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 [문화저널]
<이종민의 음악편지>살림을 위한 사랑
이종민 전북대 영문과 교수(2005-01-08 09:54:37)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큐핏(Cupid)과 푸쉬케(Psyche)의 이야기는 사랑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최초 태허(太虛, chaos)에서 비롯된 사랑의 신 에로스(Eros)는 만물의 생성을 관장했습니다. 음(陰)과 양(陽)의 기운이 서로를 그리워하게 함으로써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후기신화에서는 그보다 탄생이 늦은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아들로 정리가 됩니다. 로마 신화에서는 이름도 비너스(Venus)와 큐핏으로 바뀌게 되는데 어머니 여신의 명에 따라 사랑의 화살이나 쏘아대는 존재로 전락해버립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여신이 아름다움의 묘약을 지하세계에서 얻어온다는 점입니다. 푸쉬케의 마지막 시련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녀는 비너스 여신의 명을 받아 풀루토(Pluto)를 찾아가 아름다움의 묘약인 잠(놀랍게도 아름다워지는 비결은 잠을 잘 자는 데 있답니다!)을 얻어옵니다. 그런데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이 풀루토가 바로 재물(財物)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원래 만물의 생성원리였던 사랑이 아름다움의 부림을 받고 다시 그 아름다움은 재물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형수술이 성행하는 것이나 혼수 때문에 사랑이 깨어지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이렇듯 주체적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사랑의 의미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조건 지워지거나 그것의 부림을 받는 것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는 말보다는 ‘사랑에 빠졌다’라는 피동의 말을 더 잘 사용하게 되었나 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건 주체적으로 할 때는 그 보상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억지로 그 일을 하게 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없으면 쉬 실망하고 지치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사랑의 증거가 있어야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부부간이건 부모자식간이건 번잡한 삶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서양 사람들처럼 만날 때마다 ‘아이 러브 유!’ 하기도 남세스런 일이고 말입니다. ‘짝사랑이 가장 순수한 사랑’이라거나 ‘첫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도 이와 연관시켜 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주체적인 사랑, 그것이 진짜 사랑 아닌가요? 이러한 짝사랑이나 첫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기뻐할 일만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다는 것 자체도 부담이지만 나중에라도 그 사랑의 원인 혹은 이유를 알게 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우리들 마음을 구속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가 (짝)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주체로 서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부림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허무와 절망의 구렁텅이를 비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주인 되게 해줍니다. 말을 바꾸어,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이를 주체적으로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은 스스로 일구어가는 일입니다. 살리는 일입니다. 살림으로써 스스로 사는 생명의 일입니다.
사랑의 한자말은 ‘인’(仁). 행인(杏仁)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인’이 곧 ‘살림’(생명)의 원동력으로 모든 생명활동의 기초가 됩니다. 제 사부님 말씀대로, 이러한 생명의 기운이 발현되는 질서를 쫓아 인간의 행위 규범으로 삼은 것이 예(禮)라면, 반생명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적인 것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이 생명적인 것과 반생명적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예지가 지(智)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지키려는 마음, 이 사랑의 마음이 바로 우리를 사람 되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말의 ‘사랑’은 ‘사람’ 혹은 ‘살림’과 우연스럽게도 울림이 비슷합니다. 영어나 독일어에서도 ‘사랑하다’(love/lieben)라는 말은 ‘살다’(live/leben)와 닮아 있습니다. 우연이라 해도 매우 의미심장한 우연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일굼(살림)으로써 우리 스스로 주인(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섭리의 배려일 것입니다.
생명을 아끼고 키우는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 참 주인이 되는 꿈을 새해를 맞이하며 꾸어봅니다. 그러한 꿈을 키워가고 계실 분들을 위해 사랑 노래 하나 보내드립니다. 벨기에 출신의 라라 파비안(Lara Fabian)이 유명한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 1671~1751)의 [아다지오](Adagio)에 가사를 입혀 부른 노래입니다.
당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에게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람 속에서 당신 목소리를 듣고
내 몸 안에서 당신을 느낍니다.
내 마음과 영혼 안에서
나는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다지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완성된 사랑은 노래의 소재가 되지 않습니다. 미완이나 이루어질 수 없음이 주는 애틋함이 없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완성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언제나 꿈으로, 가능태로만 남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것을 그리며 기다리는 것이고요.
“빼어난 가창력과 미모, 고급스런 클래시컬 팝 넘버로 다가오는 또 하나의 디바!” 언뜻 셀린 디온(Celine Dion)을 떠오르게 하는 파비안에 대한 소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디온과 비교가 되는 것은 비단 그 음색의 흡사함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경력도 매우 비슷합니다. 두 사람 다 캐나다 퀘벡지역을 주 활동 기반으로 프랑스어 앨범을 먼저 내고 나서 영어 앨범으로 세계시장을 두드렸습니다. 시차가 있긴 하지만 양대 언어권에서 대형 가수의 자리에 오른 것이나 그 기반이 뛰어난 가창력과 강력하고 역동적인 보컬의 구사에 있다는 점도 비교를 부추기는 부분들입니다.
원래 [아다지오]는, 17-8세기 이태리 작곡가 알비노니가 남긴 악보를 토대로 1945년 이태리의 레모 지아조또(Remo Giazotto)가 재작곡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곡입니다. 원곡 자체가 워낙 아름답고 애수어린 감미로움과 장중함을 함께 지니고 있어 광고나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자주 사용되곤 하지요. 시낭송과도 잘 어우러지고요. 실제로 김용택 시인의 [사랑]을 낭송할 때 그 배경음악으로 사용되었는데 시의 내용도 그렇지만 김세원의 정감어린 목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말 그대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새해 선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처럼 큰 대중적 인기를 이미 누리고 있는 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로 부르기란 어지간한 내공 없이는 ‘무모한 짓’이기 십상입니다. 파비안처럼 클래식적 소양을 갖춘 가수가 아니고는 감히 도전할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시 새해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이 곡 들으시며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사랑의 생명력 되살리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 지적대로 ‘모든 소망 다 이루소서!’라고 기원하지는 않겠습니다. 생명의 사랑정신에 어긋나는 반생명적 소망도 있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것 말고 나와 이웃을 참생명의 세계로 이끌 수 있는 소망, 그런 참소망 많이 키우시고 이루시기 바랍니다.
음악은 이종민 교수의 홈페이지(http://e450.chonbuk.ac.kr/~leecm)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