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 | [문화시평]
초라한 삶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라
홍석찬 창작극회 대표(2005-01-08 09:43:10)
전주에서 연극하는 한사람으로서 지난 11월 26일부터 ‘판’ 소극장에서 공연한 서울극단 ‘씨어터 위자드’의 「쿠벅」공연을 전주관객이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하다.
이번 공연은 서울의 젊은 연극인들이 전주공연을 감행했다는 것과 공연예술 창작집단 ‘우레’가 본격적으로 연극기획을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판’소극장 개관 공연이었다는 점등 관객뿐 아니라 연극인들, 문화예술 관련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동안 서울발 전주행 공연이 대극장 공연위주였고 2-3일 짧은 기간이라 지역 연극인들에게 만남의 장이 되지 못하고 그저 ‘타격’을 가하고 훌쩍 떠나버린 꼴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쿠벅」공연은 제작진과 배우들이 20일 이상 전주에서 체류하며 장기공연을 펼침으로써 소극장이 중앙과 지역연극교류의 물꼬로서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였으며, 또「쿠벅」공연이 젊은 연극인과 기획자들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우레’는 몇 년 전에 문화활동을 목적으로 생긴 전주소재의 기획단이다. ‘우레’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전문 기획자인 정종현, 여원경은 전북대학교 기린극회 출신으로서 대학연극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연극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각별한 인재들이라 열정적이지만 대부분 경험에만 의존하는 작금의 연극기획 풍토에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주었다.
연극공연장으로서 문화영토 ‘판’소극장(대표 정진권)의 탄생은 올해 연극계의 최대의 수확이 될 것이다. 열 명의 연기자 보다, 한 곳의 소극장이 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공연팀들이 무대기둥과 조명기의 수량 때문에 충분히 효과를 못 봤다고 지적하긴 했지만 소인극을 공연하는 장으로서 그 기능을 훌륭히 할 수 있음을 확인한 기회가 되었다. “서울의 공연이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소극장에서 한대”. 관객의 집중도와 긴밀함을 최대한 살린 예술성 높은 소극장 공연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며 머지않아 소극장시대가 다시 올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작품 「쿠벅」을 이야기 하자.
우리에게「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언터쳐블」,「평결」등,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로 잘 알려진 미국의 잘 나가는 극작가겸 영화감독인 데이비드 마멧의 「아메리칸 버팔로(American Buffalo.1996)」를 번안한 작품 「쿠벅」은 밑바닥 삶을 사는 세 남자와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몇몇 따라지들의 이야기. 오래된 물건들을 취급하며, 때때로 훔친 물건들을 팔아 먹고사는 작물아비(정우혁 분), 그한테 물건을 대주면서 사는 얼빵이(안치욱 분)와 가죽잠바(송요셉 분). 어느 날 비싼 돈을 주고 동전을 사간 신사의 집을 털기 위하여 작물아비와 얼빵이는 작당을 한다. 이 사실을 안 가죽잠바는 얼빵이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말고 자기를 끼워달라며 작물아비를 회유하고 작물아비는 가죽잠바를 못 믿어하며 제 삼자를 끌어들인다.
「쿠벅」의 소재는 전쟁이나 살인의 이야기, 거창한 인간의 운명, 애절한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욕하고 때리고 서로 의심하고 다치고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손해만 보고 병원비만 날린다.
작품의 플롯은 우정과 배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능력과 용기, 힘을 믿는 작물아비는 항상 “좋아, 좋아”라고 말을 하지만 친구한테까지 흥정을 하는 천상 장사꾼이다.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세 남자의 일상이 극 전개의 순서에 맞춰 느리고, 약하게, 때로는 은폐된 채 진행되다가 각자의 욕망이 분출하는 후반부에서는 폭풍처럼 거세어짐으로써 가벼움과 권태로운 일상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성과 세 남자의 심리, 그들이 억제하고 있던 야수성이 노출되었다. 원제 ‘아메리칸 버팔로‘는 평소에 온순하다가 자존심에 상처입고 무시당했을 때 인간의 폭력성이 드러난다는 메타퍼일 것이다. 이성 없는 약육강식의 사회구조 속에 살고 있음이 처절한 울림으로 전해오는 “우리는 동굴 속에 살고있는 원시인이다”라는 절규가 아직도 들린다.
공연시간 100분 가량을 집중력 있게 세 명의 연기자가 펼쳐내고 있음은 완성도 높은 대본의 힘과 연기자의 작품에 대한 이해, 연출가의 탁월한 연출력, 스텝의 무대 현실화 능력을 보여준다. 과장이 없는 연기와 리듬감이 돋보였고 조명과 음향의 절제는 사실주의 연극의 정형을 보는 듯 했다. 하지만 데이비드 마멧의 원작을 우리나라 현실로 끌어들인 데는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작물아비가 파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곳이 전당포인지 재활용 센타인지 고물상인지 정체가 명확하지 않아 답답함을 느꼈으며 좀도둑질 하러가는 데 총을 가지고 간달지, 외국화폐를 연상시키는 낙타동전은 순간순간 집중을 깼다. 특히 번역투의 말들은 거칠게 드러났다. 서울말씨 라서가 아니라 미국사회를 고발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여태껏 최고의 목소리빨을 자랑하던 한석규를 넘버 투도 아니고 넘버 쓰리로 밀어낼 정도로 목소리들이 멋은 있었지만 우리 현실에 맡게 한다고 너무 무리한 번안을 시도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자의 호흡은 훌륭했다. 많은 연습량이 느껴졌으며, 짧은 기간 동안 쉽게 혹은 많은 고민 없이 만드는 지역연극의 한사람으로서 자성의 념이 있었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명확하며 극 후반부로 갈수록 템포와 리듬감이 살아나 극 전체의 에너지의 안배도 돋보였다. 하지만 뒷부분이 좀 늘어져서 아쉽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뭔가 ‘대단한’ 결말부를 기대한 듯하다. 정말 작품이 늘어진 것이라면 태화표 고무줄을 추천하겠지만 이 작품이 다른 작품과 다른 점이 바로 극 사실적인 내용에 있다. 정말 하찮은 이야기, 우리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내뱉을 수 있는 사건과 대사에 있다. 박근형의 「청춘예찬」이나 체홉의 「청혼」이 그렇지 않은가. 극의 마지막 장에서 만신창이가 된 얼빵이를 부축한 작물아비의 대사는 초라한 삶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얼빵이: “미안해”. 작물아비: “괜찮아”. 그리고 출발을 알리는 경적소리.
서울연극의 특징은 화술과 셋트에 드는 정성, 전문성이다. 비슷한 시기에 소리문화의 전당 명인홀에서 공연된 서울극단 ‘골목길’의「선데이 서울」공연은 「쿠벅」과 형식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전주관객에게 특별하고 질 높은 공연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는데 왜 그리되지 않는 것인지? 연극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이 작품에 별을 몇 개주어야 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가능성과 흔들리고 있는 연극현실에서 ‘너의 정체’를 묻는 계기가 되었다면 족한 것이다.
후배 하나는 「쿠벅」을 보기전과 본 후에 느낌이 매우 달랐다고 한다. 포스터를 봤을 때는 무언가 심오하고 어려운 작품일 줄 알았는데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었단다. 공연을 볼 때마다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던 후배녀석이 대견했고, 「쿠벅」공연을 준비한 ‘씨어터 위자드’와 용감한 기획을 시도한 ‘우레’와 소극장 ‘판’의 선택에 고마웠다.
홍석찬 | 전북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입단, 연기를 시작했다. ‘정으래비’, ‘상봉’, ‘서울로 가는 전봉준’ 등 수많은 연극에 출연했으며, ‘밤비내리는 영동교를 홀로 걷는 이 마음’, ‘대대손손’, ‘청부’ 등을 연출했다. 현재는 창작극회 대표와 전주연극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원국악정보고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