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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 | [문화비평]
한겨울밤,열정의 기록
손영미의 문화비평(2005-01-08 09:47:01)
정말 거짓말처럼 눈 한 점 안 내린 가운데 어느새 소설, 대설이 지나고, 다음 주면 일년 중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다. 눈이 안 오니 약국 처마 밑에 배추 기십 포기, 대파 너덧 단 갖고 앉은 할머니들 코끝이 안 얼어서 마음이야 편하지만,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 군밤 껍질을 던지며 불야성을 이룬 도심을 강아지들처럼 쏘다니던 기억은, 좀체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나날이 흐려지는 느낌이다. 그렇다. 겨울은 눈발도 날리고, 성냥팔이 소녀도 좀 떨고 다니고, 구멍 난 신발 속 설핏 스민 물기에 콜록대기도 하며 낯선 거리를 헤매는 것도 필요한 계절이다.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에게 겨울은 힘들고, 초라하고, 궁상맞지만, 그래도 낭만과 온정, 다른 어떤 계절에도 맛볼 수 없는 그리움과 동경이 기적 같은 함박눈과 함께 찾아오곤 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도처에 늘어선 아파트와 연립주택 덕분에 웬만한 사람은 등 따습고 배부르게 지낼 수 있고, 꼭 찬바람 속에 기어가 검불을 걷어오거나 솔가지를 끊어다 군불을 지피지 않아도 머리맡 자리끼가 얼지 않는 21세기에 왜 갑자기 성냥팔이 소녀 타령이냐고? 손등이 터서 벌겋게 부어오르고, 아침이면 막 세수한 손가락이 문고리에 척척 달라붙고, 자정이면 벌써 싸늘하게 식은 구들장 덕분에 겨울마다 며칠은 죽도록 고뿔에 시달리던 그때가 그리운 거냐고? 솔직히 말해, 그렇다. 언제쯤 만들어졌나, 여기저기 솜들이 뭉쳐 있고, 나머지 부분은 허방인 시꺼먼 무명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기라곤 전혀 없는 아랫목에 웅크리고 앉아, 가물거리는 남폿불에 『데미안』을 읽은 다음, 애꿎은 우리 수탉을 흘깃거리며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태어나는’ 새를 끄적거려 보던 그 때가 그립다는 것이다. 그렇다, 적어도 내게 겨울은 춥고, 어설프고, 빈티 나기 때문에 더욱더 꿈이 섧고, 그리움이 가없이 깊어지던 그런 계절이었다. 그리고 이 때 그런 갈망에 날개를 달아 미지의 세계로 용솟음치게 해 준 게 바로 책들이었다. 그래서 겨울의 독서는 더욱 절실하고, 간절하고, 옹골졌다. 그 기억 속의 몇 장면을 소개함으로써 눈도 안 오는 쓸쓸한 겨울, 이토록 누추해진 마음을 달래볼까 한다. 겨울의 독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어느 예고된 죽음의 기록』이다. 그 추운 겨울날 새벽 이 책을 읽은 곳은 경기도 부천의 역 광장이었다. 예정보다 두어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기에 책이나 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역 광장 한쪽에 있는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낯선 도시의 한겨울 아침은 냉랭했지만, 일단 소설 속 동네로 들어가자 추위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거의 초현실적으로 생생히 묘사된 남미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하찮은 오해 때문에 한 아가씨의 오빠에게 배를 찔려 내장을 모두 쏟으며 죽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존재의 뿌리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에 빠졌다. 그리고 그토록 근본적인 동요 덕분에 몸 자체가 극심한 교란에 빠져 그 날 나는 몇 시간의 시험 동안 계속 구토와 설사를 반복했다. 마르께스의 소설이 준 심리적, 육체적 충격과 여러 시간의 긴장 때문에 마침내 시험을 끝내고 일어서자 천정이 빙빙 돌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지금까지 읽은 수많은 책 중 이 소설은 몸이 먼저 기억하는 강렬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디스 워튼의 『이썬 프롬』은 그런 뜨거운 겨울 독서의 또 다른 계기였다. 춥고 외롭던 유학 시절, 온 세상이 차갑고 쓸쓸한 바람에 잔뜩 주눅 들어 초라하게 웅크린 채 저녁을 맞은 어느 날, 나는 얇고 부담 없어 보이는 이 소설을 사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상대에게 자신의 애틋한 심정을 전달할 수도, 더 이상 감출 수도 없는 두 연인의 형편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다가, 늦은 밤 부인이 외출한 저녁, 앳된 연인이 특별히 차린 저녁상을 사이에 두고 행복감에 젖어 있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고양이가 빨간 피클 종지를 깨고, 그 때부터 파국으로 치닫던 이야기가 치명적인 사고,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 찬 결말로 막을 내릴 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창 밖을 보니, 바람에 휩쓸려 주억거리던 세상은 어느 새 탐스러운 함박눈에 뒤덮여 그야말로 동화 속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소설 속의 지옥 같은 프롬 가(家)와 내 눈앞에 하얗고 푸르게 빛나고 있는 현실의 세계는 어떤 식으로도 화해할 수 없어 보였고, 그 엄청난 간극에 내 눈물은 더 진하고 뜨거워졌다. 하지만 내 겨울 독서의 압권은 역시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일 것이다. 문호 괴테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그린 이 책을 나는 사춘기인 중학교 겨울 방학 때 읽었다.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을 읽는 며칠 동안 나는 찢어진 문풍지와 싸늘한 방바닥, 매일 눈밭에 펴 말려도 습기가 남아 있어 불을 땔 때마다 엄청난 연기가 나는 지푸라기 등을 모두 잊은 채 괴테가 생활하고 돌아다니는 프랑크푸르트, 라이프찌히, 바이마르 등의 도시와, 그가 읽는 책, 그에게 영향을 준 위대한 스승과 친구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인 모친과 부유한 귀족인 부친에게서 태어난 그가 자기 학교 교장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외국어 과외를 받아 가며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 유대어로 이루어진 서한체 소설을 쓰는 장면을 읽으며 주판 과외 하나도 받을 돈이 없는 내 처지를 한탄하기도 하고, 친구 케스트너의 약혼자인 샬롯과 사랑에 빠졌다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는 그를 지켜보며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리기도 했다. 실연의 상처를 달래고자 어두운 새벽 시간에 마차를 달려 다른 도시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연민을 느끼기도 했고, 시인, 극작가, 소설가, 정치가로는 물론 연금술, 지질학, 식물학, 해부학, 물리학, 과학사에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긴 그의 강렬한 호기심과 그칠 줄 모르는 탐구를 보며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초라하고, 빈곤하고, 꿈으로만 들끓던 그 겨울, 괴테의 풍요롭고, 화려하고, 놀라운 유년 시절과 청춘의 장면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환상처럼 내 머리 속을 지배함으로써 지워지지 않는 자취를 남겼고, 오늘날 내가 글과 책을 다루는 직업을 갖게 된 것도 상당 부분 그 며칠의 행복한 경험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독서 많이 하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서점 수가 1999년 2만 3000개에서 올해는 대략 1만 8000개로 줄었다는데, 종로서적 하나 못 지켜낸 우리야 말해 무엇 하리. 하지만 날이 가고 해가 바뀌는 동안, 우리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온갖 고난과 고뇌, 인생의 겨울을 그나마 조금 덜 춥게 해 주고, 때로는 눈부신 환상으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지난 40년간의 독서 경험을 근거로 판단하건데, 책밖에 없었다. 기억 속의 아궁이 앞에 주저앉아 다시금 축축한 지푸라기가 뿜어내는 연기에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는 함성처럼 박용래의 시구를 되뇌어 본다. “그대 발꿈치로 그리는/ 엉겅퀴/ 도깨비바늘/ 괭이풀/ 지우고 지우고/ 오 그대/ 가장 뜨거운/ 입김으로/ 그리는/ 쇠죽가마/ 불씨/ 하나뿐인 젊음/ 하나뿐인 노래.” 그리고 우리 독자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청춘의 노래를 책에서 듣는다. |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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