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는 모티브의 소재 역시 그와 관련해서 고민해야지 경제적 ‘집객성’만을 고집할 경우 두 마리의 토끼를 다 놓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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