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한 명상
신귀백의 영화엿보기(2005-01-08 09:49:21)
1. 모터사이클
동네 은행 앞에서 노점을 하는 청년은 틈틈이 장 코르미에가 쓴 초코렛 표지의 전기를 읽고 있었다. 말을 붙여 보았으나 나는 살 것이 없었다. 여자들의 장신구를 파는 그는 요즘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다. 방한복 안에 신문지를 접어 무릎 아래를 감싸지만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들기에. 겨울 한동안 가죽옷을 입고 오토바이로 시골길을 질주하던 농촌 청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가스통이나 퀵 서비스 박스를 싣고 청계천 복원공사로 막히는 도로 위를 달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그들이 가죽옷을 즐겨 입는 이유는 째내려는 것만은 아니다. 넘어졌을 때 덜 다치려는 것.
청계천변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 아닌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 졸업반 푸세는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안데스를 넘는다. 남미 모든 여인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그러나 호수와 산악 그리고 사막을 지나는 동안 그는 농촌과 광산 사람들을 만나면서 커브를 돌 때마다 넘어져 생채기를 만들어 간다. 천식이 심한 이지라이더의 바퀴가 더 이상 굴러가지 않을 때, 에르네스토는 베레모에 시가를 문 게바라가 된다. 볼리비아 산악에서 당나귀를 탄 게릴라 대장 체의 속눈썹은 깊다.
2. 다이어리
오토바이 뒤에 여자를 태워 본 사람은 안다. 등 아래 꽁지뼈로 느껴지는 체온 이상의 열기를. 그 열기를 주던 사람이 편지 한 장으로 더 이상 동승을 거부할 때, ‘이별의 곡’을 건반으로 누를 수 없는 사람은 일기를 쓸 것이다. 추억과 자책 그리고 결심으로 점철된 일기가 쓰기 싫어질 무렵 새로운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나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다이어리라는 가죽 노트를 들고 다니던 아이들은 이제 펜으로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싸이월드로 가서 금방 일촌을 맺기에.
끊임없는 활력과 열정적인 영혼을 가진 청년은 애인 치치나를 잃었지만 더러워진 메리야스차림으로 끝까지 일기를 쓴다. 에르네스토는 노트북이 없기에. 그는 아마존 문둥이 촌에서 닥터 다이어리를 채워나간다. 성인식이다. 갈리아 늪지대에서 치열한 전투 장면을 기록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날씨와 화살 갯수까지 쫀쫀히 챙기던 이순신의 다이어리도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런데 십 수 년 전 대오를 이끌던 박노해나 백태웅은 어디에 그의 일기를 숨겼을까?
3.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소떼에 받힌 늙은 오토바이는 숨을 거두고. 얻어 탄 트럭에는 소가 실려 있었다. “저 소는 눈이 멀었네요?” “볼 것도 없는데요.” 소떼는 안데스 사람들을 닮았고 안데스를 넘는 청년의 성장통은 낮은 목소리로 진행되는 단편소설을 닮아있다. 애인의 수영복을 위해 준비한 15달러를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게 모르게 건네는 대목과 사력을 다해 아마존 강물을 헤엄쳐 건너는 장면은 단편소설의 알레고리를 차용한 기법이다. 이 젊은이는 아직 혁명가의 아이콘이 아니기에 보는 사람의 부담도 적다.
내 사는 동네에는 이 영화가 걸리지 않아 디빅 버전 21인치 모니터로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본 친구 모두, 화면이 수채화 이상이라던데) 흑백필름으로 원주민들의 슬픈 삶을 보여주는 인서트 장면 끝 무렵 사운드가 죽었는데, 비장했다. 이상해서 선을 연결시키니 라틴 현악기의 아름다운 리듬이 흘러나왔다. 아니었다. 음악의 과잉. 다시 스피커를 죽이고 그 부분만을 다시 보았다. 경험해 보시라.
영혼의 값진 음식, 여행! 딱딱한 침대가 척추에 좋듯 힘든 여행은 폭넓고 건강한 영혼을 만든다.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한 청년이 더 이상 에르네스토가 아니듯 이 영화 속에 들어가 본 사람에게 만년설과 사막 그리고 아마존이 지도에 있는 곳만은 아닐 것이다. 평전을 손에 쥔 사람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의 흔적까지 더듬고 싶어질 지 모를 일. 아니 적금을 깨 마추피추를 보게 된다면 자신의 저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세상도 사무치게 그리운 풍경을 만들고 지나온 그림은 든든한 양식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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