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 [문화와사람]
나의 신학은 통일
김정수 문화저널 편집위원(2005-01-08 09:45:28)
얼어붙은 세상살이, 날씨라도 따뜻하게 해주자는 배려일까? 성탄절을 앞두고도 계속되는 따뜻한 겨울이 아무래도 어색하고 낯설기만 하다. 문규현 신부를 만나기 위해 부안으로 향하는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쌀쌀해졌다고는 하나 겉보기는 봄날이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약속이 힘들었다. 이런 저런 회의다, 판공성사다, 미사 집전이다, ‘이거, 문화와 사람 코너에 잘못 선정한 것 아니야?’ 하는 후회마저 들던 차였다.
남한 땅에서 문규현 신부 모르면 간첩일 터. 아니, 간첩들도 그의 이름쯤은 익히 들어 다 알지 않을까? 꽁꽁 언 땅을 그 작은 몸으로 녹이겠노라 임수경 손을 잡고 휴전선을 넘은 신부. 어디 그 뿐인가, 지난해는 갯벌 살려내라며 삼보일배로 서울까지 행군한 독종신부다. 반독재 운동, 농민운동, 통일운동에 이어 지금 부안에서 반핵 생명운동의 깃발을 크게 흔들어 대며 행정책임자들을 괴롭히는 신부, 그의 형 문정현 신부와 더불어 듀엣 깡패신부(?) 명성까지…, 어느 것이든 우리 뇌리에 강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성탄절을 이틀 앞둔 아침, 미사 시간에 맞춰 부안 성당을 향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워낙 잘 알려진 문제들은 새삼 질문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평소 우리가 익히 아는 바는 쏙 빼고 가능하면 감명 받은 책과 즐겨하는 취미, 최근 본 공연, 혹은 존경하는 인물, 첫사랑(?) 등등 지극히 통속적인 이야기만 해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희망사항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만큼 그의 다른 면이 궁금했다.
작은 골목 안,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교회 건물. 입구엔 <강현욱, 이종규 물러가라>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마당 가운데 아름드리나무에는 <핵 없는 세상>이란 글씨가 선명한 노란 꽃등이 성탄 장식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 여기구나, 담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노란 손수건의 나무가 저랬을까, 의외로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잠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반핵 구호를 우직스럽게 써 붙인 승합차와 트럭들이 그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이일 저일로 바쁜 신부님이라 성당 사목은 제대로 하시는 걸까 하는 건방진 우려가 들기도 했는데, 성당의 안팎을 보니 이곳저곳에 신부님의 섬세한 손길이 엿보인다. 성탄을 앞 둔 판공성사로도 정신없이 바쁘다. 미사 후에도 성사를 원하는 신자들 때문에 한동안 고해소에 머무른 후에야 짬을 낼 수 있었다.
지난 9월 부안에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변화가 생겼다. ‘부안독립신문.’ 조금은 ‘쌩뚱맞는(?)’ 제호 아닌가? 이 신문 이야기부터 꺼냈다. 왜 독립신문인가?
“공모 끝에 당선된 이름입니다. 아직 우리가 완전한 독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지자제도 제대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없고, 기성언론도 많은 문제들을 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안독립신문은 핵폐기장 문제가 낳은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민주 2억5천으로 출발해서 유가부수 2천 2백 21부를 기록하고 있는 신문, 주주나눔 운동으로 독점을 막고 편집권을 독립시키고자하는 신문은 그렇게 출발되었다. 자본을 5억으로 늘리고, 유료독자를 5천부까지 늘리는 당찬 목표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우문을 전제로 물었다. 부안독립신문이 꼭 필요했나? 대답은 명쾌했다. 기존 신문의 진정한 언론 역할이 없다는 것. 역시 짐작대로 최근 일련의 부안문제에 지역 언론의 대처가 이 지역에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절실함인 것이다.
“이거 내가 할 일이냐?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사실 내가 한 일도 아니고요. 부안독립신문은 지자제가 바로 서고, 주민이 주권을 갖는 사회를 갈망하는 주민들의 뜻이 모아져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발행인을 맡은 것뿐이고요.”
신부님은 본인의 이야기를 자제했다. 본인이 판을 끌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바램, 스스로를 낮추는 실천으로 비쳐졌다. ‘그저 함께 할 뿐이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라는 겸양의 말이 대화 중에 간간이 양념처럼 섞였다. 시종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 함부로 자란 수염 사이로 고요히 흐르는 미소와 눈웃음이 예순의 나이를 훌쩍 건너 뛰어 수줍은 소년을 연상케 했다. 평소 시위현장에서 보던 모습이 결코 아니다.
가장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 생각해서 선택한 사제의 길, 소신학교부터 16년간의 신학교 생활. 외가로는 6대째 천주교 집안이었던 문신부는 우연의 일치인지, 서품을 받은 후 묘하게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 부름을 받았다. 전동성당이 집회 장소가 되었던 70년대에 전동성당 보좌신부로 시작, 농민들의 투쟁이 한창일 때는 고산성당에, 그리고 지금 부안성당 신부로 재직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그리고 만약 신부님이 부안에 있지 않으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연히 초대되었다고 봐야지요. 하지만 그 모든 문제를 내가 완결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안 사람들,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의 미래에 생명과 평화에 대한 갈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중 한사람에 불과합니다. 부안읍 인구가 2만 명인데, 경찰이 1만 명이나 상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경찰계엄이죠. 그런 삼엄함 속에서도 와해되지 않고 힘을 모을 수 있는 자리를 부안성당이 제공했다는 생각은 합니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은 위정자들에 대한 섭섭함이 묻어났다. 경찰청장이 주교님께 성당 내 경찰진입 협조 요청을 했을 때 주교님이 단호히 거절하셨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고. 보통사람 같으면 은퇴할 나이에 끊임없이 샘솟는 열정과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감명 깊게 읽은 책, 존경하는 사람 등 통속적인 질문을 통해 우회했다.
“신학을 더 공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그런데 아일랜드의 100일간의 세미나에 참석한 후, 미국에서 해방신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메리놀대에서 크게 느낀 것은 ‘신학을 하더라도 너의 신학을 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신학은 뭘까 생각하니 바로 분단의 문제, 통일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한반도의 신학은 남북문제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 무렵 충격을 준 사건은 조성만 열사였습니다. 아, 통일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고 우리의 삶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역시 예상대로 해방신학은 그의 삶의 중요한 뿌리가 되고 있었다. 문신부는 그 해 메리놀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6월 6일 남북통일염원미사에 참석한다. 그리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이름으로 임수경과 휴전선을 넘는다. 문익환 목사의 ‘통일은 이미 되었다. 이젠 통일을 사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통일은 정치가 아닌 삶의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한반도 역사 속에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은혜롭게 생각하는 그.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며 늘 현장이 소중했기에 그 안에 살면서 있는 그대로 행동하다보니 그것이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 농민 운동으로 비춰졌을 뿐이라는 그는 앞으로 부안 문제에서 넘어야 할 많은 산들을 염려하고 있었다. 에너지 독립을 선언하고, 태양에너지 발전소를 주민 힘으로 세워보자는 문제를 검토한 것도 그런 맥락과 맞닿아 있다.
슬그머니 ‘우리의 안전한 핵’ 보다 ‘북한의 위협적인 핵’도 문제 아니냐 물었다. 반 반핵운동론자들의 주장을 인용한 것이었다. 많이 받았던 질문이어서 그랬을까? 거침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북핵의 문제도 역시 에너지의 문제로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에너지 속국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북한의 인권에 관한 문제는 왜 침묵하느냐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데, 결국 평화나 생명, 그리고 인권의 문제는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획득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체는 북에도 있고, 남에도 있는 것이지요.”
문규현신부님이 부안을 두고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주민들 간의 갈등의 골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누구의 가게를 이용하느냐 까지 주목할 만큼 서로를 불신하고 경원하는 상황은 물리적인 피해, 경제적인 피해를 떠나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사제관 거실에는 독특한 작품이 하나 걸려있다.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되었던 것으로 부안 사람들, 부안의 모든 생명체가 초대된 작품이다. 그물망에 주름 깊게 패인 어부들의 사진, 갯지랭이, 솔방울 등등 부안의 모든 것들이 모아져 있다. 부안이 생명과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했다. 신부님은 저 모든 생명체들이 한 그물 안에 촘촘히 모여 사랑하기를 희망하듯이, 부안 사람들의 다친 마음도 저런 모습으로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했다.
그는 최근 생명평화마중물 운동에 진력하고 있다. ‘마중물’이란 펌프를 사용할 때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물. 곧, 물을 마중하는 물이란 뜻이다. 그 안에 다섯 개의 소위원회가 있어 대안교육사업 학술연구사업, 대외협력사업 공동체 사업 등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운동에 참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뿌리부터 바뀌고 함께 사는 삶, 섬기는 삶, 보듬어 안고 하나 되는 삶으로 변화되어 궁극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두레인 생명평화의 삶터를 만들고 넓혀나가 마침내 온 누리에 이르게 하자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세상이 서로를 존중하며 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생명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다른 생명이 싱싱한 모습으로 살아나면 나의 생명 또한 그렇다는 믿음에서 생명평화마중물 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부안독립신문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 점퍼차림으로 배웅하는 신부님이 부안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든 스며들 듯 잘 어울리는 신부님이 그곳에 있는 동안 생명이 샘처럼 넘실거리고, 평화가 따뜻한 품안으로 깃드는 그런 부안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확신도 함께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