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 [문화저널]
<남형두 변호사의 저작권 길라잡이>이 소장학자에게 우리가 해줄 것은
남형두 변호사의 저작권 길라잡이(2005-01-08 09:59:55)
얼마 전 몇몇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임원경제지를 완역하는데, 강남의 모 영어학원 원장이 3억원을 희사하고, 지식산업사에서 출판을 맡기로 하여 완역을 위한 큰 삽을 떴다는 뉴스가 있었다.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유형원의 반계수록,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식으로 그 내용도 모르면서 밑줄 쳐 가며 외웠던 기억 한편의 임원경제지가 뇌리에 다시 돌아왔다.
조선시대 개인문집으로서 여유당전서에 버금가는 113권 52책의 방대한 이 저술은 농업뿐만 아니라 의복, 식품, 요리, 건축 등 의식주 및 각종 기구, 재테크, 독서법, 건강, 의학, 취미, 지리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격의 박물학서로서, 당시 경제 및 사회상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관련논문에서 인용할 때 몇몇 부분이 국역된 바 있으나, 전체가 완역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국역이 완성되면, 대략 30∼40권 정도가 된다고 하니, 정보나 출판의 양이 오늘날에 비하여 턱없이 적었을 당시에 이와 같은 방대한 저술을 한 그 자체가 경이롭기만 하다.
평소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지식산업사 대표와 이야기하는 중에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직까지도 완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었는지 묻게 되었다. 대표의 말을 듣고 보니 차라리 안 듣는 편이 정신건강상 나을 뻔 하였다. 뛰어난 한문실력 외에도, 인문, 사회, 자연과학에 두루 걸친 지식이 필요하여 정부 또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어느 곳에서 이를 담당하여야 할지, 예산은 어느 기관에서 출연해야 할지 불분명하여, 매번 논의만 하다가 허송세월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도 그럴 것이 걸리는 부서가 한두 개가 아니다. 농림수산부, 산업자원부, 문화관광부, 보건복지부, 교육인적자원부 등(?).
이웃나라 일본은 메이지시대 때 이미 고어로 된 자기 나라의 모든 고서에 대한 현대어 번역작업을 완료하였다고 한다. 임원경제지를 놓고 솔직히 문화유산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럽다. 오천년의 유구한 역사 운운하면서 불과 2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것을 유산이라고 하기에 낯간지럽지 않은가? 학원 원장이 쾌척한 3억 원으로 이 일이 완성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돈의 과다를 떠나 그동안 정부와 어떤 연구기관도 손대지 못한 일에 단초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아침마다 무슨 오지탐험이니 하며, 지구 끝에 있는 나라에 찾아가서 이색풍물을 소개한답시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TV 다큐멘터리 한두 편의 제작비용이면 충분한 돈이다. 솔직히 말해 서울에 있는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도 되지 않는 돈이다. 임원경제지는 햇빛을 보았으니 그래도 나은 편이다. 규장각에는 아직도 먼지만 켜켜이 쌓여있는 우리의 빛나는 문화자산이, 임원경제지처럼 또 다른 독지가가 나오기까지 또 수십 년을 그대로 있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이 어려운 일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이 소장학자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렵사리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하여 CD 몇 장으로 담았더니, 불법복제본이 나돌아 애를 먹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경제적인 보답으로 사회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저작권이다. 번역도 엄연한 저작행위로서 번역저작물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된다. 어렵게 번역한 것을 저작자의 동의 없이 표절하는 것을 방치한다면, 어느 누가 나서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규장각에서 우리 서가로 옮기는 그 일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