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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 | [특집]
가나지와와 전주, 같지만 다른 것들
원도연 전주시정발전연구소 연구원(2005-01-07 18:12:14)
일본식 모델은 늘 우리를 흥분시킨다. 일본이 한국보다 30년쯤 앞서간다거나 삼성그룹의 리더들이 일본에 머물면서 사업구상을 한다던가 한국의 정치인들이 앞 다퉈 일본을 학습한다든가 하는 등등 일본에 관한 신화는 끝이 없다. 이런 식의 신화가 신화로 그치지 않는 것은 강력한 성공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지역축제의 성공작인 무주 반딧불이 축제가 철저하게 일본을 벤치마킹한 사례이고, 전주의 명물로 부상하고 있는 한옥마을도 부분적으로는 일본식 모델을 차용했다. 일본이 이처럼 우리에게 남 같지 않은 것은 일본과 한국이 맺어온 인연이 남다르고 어쨌거나 일본이 지금의 한국보다 훨씬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이 시작한 근대사회의 프로젝트를 그대로 이어받다시피 했고, 지금도 구석구석에 ‘일본식’의 풍경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일본은 늘 가장 가까운 모델일 수밖에 없다. 가나자와는 그런 의미에서 전주의 모델이다. 그러나 전주보다는 가나자와가 훨씬 더 먼저 전주를 알았고, 전주의 가치를 발견했다. 가나자와는 전주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거리의 풍경과 규모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까지 너무 닮았다. 가나자와를 다녀온지 한참 지나서 나는 우연치 않은 기회에 가나자와의 성주 마에다 토시이에라는 인물을 접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일본 역사상 가장 격렬했던 센고쿠(戰國)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키며 일본 통일의 기초를 다졌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시대를 살았다. 조선의 역사로 보면 선조임금 시절이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일생에 여러 번의 기회를 가졌던 인물이다. 첫 번째는 오다 노부나가가 암살당한 뒤 일본의 패권을 두고 격돌했을 때 그 역시 한번은 욕심을 부릴 만 했다. 두 번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공에 실패하고 숨을 거두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쌍벽을 이루면서 ‘천하인’의 꿈을 펼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았다. 완고하고 원칙적인 무사로서 생을 일관했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더 많은 영지와 더 많은 권력의 가능성이 항상 그에게 있었지만 그는 물러날 때를 정확하게 알았다. 그런 그에게 정말 회한은 없었을까. 누구보다 충실했고 싸움터에서는 물러날 줄 몰랐던 무장이었던 그에게도 회한은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최대 실력자로 부상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은 마에다 뿐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마침내 몸을 일으켜 천하를 제패하고자 할 때 그는 그의 아들과 군대를 조용히 가나자와성으로 물렸다. ‘천하를 위해’ 다시 한번 몸을 숙이면서 그는 피눈물을 흘렸다. 가나자와는 이렇게 만들어진 성이었다. 전주가 ‘꽃심’을 머금은 순응과 저항의 땅이었다면 가나자와 역시 회한의 땅이었다. 마에다 가문은 그후 가나자와에서 문화를 꽃피웠다. 나는 마에다 토시이에를 이해하고 나서야 전주와 가나자와가 놀랍도록 흡사한 분위기를 갖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가나자와가 금박과 화려한 공예문화를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용하고 절제된 도시 아우라를 가지게 된 정서적 배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나자와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수없이 많다. 그들이 앞서 일궈놓은 많은 문화적 아이템들은 눈부시게 부럽고 샘나는 것들이다. 우리도 그런 문화공간과 쉼터와 삶의 양식을 갖고 싶다. 그 무엇보다 서두르지 않고 절제하며 맑은 눈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부러움의 정체였다. 그러나 전주는 가나자와와 많이 다르고, 한국은 일본과 다르다. 우리가 강력한 중앙집중의 권력구조를 강고하게 다지며 절대왕권에 기댄 피나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은 전국시대를 통해 처절하게 피 흘리며 분권과 자치의 정치구조를 학습했다. 그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마감하고 들어선 통일의 시대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록 은거하다시피 살았으나 ‘스스로’ 도시를 만들고 중앙에 맞서는 문화적 힘을 쌓아올린 가나자와 등의 지방도시가 속속 성립되었다. 일본의 근대는 이 치열한 전국시대를 거쳐 생성한 ‘자치의 힘’과 그 시대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와 상업과 무역의 힘으로 이룩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일본의 전적으로 한국의 교사일 수만은 없다.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치열한 자치와 분권의 노력은 한국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문제는 투쟁만이 아니라 그 투쟁을 통해서 형성된 진정한 창의성과 도전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진정으로 배울 것은 현재의 가나자와가 아니라 가나자와 성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투쟁심과 창의성이다. 지금 가나자와는 바로 그 전통과 힘겨루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문화운동가 오오바 요시바씨는 ‘발신’을 강조했다. 세계를 향해 이 도시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신의 아이템은 결코 전통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통에 머무르기 보다는 새로운 전통을 행해 도전하겠다는 투쟁심과 창의성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자와는 지금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이대로 21세기가 지나고 나면 가나자와는 자신들의 문화적 아이템을 하나 더 추가하면서 그것으로 또 다른 자랑거리를 삼을 것이다. 완고한 전통문화의 숲을 뚫고 새로운 문화가 꽃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 거창하게 말하면 지금 가나자와는 비로소 그 성의 개척자였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나자와는 확실히 인상적인 도시였다. 전주에게 가나자와는 어쩌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도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역사와 전통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이다. 그들이 겪어온 부침의 역사속에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지금 가나자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확히 평가하지 않으면 우리의 학습은 또 헛다리를 짚는 것일 수 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비통하게 회상하며 무사로서 죽어가고자 했다. 병마로 인해 죽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칼을 뽑아 무사의 절개를 지키겠노라고 비장하게 외쳤지만 그 죽음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의 인내와 굴종을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원도연 | 전북대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문화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저널 편집장과 새전북신문 기획실장을 지낸바 있고 지금은 전북대와 전주대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전주시정발전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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